어느덧 테라스는 텅 비어 나와 '별빛 씨'만 남았다. 사건은 심야로 향하고 있었다. 웨이터가 분주하게 주변을 정리했다. 접시 부딪는 소리가 구슬처럼 낭랑했다. 그들은 단련되고 찌든 기계 같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윤곽이 흐린 수평선을 응시했다. 나침반의 지남철이 떠올랐다. 신영복은 말했다. "북극을 가리키는 지남철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바늘 끝을 떨고 있다. 여윈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도 좋다." 불투명한 시야 속에서 흔들리는 수평선이 꼭 지남철처럼 보였다. 그건 내 안팎에 도사리는 불안과도 같았다.
별빛 씨가 초점이 닫힌 내 앞에 잔을 흔들며 물었다.
- 이 순간이 당신의 예술이 될까요?
나는 눈을 돌려 그녀의 습기 어린 눈꺼풀을 바라봤다. 문득 그녀와의 입맞춤이 궁금해졌다. 그 어떤 격렬한 상념도 달아날 것 같았다. 미세하게 떨리는 입술의 잔주름이 아름다웠다. 나는 말했다.
- 글쎄요. 그나저나 너무 늦었지 않아요?
- 아직은 괜찮아요.
난 다시 바다로 고개를 돌렸다. 달밤의 비행구름이 하늘에 층을 냈다. 생각했다. 내 유랑의 지도에 별빛 씨는 없었다. 어디선가 나타난 그녀 때문에 길은 복잡해졌다. 떠나지 않는다면 아마 우린 밤을 함께 보내게 될 것이다. 시간을 역행하는 슬픔의 썰물, 철없는 설렘의 밀물. 어울릴 수 없는 둘이 뒤엉켜 내 마음은 만조였다. 그녀는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말했다.
- 안 물어봤으면 더 좋았을 텐데. 가실 생각인가요?
- 마음을 읽는 일은 관두죠. 우선 나갑시다. 값은 제가 치를게요.
- 그럼 전 다음에 뭐 할지 생각해 볼게요.
내 몇 안 되는 독자들이여, 예술가의 취중 진담은 이런 식이다. 나는 카운터에 서서 혹 이 모든 것이 꿈은 아닐까 생각했다. 나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실험실에 들어와 있다. 「메멘토」의 연장선으로 난 선행성 기억 상실증 환자다. 곧 카운터 서랍장에 숨어 있던 의문의 괴한에게 습격을 받고, 내일이면 그녀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싫증을 느낀 놀란은 작전을 변경해 「인셉션」의 후속작 연구에 나를 투입했는지도 모른다. 곧 파도의 하얀 포말이 웅성거리며 발치에 닿고, 일순간 해일이 들이쳐 나를 깨울 것이다. 링거를 잔뜩 꽂은 내가 허탈한 표정으로 눈을 뜨면, 모든 행방을 지켜보던 그는 웃음을 터뜨리며 묻는다. "속았지?" 하고. 나도 모르게 겁에 질려 뒤돌아봤다. 별빛 씨는 탁자에 손거울을 올려두고 매무새를 가다듬고 있었다. 나와 눈을 마주치자 부끄러운 듯 웃으며 서두르는 몸짓을 했다. 아직 팽이는 돌아가고 있었다.
우린 해안가를 따라 걸었다. 달은 새벽녘의 정감을 함뿍 머금어 우리 사이에 보드라운 빛을 뿌렸다. 그녀가 이어폰을 꽂고 한쪽을 건넸다. 발에 채는 모래알이 눈처럼 바스러지는 가운데 나카무라 유리코의 「Last Fascination」이 흘렀다. 피아니스트의 손길은 안개 위를 걷듯 사뿐했다. 설아가 떠올랐다. 2년 전 나는 똑같이 이곳에서 설아와 함께 음악을 들었다. 나는 귀를 덮은 그녀의 긴 머리칼을 어루만지며 이어폰을 꽂아 주었다. 그때 우리가 들었던 많은 음악 중에는, 김동률의 「내 사람」도 있었다.
김동률, 내 사람
설아는 이 곡이 우리 이야기 같다고 했다. 내가 처음 그녀에게 알려준 해부터 종종 찾아 들었다고, 가사의 매력을 그때 알았다고도 했다.
- 아까 왜 돌아봤어요? 도망갈까 봐?
정적을 깨고 별빛 씨가 물었다. 설아의 잔상도 사라졌다.
- 카운터에서?
- 네.
- 도망가려고 했는데, 실패했어요.
- 전 도망갈 생각 없어요.
- 너무 솔직하네요. 아직 새벽 두 시도 안 됐는데.
- 「Nothing good happens after 2 a.m.」. 그거 말하는 거죠?
- 역시 아시네요.
- 거기서는 새벽 두 시 넘으면 고백하잖아요.
- 새벽은 예술가의 시간이니까요. 예술가는 고백하는 사람이고.
- 사기꾼의 시간일 수도 있어요. 예술가는 사기꾼이에요.
- 자책이 너무 심하네요.
- 대중으로 하여금 믿게 하는 게 우리 일이에요.
그 대목에서 그녀는 내게 눈웃음을 쳤다.
- 생각해 봐요. 만약 당신이 날 만난 걸 소설로 쓴다고 쳐요. 전 엄청난 미녀가 돼 있을 거고, 여긴 산토리니가 돼 있을 걸요.
- 거짓말투성이네요.
그 대목에서 그녀는 내 팔을 툭 쳤다. 난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 그런 얘기는 이미 링클레이터가 완성했어요.
- 선례가 있어서 못 하는 거야말로 슬픈 거죠.
- 그런가요?
- 그렇지 않나요?
- 슬프네요.
- 별로 안 그래 보이는데.
- 진짜 슬플 땐 침묵하는 거예요. 세네카의 말처럼. 동의하죠?
- 그래, 누구나 밝힐 수 없는 슬픔이 있어요. 침묵은 그게 현재를 잡아먹지 않도록 하는 최선의 수단이죠.
- 만일 침묵해도 자꾸 눈에 밟히는 슬픔이라면?
- 눈에 안 밟히게 안간힘을 써야죠. 안간힘을 써서라도 우린 살아야 하고요.
글쎄. 과연 그럴까. 망설여졌다. 그녀의 말이 맞기는 하되,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길 가는 어디에도 설아가 발을 걸었다. 별빛 씨는 날 빤히 바라보더니 물었다.
- 잊지 못할 이야기가 있나 보네요.
- 글쎄요.
나는 바다로 고개를 돌렸다. 밤이 깊어 수평선의 음영이 은은했다. 구름은 한밤의 자연(紫煙)처럼 가늘고 곧게 뻗었다. 그녀를 만난 후 아직껏 한 번도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는 생각이 새삼스레 스쳤다. 별빛 씨를 두고 오른편으로 멀찍이 걸어 바위섬까지 갔다. 연기는 등대의 불빛에 부딪쳐 수심을 알 수 없는 깊은 바다로 떠내려갔다. 멀리 그녀는 발끝으로 모래를 쓸고 있었다. 나는 태우다 만 꽁초를 담뱃갑에 우그리고 서둘러 돌아갔다. 그녀가 눈을 흘겼다.
- 담배는 왜 펴요?
- 가장 아름다운 그림은 파이프 담배를 물고서 꿈꾸는……. 아까 말했듯이.
- 아, 그래요?
- 설명하자면 길어요.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앞서 걸었다. 나는 보폭을 넓혀 그녀의 옆으로 갔다. 그녀는 내가 건성으로 답한다는 양, 혼잣말처럼 말했다.
- 신비주의야, 뭐야.
웃음이 나왔다. 핀잔하는 모습이 설아와 닮았다. 언젠가 함께 전시회에 갔다가 급한 전화로 먼저 나온 적 있다. 다시 들어가려니 재입장이 불가하다고 해서, 그녀는 중간부터 홀로 관람해야 했다. 설아는 잔뜩 골이 난 얼굴로, 혼자 이리저리 치이다 보니 여기 사람들이 다 우산 쓴 마그리트 같았다고 말했다. 난 우산 사다 줄까? 라고 답했다가 기분을 풀어주는 데 저녁나절을 모조리 투자해야 했다. 글쎄, 사실 모조리 꿈은 아닐까? 마치 「트루먼 쇼」처럼 저 먼 바다 끝에는 검은 벽이 있다. 곧 그곳의 확성기로부터 기지 방송망 점검 사이렌이 울릴 거다. 그럼 나는 지각을 염려해 바쁘게 움직여야겠지. 꿈을 털어낼 시간도, 아직껏 이름도 모르는 사람을 떠올릴 정신은 없다. 출근해 한숨을 돌리다 보면 아름다운 별빛 씨의 얼굴은 잔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물론 알고 있다. 이 순간이 막막해서, 또 언젠가 지금을 쓰라리게 후회할 것 같아서, 노력하지 않아도 잊을 수 있는 꿈이었으면 싶다는 것을. 지금 내 옆의 그녀는 아무 걱정도 없는 듯 음악에 맡겨 차분하게 몸을 흔들며 날 향해 웃어 보인다. 브라이언 크레인의 「Song for Sienna」가 나왔다. 나는 물었다.
- 뉴에이지를 좋아하시나 봐요.
- 피아노를 좋아해요.
- 좋네요.
- 서정적인 걸 좋아해요. 뭐든, 서정적으로.
음악이 절정부로 치달으며 트롬본이 흐르고 큰북이 울렸다. 난 바다로 시선을 냈다. 걱정 없이 사랑에 빠지고 싶었다. 잘 되지 않았다. 별빛 씨가 말했다.
- 당신은 잘될 것 같아요.
- 복사 및 붙여넣기.
- 스캔으로 부탁할게요.
그녀는 내 팔을 쿡 찌르며 프린터 버튼을 누르는 시늉을 해 보였다. 프린터의 눈 따가운 레이저 대신 눈부시게 흰 파도가 머릿속을 쓸고 갔다. 높은 하늘에서 부감한 파도처럼 커다랗게. 그녀가 흔들거리며 말을 이었다.
- 전 원래 조소(彫塑)를 했어요. 밤늦게까지 작업하다가 집 가는 길에는 꼭 똑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별이 떴어요. 그때마다 얼마나 소원을 빌었나 몰라요. 이게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건지 알게 해달라고, 후회하지 말게 해달라고. 괴로웠어요. 누군가는 석고에 저렇게 반짝이는 별을 새길 테지만, 저는 빛의 음영보다는 그 색을 그려내는 게 훨씬 좋았거든요. 결국 방향을 틀어 서양화를 공부하게 됐죠.
- 내가 무얼 더 좋아하고 잘하는지 안다는 건 축복이라고 생각해요.
- 지금 생각하면 예전의 저한테 감사한 면도 있죠. 근데 후회한 적도 많아요. 지금도 별을 보면 가끔 그때 생각이 나요. 만일 내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 혹시 더 행복하지는 않았을까?
그래, 그랬구나.
나 역시 그렇게 힘든 날이 있었다.
설아야, 너를 사랑하며 있었던 많은 과거를 나는 후회하곤 했다.
설아야, 너를 사랑하며, 도망친 채로,
너를......
- 안 듣고 있죠.
별빛 씨였다.
- 아뇨,『해리포터』 좋아하시나요?
- 네, 엄청 좋아하죠. 왜요?
- 『해리포터와 비밀의 방』에서 덤블도어가 해리한테 말하죠. 우리의 선택이 진정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그녀는 쓸쓸하게 웃었다.
- 알고 있어요. 그 선택이 만든 나 자신이 만족스럽지 못할 뿐이죠.
- 지금이 만족스럽지 않은 거예요.
설아야, 넌 그걸 동정이라고 했다. 거칠지만 사실이었다. 자기를 동정하는 자는 도태된다.
설아야, 그래서 넌 지금 잘 살고 있니?
넌 너 자신을 동정하지 않니?
그래서 그렇게 울었던 거니?
- 그러게요.
별빛 씨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실수했다. 난 정신을 바짝 차렸다. 여기서마저 설아 때문에 별빛 씨를 위로하지 못하면 안 된다. 그래,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난 천천히 말했다.
- 솔직히 전 당신이 왜 지금을 만족스러워하지 못하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보기엔 전혀 그럴 이유가 없어 보이거든요. 이런 말이 별로 도움이 안 된다는 것도 알아요. 당신은 자아가 강한 사람이니까. 하지만 전 이렇게 믿어요. 당신의 여름이 올해는 조금 길다고. 언젠가는 가을이 올 거예요. 가을이 되면, 지금 당신이 고민한 게 체력이 되어줄 거예요. 우리는 그걸 믿어야 해요.
- 고마워요.
- 아니예요.
- 따뜻해졌어요.
- 다행이네요. 아쉽군요, 조소과 친구는 한 명도 없는데.
- 회화과 친구는 많은 모양이죠?
- 다 당신도 알 만한 인물들이에요.
별빛 씨는 눈을 흘기며 내게 선곡을 권했다. 나는 재주가 없다며 거절했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저만치 앞서나갔다. 난 짐짓 천천히 걸었다. 생각했다. 만일 5년 전 운명처럼 설아를 만나지 않았다면. 설아와는 완전히 다른 장소에서 스물을 맞이했더라면 어땠을까. 사랑은 물론 사람까지 잃어버려야 하는 사건을 여러 번 겪으며 내 유년은 괴로웠다. 설아와 헤어지고 나서도 얼마나 후회했던가. 그녀를 만나지 않았다면 차라리 행복하지 않았을까 생각한 적이 하루이틀이 아니다. 하지만 가능세계를 가늠하는 후회야말로 억척스럽다. 몇 번이고, 몇십 번이고 돌아가도 난 유설아를 사랑하게 될 거다. 당연하다. 쟁점은 그 추억의 의미여야 한다. 마음은 끝이 뾰족한 나무상자 같아서 사포로 겉을 매만질 수도, 드라이버로 속을 들어낼 수도 있다. 사포가 닳을 즈음 뚜껑의 경계는 희미해지고, 추억은 마음 속에 봉인되고 말 것이다. 반면 슬픔을 참고 모든 나사를 떼어낸다면 난 추억을 꺼내볼 수 있을 것이고, 버리든 말든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뒤돌아보는 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이며 미련 없이 나아가려면 과거를 정리해야 한다. 시절의 만만치 않은 무게를 그대로 봉인해버리면 몸이 언젠가 견디지 못한다. 차라리 상자를 열어젖혀서 추억을 거머쥐고 알맞은 무게로 깎는 게 낫다. 추억은 원석이다. 세공하여 내 보석이 된다. 보석은 조그맣게 빛난다.
이오공감, 한 사람을 위한 마음
설아는 내 안에 영원할 것이다. 그녀가 라디오에 적은 사연이 나인지, 새로운 남자인지, 그간 어떤 일이 있었는지 종잡을 수 없다. 내 마음은 배반과 실망, 기대의 벤 다이어그램을 가로지르며 추억의 현주소를 찾는다. 그녀가 날 더는 사랑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 난 아직 유설아를 사랑한다. 별빛 씨에게는 미안하다. 하지만 난 별빛 씨에게서 설아를 느낀다. 날 앞질러가는 별빛 씨의 뒷모습에서 설아를 본다. 들키지 않겠다. 힘껏 감추겠다. 춘래불사춘, 별빛 씨를 만나 설아의 추억이 바르르 떤다. 오직 스스로만을 미워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