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녀로 말할 것 같으면, 내가 휴가를 나갈 때마다 집 앞 도서관에서 보던 천사였다.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아, 누가 지나다니건 말건 책에서 눈을 떼지 않던 아가씨. 그녀는 책에 집중하느라 민방위 훈련 사이렌이 울리는 줄도 몰랐다. 난 그녀가 제발 눈길이라도 한 번 주길 바라며 맞은편에 앉곤 했다. 정작 앉고 나서 뭘 더 한 건 없다. 애꿎은 책만 뒤적거리다 저녁약속 즈음 떠났다. 그녀의 맞은편에 앉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표현이었다. 이름도, 나이도, 연인관계도 모르는 채 난 그녀를 겉돌았다. 자기 전 그녀가 떠올라, 어쩌면 설아를 놓아주게 된 건가 생각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정약용도서관의 가브리엘라가 이곳 속초의 어느 고즈넉한 바에, 그것도 내 바로 앞에 있었다. 믿기지 않는대도 하는 수 없다. 감히 짐작도 못 할 우연이었다. 내가 눈이 휘둥그레진 채 말이 없자, 여자는 배시시 웃으며 내 뒤를 가리켰다.
- 이거 시키신 거 맞죠? 저기서 봤어요.
- 아······.
- 앉아도 될까요?
당황스러운 제안에 별안간 정신이 들었다. 짐짓 침착한 척 답했다.
- 물론입니다.
그녀는 우아하게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맞은편에 앉았다. 그제야 나는 상대를 제대로 마주보았다. 어린아이처럼 큰 눈에 오똑한 코, 살짝 통통한 볼 위로 웃을 때마다 잡히는 광대가 매력적이었다. 어깨춤까지 오는 금갈색 머리칼이 등불에 반사되어 보드라웠다. 허리께를 벨트로 묶은 베이지 톤 원피스는 머리색과 조화를 이루었다. 그녀는 목소리마저 참 고왔는데, 꼭 새벽녘의 비밀스러운 숲속 같기도, 그 어딘가 불 밝힌 암자의 풍경(風磬) 같기도 했다. 전체적인 분위기로 보아 이 아가씨는 초가을 사람으로 긴 여름을 끝내러 온 것 같았다. 이렇게 기품 있는 저승사자는 이동욱 이후로 처음이긴 하다만. 그녀가 다정스레 물었다.
- 혼자 오셨나 봐요.
- ······네, 그렇습니다.
- 우리 언젠가 만난 적 있지 않나요? 얼굴이 낯이 익은데.
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내가 뭐라고 기억해준단 말이냐.
- 아······, 네, 그, 도서관에서······.
- 그쵸! 역시. 제가 얼굴 기억 잘하거든요. 근데 자주 안 오시지 않아요?
- 네, 그, 제가 군인이라, 휴가 나오면······, 갔었죠.
난 혹시라도 그녀가 날 일병으로 보고 실망할까 봐 급히 덧붙였다.
- 다음 달이면 제대합니다.
- 아, 그래서 항상 머리가 짧으셨구나. 축하드려요.
- 감사합니다.
너무 쑥스러워 더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예전에 설아에게 처음 말 걸 때는 그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나고 깊은 이별을 견디며 간이 콩알만해졌다. 반면 내 맞은편의 천사는 초면의 대화에 능해 보였다. 그녀가 부드럽게 물었다.
- 여행 오셨나 봐요.
- 네, 바다 보려고······.
여기서도 질문을 못하면 정말 후회할 것 같아서 용기를 쥐어짰다.
- 혼자 오셨어요?
- 네. 도망 나왔어요.
- 어디서요?
- 책 속에서요. 너무 오랫동안 그 안에 있었거든요.
보통의 경우라면 뭔 소린지 싶었겠지만 그녀 특유의 분위기와 머릿결을 흔드는 바닷바람은 그 말을 아주 멋지게 만들었다. 난 거기 완전히 홀린 채 푼수마냥 감정을 드러내 버렸다.
- 와, 표현이······, 멋져요.
- 아녜요. 같이 얘기하실래요? 제가 여기로 올게요.
- 네, 너무 좋죠.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유리잔과 접시를 들고서 돌아왔다. 머리를 한쪽으로 쓸어넘기며 내게 물었다.
- 여기 언제까지 있을 생각이세요?
- 아, 계획상으로는, 음······.
생각해둔 대로 말했다간 낭패를 볼 우려가 있었지만, 난 내 감수성을 솔직하게 발휘해보기로 마음먹었다.
- 별이 뜨면 가려고 생각 중이었습니다.
그녀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멋쩍게 말을 이었다.
- 바다 보다가 밤 돼서 별 보이면 간다, 뭐 이런 거죠. 그런데 통 안 보이네요.
그녀가 힐끗 웃었다. 드러나는 광대가 예뻤다. 그녀는 카페 안쪽을 가리켰다.
- 별이라면 저기 있네요.
- 네?”
그곳에는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의 복제화가 있었다. 스물의 겨울, 오르세 미술관에서 몇십 분이고 서성이며 빨려들었던 빈센트 반 고흐의 명화다. 나는 저 그림을 무척 좋아한다고, 휘몰아치는 선들의 붓 터치를 실제로 본 날을 잊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화색을 띠며, 자기도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이 걸린 것을 보고 무턱대고 이곳에 들어왔다고 했다. 나는 신이 나서 물었다.
- 신기하네요. 혹시 실물도 보셨나요?
- 네. 저 대입 때 부모님이랑 약속했거든요. 올해 대학 가면 제일 가고 싶었던 나라로 여행 가자고. 운좋게 합격해서, 스무살 1월, 온 가족이 다같이 파리에 갔어요. 파리, 멋지지 않나요? 생각만 해도 벅차잖아요. 예술가와 로맨스의 도시. 당시 제게는 행선지가 단일했어요. 고등학교에서 나름 프랑스어도 배웠고.
- 우와, 그럼 오르세랑 오랑주리 미술관 다 가셨겠네요?
- 네. 오랑주리 미술관은 정원 때문에 갔죠. 「수련 연작」 아시죠. 혹시 가셨나요?
- 아니요. 저는 파리에 4일 있었는데, 오르세에서 하루를 다 쓰는 바람에 못 갔어요. 화요일이 휴관이더라고요. 며칠 다녀오셨어요?
- 저는 일주일 있었어요. 1월 19일부터 25일까지.
- 어? 전 1월 20일부터 23일까지였어요. 혹시 몇 년도인가요?
- 2020년이었어요. 제가 보기보다 조금 어려요.
수줍게 웃는 그녀의 말에 난 화들짝 놀랐다. 나와 그녀는 4일간 파리에 같이 있었다. 우리는 개선문 로터리나 알렉상드르 3세 다리에서 엇갈렸을 수도 있다. 헤밍웨이처럼 왼켠에 책을 끼고 걸어가는 나와, 메릴린 먼로처럼 총총 지나가는 그녀를 교차해 보았다. 기막힌 우연의 일치였다. 나는 말했다.
- 저도 2020년이었어요. 신기하죠. 그때 같이 있었는 모양이에요.
- 어머, 그래요?
그녀는 활짝 웃었다. 나와 같은 상상을 하는 건 아닐까 생각하니 재미있었다. 우리는 잔을 맞대며 여행의 추억을 나눴다. 내 단신(單身) 일주의 보람과 고단함, 그녀가 겪었던 파리의 마성, 내가 어쩌다 오르세에서 하루를 통째로 소진하게 되었는지와 그녀가 오랑주리를 산책하며 만난 무명의 화가들……. 우리는 미술관에서 본 그림들을 논하다 자연스레 다시 고흐의 작품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녀의 잔을 채우며 말했다.
- 고흐가「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을 그리려고 아를로 갔던 1880년대에 적은 글이 있어요. 동생 테오한테 보낸 편지인데, 거기 보면……. 음…….
그녀의 집중하는 눈빛에 불현듯 긴장이 됐다. 나는 그녀에게 병을 내밀며 말했다.
- 한 잔 마시면 기억날 것 같은데요.
- 좋아요. 샴페인은 두뇌 회전을 돕는대요.
- 누가 그래요?
- "샴페인은 모든 남자를 위트있게, 모든 여자를 아름답게 만든다.” 퐁파두르 부인의 말이에요.
- 오, 처음 듣는 이름이네요. 작가인가요?
그녀는 장난스레 답했다.
- 몰라요, 코스트코에서 봤어요.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퐁파두르 부인이 누군지는 사실 관심 없다. 고흐의 말을 떠올려서 최대한 멋지게 읊어야 한다. 난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 "언제쯤이면 별이 빛나는 하늘을 그릴 수 있을까? 가장 아름다운 그림은 침대에 누워 파이프 담배를 물고서 꿈꾸는, 그러나 결코 그리지 못할 그림인지도 모르지. 압도될 만큼 아름다운 자연과 깨뜨릴 수 없는 완벽함에 아무리 큰 무력감을 느끼더라도 우선 시작해 봐야겠지." ……어찌, 그럴싸한가요?
- 와, 멋있는데요. 어떻게 기억하세요?
- 아마 훈련소 때 읽어서 그럴 거예요. 그러고 보니까 진짜 밤이 청록색이고 별은 금색이고, 그렇더라고요.
- 맞아요. 고흐의 힘이죠. 우리는 그 영향 아래에서 살지만, 정작 그 자신은 많이 외로웠을 것 같아요.
그간 군대에서 쌓은 교양을 마음껏 발휘할 최적의 상대를 찾은 기분이 들었다. 대화는 진지하고 감상적이 되었다. 난 자신있게 말했다.
- 고흐는 늘 외로웠을 겁니다. 라파엘로나 렘브란트 같은 사람들의 시대가 지나간 지 얼마 안 된 때니까, 카를로스 뒤랑과 부게로는 물론이고요. 당시 그의 그림은 추상화 취급을 받았을 거예요. 두 명의 폴도 같은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 두 명의 폴이라면……, 세잔이랑 고갱인가요?
- 네, 맞아요.
나는 주섬주섬 휴대폰을 꺼내 그림 한 장을 보여주었다. 폴 고갱의 초상화, 「안녕하세요, 고갱 씨」였다. 그림 속 고갱은 바래진 기억 속의 방문객처럼 가로문 앞에 고독하게 서 있었다. 양옆으로 꽃덤불이 휘황하게 피었고, 장롱빛 코트에는 잔바람이 스미는 듯했다. 그녀는 환한 얼굴로 말했다.
- 「안녕하세요, 고갱 씨」를 어떻게 아세요? 제가 진짜 좋아하는 그림인데, 신기하다.
난 살짝 우쭐해지는 기분이었다.
- 얼마 전에 알았습니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이라는 책에 나와요.
- 브후밀 흐라발이 썼죠. 책 좋아하시나 봐요.
- 훈련소 때 읽어서…….
- 훈련소가 좋았나 봐요.
그녀가 너무 당연하게 책을 알아서 쑥스러워졌다. 웃으며 눙치는 와중에 점점 그녀가 궁금해졌다. 내가 모르는 질문이 나올까 겁도 났다. 그녀는 이상할 정도로 갑작스레 다가와, 테라스의 등불처럼 잔잔하게 나를 일깨우고 있었다. 툭 한 번 던져보았다.
- 『너무 시끄러운 고독』을 아신다니, 저야말로 반갑네요.
- 교환학생을 체코로 가려고 했거든요. 제목만 알고 읽지는 못했어요. 어떤 얘기예요?
- 책을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얘기예요. 저도 추천받아서 읽었는데, 너무 좋았어요. 꼭 읽어보세요. 저보다는 똑똑한 분이 추천해주신 책이에요.
- 에이, 아녜요. 충분히 똑똑하신 것 같은데.
그녀는 말하다 말고 잠시 주춤하는 듯했다.
- ……세상에는 당신처럼 똑똑한 사람들이 정말 많아요. 제가 여기를 찾은 이유도 그래서인지 모르겠네요.
그녀는 말을 마치며 파도 소리에 시선을 묻었다. 좋은 답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내 방황과 현실의 소실점도 그녀와 다르지 않았다. 조심스레 말해보았다.
- 살다 보면 내가 압도할 때도, 압도당할 때도 있는데, 그럴 필요가 없는 관계만 결국 남는 것 같습니다.
- 똑똑하다는 게 꼭 지적인 것만은 아니니까요……. 관계에도 똑똑한 사람들이 많아요.
- 그렇군요.
답변이 궁했다. 그녀는 맑은 눈동자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 속에 파랑(波浪)이 잠겼다.
에피톤 프로젝트, 첫사랑
그녀가 말했다.
- 사실 전 미술을 해요. 그거에도, 미대라는 성취에도 늘 조금 고양되어 있었어요. 근데 지금은 나침반을 잃어버린 기분이에요. 저는 빈센트 반 고흐의 시대가 부럽기도 해요. 하늘의 생김새는 그 시대에서 이미 완성해 버렸잖아요. 이젠 하늘에 그림이, 그림에 하늘이 다 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미대 출신이라니. 난 속으로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하필 미술 얘기로 잘난 체를 한 게 부끄러워졌다. 아직 이름도 모르는 이 아가씨는 예술가인 데다 책까지 많이 읽어 청산유수였다. 잠자코 들었다. 오랫동안 생각한 주제인 듯했다.
- 오래된 시대가 남긴 것들이 제겐 불꽃놀이 같아요. 그게 좋아서 어떻게든 그쪽으로 가려 했는데, 정작 가까이 가니까 이미 다 끝나 있어요. 가야 할 길에는 빛이 없고 돌아갈 길에는 잔해뿐이에요. 이젠 뭘 더 그릴 수 있는지도 모르는 채로 관성에 잠식될까 두려워요.
그녀는 자기 세계에 빠진 듯 줄줄 얘기하다 문득 입을 가렸다.
- 에고, 말을 너무 많이 했네요.
난 고개를 저으며 생각했다. 불현듯 『소설의 이론』의 첫 문장이 떠올랐다. "별이 총총한 하늘이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인 시대,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주는 시대는 복되도다." 넓게는 실존의 청춘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고민에 그녀는 동경이라는 예술적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슬프면서도 다정한 이야기였다. 난 나도 모르게 말을 꺼냈다.
- 외람된 말이지만, 당신의 절망은 춥지 않군요.
의중에 없던 수사를 던져놓고 당황한 나머지, 나는 무심한 척 유리잔의 입가를 만지작거렸다. 그녀는 쿡 웃었다. 밤바다의 산들바람이 팔꿈치를 간질이고, 안개가 새털처럼 가늘게 날렸다. 그녀는 말했다.
- 당신도 못지 않게 따뜻한 것 같네요.
답변을 궁하게 만드는 특출난 재주가 있는 여자였다. 난 머리를 긁적였다. 그녀는 국민대 회화과 3학년이라고 했다. 심신이 몹시 지쳐 있으며, 주변의 충고, 위로, 연민 따위를 섣불리 받아들일 수 없는 처지라고 했다. 오전에는 "인간의 굴레에서"를 읽다가 주인공이 고독을 견디지 못하는 장면, 파리의 무명 화가들이 과거를 동경하는 장면에 울컥해서 떠나왔다고 했다. 그 목적지가 왜 하필 여기였는지는 묻지 않았다. 대신 그녀에게 『영혼의 편지』를 권했다. 빈센트 반 고흐가 일생동안 적은 편지를 옮긴 책으로, 내 스물두 살의 자화상이다. 예술에 관한 나의 말들은 대체로 거기서 왔다고, 나 역시 비슷한 고민이 많았지만, 마음을 다잡는 데 도움이 되더라고 말했다. 그녀는 불쑥 물었다.
- 가지고 계신가요? 빌려 볼게요.
물론 가지고 있다. 지난 여름 장마의 포화를 얻어맞았을 뿐. 한 권 더 사면 그만이다. 난 빌려주마고 답하며, 그녀에게 조촐한 교양을 내보인 점을 사과했다. 그녀는 다정한 어투로 답했다.
- 그 경솔함을 유감스레 여기지 않을게요.
그 말을 하며 그녀는 머리를 쓸어 넘겼는데, 『여인의 향기』처럼 우아한 제스처였다.
잔나비, 밤의 공원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우리 목소리도 조금씩 커졌다. 밖은 어느덧 별의 자취가 석연했다. 별들은 총총히 모래톱에 자국을 남기고, 마파람에 바다가 바르르 떨었다. 건물들은 달빛을 등지고 묵중한 그림자를 늘어뜨렸다. 그녀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내게 물었다.
- 당신은 뭘 좋아하나요?
- 저는 글을 쓰고 음악을 만듭니다. 아직 자랑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 오, 역시! 예술가였군요. 통하는 면이 있더라니. 어떤 장르예요?
- 음······, 글쎄요. 형식이 정해져 있진 않은데, 비망록이라고 해야 될 것 같아요.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 뭐에 대한 비망록인데요?
- 그동안은 주로 지나간 일들에 대해서 썼어요. 사물, 사건, 사태에 대해 쓰기도 하고, 기분이나 생각에 대해 쓰기도 하고. 일종의 회상이죠. 가사든 글이든 거의가 그랬던 것 같아요.
- 주로 행복했던 일을 쓰나요?
- 그럴 때도 있는데, 가사는 보통 슬픈 일을 많이 써요.
- 감각이 예민한가 보네요.
- 왜요?
- 가사에는 하고 싶은 말을 다 못 담잖아요, 음 때문에. 맞죠. 감정은 정해져 있어도, 그걸 잘 가꿔서 다듬어서 표현해야 하니까······, 감각이 엄청 예민할 것 같아요.
- 감각에 대해 쓴다고는 생각을 안 해 봤는데······.
- 본인은 모르죠. 감각의 비망록이네요.
감각의 비망록. 내 감정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내 감정에 대한 감각들의 기록. 설아를 잃은 슬픔은 매일 새롭게 감지되었다. 슬픔이라는 감정에 수많은 새로운 관형어가 붙었고, 앞으로도 붙을 것이다. 시차, 기온차, 슬픔과 잇닿은 여타 감정의 상태 등 수많은 변수가 감각에 종속된다. 비단 슬픔만이 아니라 대부분 감정이 그렇다. 내가 언젠가 책을 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책을 낸들 작년에 군대에서 쓴 "낭만적 작가주의"이거나 요새 쓰는 산문시 모음이겠지. "낭만적 작가주의"는 바꾸기 싫으니, 시집의 이름을 '감각의 비망록'으로 해야겠다.
- 별로예요?
순간 생각에 잠기느라 답을 놓친 난 엄지를 치켜올리며 고맙다고 했다. 그 김에 '감각'에 대한 얘기들을 해볼까 싶은데 그녀가 대뜸 물어왔다.
- 당신의 갈피가 궁금하네요.
- 갈피요?
- 네, 잔나비 노래 몰라요?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 거기 보면 갈피를 꽂는다잖아요. 책갈피처럼. 손때 묻고 각색된 과거를 갈피라고 한데요.
글을 쓴다면 이 사람이 쓰는 게 나보다 몇 배 낫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난 나름대로 응수했다.
- 슬픈 추억과 추억 서린 슬픔을 들여다보는 게 제 일이죠.
- 쓸쓸할 것 같네요.
- 사실 추억인지는 모르겠고······, 지우고 싶은 일이 더 많아요.
나도 모르게 솔직한 말을 해버린 것 같아 부끄러웠다. 그녀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미소지었다.
- 삶은 누구에게나 원-테이크 필름이에요. 잘라내거나 멈추면 영화가 될 수 없어요.
- 그렇다고 아픈 걸 구태여 간직할 필요는 없지 않나요?
- 간직하고 싶지 않다면 잊어버리지 않았을까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지만 짜증이 났다. 아무렇게나 말했다.
- 삶이 영화라면 기억은 폴라로이드였으면 싶군요. 여백이 없으면 인화되지 않고, 햇빛 쬐면 바래지는.
- 우리가 선택한다고 주어진 것들이 사라지지는 않아요. 대신 그 덕분에 지금의 당신이 되어 있겠죠. 그래서 전 당신의 과거가 궁금해요.
우린 서로를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녀의 넋두리도, 나의 질문도 각자의 절망을 배회하다 그 테두리에서 튕겨나갈 것이다. 예술적인 사람들은 시간을 고정하는 대가로 도태와 우울이라는 값을 치른다. 고갱에게서처럼 대문을 열어줄 아낙네가 우리의 그림 속에는 없다. 남자도, 여자도, 온전한 낮도, 밤도 없는 삭막한 고독 속을 홀로 걸어갈 뿐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름도 모르는 나를 별빛 같은 은유로 위로했다. 그건 이 사람이 지니는 반짝이는 인상이었다. '안녕하세요, 별빛 씨.' 나는 살며시 되뇌었다. 서로의 감각으로 맺은 몽환적인 결계를 넘나들며 나는 걷잡을 수 없는 미궁 속으로 빠져버린 것만 같았다. 파도는 어둠을 헤치려는 내 앞을 투명하게 가로막고, 지금 앉은 곳이 어느 머나먼 섬에 놓인 단 하나의 카페라면, 내게 아무것도 기억하거나 분간할 필요가 없어진다면 어떨까 하는 오묘한 착각에 사로잡혔다.
불현듯 설아가 떠올랐다. 2019년 11월의 어느 선선한 밤, 설아와 나는 도심의 고요 속을 거닐고 있었다. 그녀는 바래다주겠다는 나를 말리며 한참을 돌아 제기동 북편의 하천으로 데려갔다. 나는 못 이기는 척 따라가며 내심 기뻐했다. 개울물이 물풀 더미에 부딪혀 휘어나가는 여울목에 앉아 우린 밤새 이야기했다. 그땐 어떤 할 말이 그리 많아서 날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었을까. 세밑이 다가오고, 우린 아쉬움과 설렘으로 입동을 맞았다. 설아라면 그 무엇도 아깝지 않던 시절, 언제나처럼 시시콜콜한 이야기들로 자정을 넘겨 돌아가는데 문득 그녀는 내게 과거를 물었다. 나는 처음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으로 겪었던 상처와 두려움을 고백했다. 힘들고 잘못도 했지만 기쁘고 좋았던 시간을 밝혔다. 내가 그 시간으로 조금 성숙해졌기에 그녀를 사랑할 자격도 생긴 것 같았다. 설아는 따스한 말들로 나를 위로했다. 내게 팔짱을 끼며, 나지막이 말했다.
- 난 과거의 너까지도 사랑하고 싶어. 그 시간을 지나 지금의 네가 되었잖아.
그 한마디로 그녀가 나를 얼마나 진심으로 사랑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후 우리가 다투고 화해하는 막바지에도 그녀는 종종 같은 말을 건넸다. 늘 고마웠지만, 난 어리석게도 우리가 헤어지던 새벽에서야 그 말을 똑같이 해줄 수 있게 되었다.
조규만, 다 줄 거야
언젠가 보았던 이별에 관한 많은 소고(小考) 중에 기억에 남는 글이 있다. 역시 이별에 관한 많은 영화 중 하나를 여러 번 보아야 했던 저자는 그 속에서 몇 번이고 반복되었던 메시지를 문장으로 옮겨놓았다. 새로운 사랑과 기적적인 재회는 이율배반이어서 둘 중 하나를 버리지 않으면 무엇도 취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첫사랑과 재회하리라는 기대 없이 새로운 사랑을 하는 사람이 어딨냐는 생각에, 그 말을 무시했다. 하지만 지금은 답을 내릴 수 없다. 설아는 연애뿐 아니라 자기와 만나기 전에 겪었던 일들 전반을 늘 궁금해하고 물어왔다. 반면 나의 사랑은 겁이 많아 그녀의 지난날을 궁금해하지 못했다. 또 다른 운명적인 만남이 도래한 지금 나는 설아를 떠올리고, 내 마음속에는 그녀와의 추억이 무성한 절망의 군락을 이루고 있다. 나에게 모든 걸 건 설아와 달리 내 부유투성이 사랑은 기적적인 재회는 고사하고 새로운 사랑의 경계에서 설아에게 붙들려 있다. 이율배반의 명제가 옳다면, 설아는 틀림없이 날 잊었을 것이다.
단지 나만이, 새로운 사랑도, 기적적인 재회도 취할 수 없는, 고독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나름 열심히 달려왔다고 생각했는데, 열차 시간은 기약없이 늦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