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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언호 Oct 09. 2024

별빛과 수평선

 난 기계적으로 별빛 씨를 따라 차에서 내렸다. 속이 메슥거렸다. 앞서 가던 그녀가 굳어진 내 표정을 보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 무슨 일 있어요?

- 아니에요. 친구한테 어떤 말을 했는지 기억이 잘 안 나서.

- 중요한 말이었나요? 

- 글쎄요.

- 또 그런다. 뭔데요, 알려줘요.

- 가면서 얘기하죠.

 우린 동명항에서 영금정으로 이어지는 비포장도로를 걸었다. 인기척이 없는 가운데 산들바람이 맥문동의 흙먼지를 털고 있었다. 방파제에 갇힌 파도의 메아리는 자못 비장했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동틀 무렵의 공기에 항구의 질긴 갯내가 메였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으며 말을 이었다. 

- 어떤 이야기가 있어요. 그걸 친구한테 말한 적 있는지 알아야 돼요. 근데 기억이 안 나네요.

 별빛 씨는 다정스레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 그럼 찾아내야죠. 도와줄게요. 언제 마지막으로 만났나요?

- 그 녀석 군대 가기 전이었던 것 같아요.

- 단둘이?

- 네. 근데 그땐 정말 별 얘기를 안 했어요. 들어주기 바빠서.

- 그랬군요. 그럼 그 전에는요?

- 음...... 연에 서너 번?

- 많이 안 만났네. 하나씩 찬찬히 생각해 봐요.

 나는 겹쳐지는 잔상들을 골라내며 곰곰이 기억을 더듬었다. 작년 1월, 내 첫 휴가 때 입대를 앞둔 그를 만나 단골집에 데려갔다. 우린 언제나처럼 얼근하게 취했고, 그는 듣기 안쓰러운 푸념들을 늘어놓았다. 막 자대 적응을 마쳐 기분이 좋았던 난 짐짓 차분하게 모든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언젠가부터 그의 화두는 줄곧 어떻게 돈을 벌 것인지였다. 그는 야간에도 아르바이트를 뛰었고, 새벽같이 나가서 상하차를 했다효성이는 그 돈으로 어머니의 병원비를 댔고, 등록금을 냈고, 임용고시 학원에 등록했다. 효성이는 학교가 내려다보이는 5층 옥탑방에 살았는데,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늘 걸어올라갔다.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워서 대체 어떻게 살지 싶은 쪽방. 그는 딱 한 번 나를 그곳에 초대했다. 당시 나도 그다지 넉넉한 형편은 아니어서, 우린 과자를 두 봉지 까놓고 종이컵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소주만 마셨다. 음악에 대한 고민으로 마음이 바빴던 난 담날 새벽녘에 먼저 간다는 문자를 남기고 집에 돌아왔다. 그날, 그 새벽의 찬 공기를 맞으며 역으로 가던 길, 익숙하지만 정겹지 않은 길, 안개가 시퍼렇게 살아 앞을 막던 길,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들고 도망치듯 가던 길......

맞다. 그 사월 아침의 서리 맺힌 할미꽃이 안암오거리 갓길에 동그마니 피어 나를 기다렸다. 내가 '할미꽃'을 쓰게 된 계기였다.

- 살짝 기억났어요.

- 언제였는데요?

- 재작년 사월이요. 확실해. 

- 근데, 그 이야기라는 게 뭔데요? 물어봐도 되나?

- 네, 제가 쓴 글이요.

 별빛 씨가 잽싸게 물었다.

- 글? 왜요. 아까 그 사람이 표절이라도 했어요?

 순간 아차 싶었다. 효성이에 관한 생각이라는 것을 드러내면 안 됐는데. 그녀에게 그의 시를 보여준 직후라는 걸 간과해버린 것이다. 나는 일부러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 아니요. 그 친구랑은 관련 없어요.

- 근데 이렇게 갑자기? 

- 나중에 알려줄게요. 

- 자꾸 나중을 기약하면 우리 또 만날 수밖에 없는데......

 나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간신히 그러쥔 정신을 흩뜨리고 싶지 않았다. 옆에서 그녀가 방그레 웃으며 내게 바싹 붙어 걸었다. 팔에 닿는 카디건이 간지러웠다. 계단을 오르며 그녀가 물었다. 

- 이제 그 이야기를 상대한테 한 시점만 찾으면 되겠네요. 재작년 사월 이후겠죠, 아마?

- 네. 생각 중이었어요.

- 그 글을 쓰고 난 바로 다음 만남 아닐까요?

- 쓰고 나서?

- 네. 이런 글을 썼는데 한 번 볼래, 하는 식으로. 

- 내 글을 보여준 적이 잘 없는 것 같은데.

- 에이, 그건 모르죠. 

- 정말이에요. 남한테 보여주는 거 힘들어하거든요. 생각이 많아져서.

- 술 취해서 내친김에 했다거나, 아니면 꼭 둘이서가 아니어도, 여럿이 모였을 때 당신이 그런 이야기를 할 때가 있지 않았을까요?

 불현듯, 정말 갑작스럽게 그해 팔월의 기억이 스쳤다. 나는 은정이와 함께 학과 단짝 친구인 종성이의 자취방 맨바닥에서 눈을 떴다. 온 방에 술 냄새가 진동했다. 발수건을 베고 잔 걸 깨닫고 화들짝 놀라 앉으니 침대 위에서 종성이가 나무늘보처럼 퍼져 있었다. 내 발치에서는 효성이가 잠들어 침을 흘리며 웅얼거리고 있었다. 나는 종성이에게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다. 그는 내가 효성이와 술을 마시다가 자기를 불러냈다고 했다. 소개해줄 친구가 있다면서. 가보니 효성이와 나는 이미 반쯤 정신이 없어 보였고, 담배를 피우고 돌아와서는 턱을 괴고 거의 잠들었다고 했다. 이상한 일은 없었냐고 묻자 그는 웃으며, 효성이와 내가 한참 시끄럽다가 갑자기 차분해져서는 음악 얘기를 했다고 했다. 효성이가 내 새로 썼다는 글을 보더니 엄청 치켜세웠다고. 필름이 끊겼냐며 타박하는 그에게 사과하며 휴대폰을 열었을 때, 「할미꽃」이 적힌 메모장이 덩그러니 열려 있었다. 

 일정이 있다는 효성이를 보내고 종성이와 밥을 먹는데 그가 내게 귀띔했다. 효성이가 신경 쓸 법한 이야기, 특히 설아에 대해서는 많이 말하지 말라고. 내가 이유를 묻자, 그가 나를 많이 부러워하는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이미 효성이와 설아가 서로를 알고 있으며, 효성이는 심지어 내가 설아와 이어지도록 도와주었다고 말했다. 그때 종성이는 못 내키는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었다. 

 기관실에 들어선 것처럼 가슴이 매캐하고 온몸이 쭈뼛 달아올랐다. 나는 부르르 떨었다. 손효성과의 추억이 세차게 밀려들었다. 호젓한 갈대밭에서 석양을 걸어 다짐하던 포부도, 망가질 때마다 서로가 있어 꺾이지 않던 스물도. 그는 어디서나 변함없이 나를 추어올리고 일으키며 내가 헤어졌을 때조차 대신 울어준 사람이었다. 투박한 만큼 솔직한 내 벗이 차마 나를 농락했다고는 믿을 수 없었다. 실수가 있던 게 아닐까,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숨을 크게 들이쉬며 바다로 시선을 냈지만, 잠기면 숨이 끊어질 그 거침없는 심연에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연인의 이름도 알려주지 않고 데이트 기록이나 전화를 숨기던, 때때로 내 음악을 무리하게 꼬집으며 그만 설아를 잊으라던 그였다. 좋은 일이 많았지만, 힘든 날도 꽤 있었다. 이젠 그가 내 글을 훔치고, 내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여자와 관계했다는 것까지도 의심해야 했다. 정황에 확신을 더하는 사사로운 기억들이 연달아 떠올랐다. 머릿속의 비구름이 뇌성벽력을 치듯 젊은 날의 꿈들이 산산조각나는 것만 같았다. 깊게 한숨을 쉬었다. 효성이는 「할미꽃」을 보았고, 내가 헤어진 후에 설아에게 보냈으며, 설아의 사연은 그를 향한 것이었다. 효성이도, 설아도, 하염없이 미워졌다. 운명처럼 찾아온 사람을 두고 설아를 돌이키며 망설이던 내가 너무도 한심스러웠다. 별빛 씨는 내 절망과 푸념을 모두 안아주었다. 그녀는 내가 짐짓 찬란했던 사랑의 끝을 맺는 중이라고 믿었다. 내 옆의 그녀를 돌아보았다. 정자 코앞의 하얀 석교 팔걸이를 가만가만 건드리던 그녀가 웃으며 물었다. 

- 갑자기 말이 없어서 걱정했어요. 생각난 거죠?

 나는 그 순간, 그녀를 끌어안고 한참을 울고 싶었다. 그녀에게 말했다. 

- 네, 별 것 아니었어요.

 그녀는 의아해 보였지만 내 표정을 살피고 더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나중에 알려주겠지, 그녀가 조그맣게 속삭였다. 나는 그 모습에 피식 웃고 말았다. 그녀도 날 보고 밝게 웃었다. 기분이 조금 가라앉는 듯했다. 이곳에서 힘들어해 봐야 무의미하다. 내 곁에 이 사람이 더 중요하다. 이 사람과 함께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암흑이 후퇴하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다리 아래에서 무겁게 뒤채는 파도 소리에 귀를 열었다. 차라리 뛰어내리고 싶던 바다는 다시 조금씩 울렁이며 지친 마음을 축였다. 일출을 목전에 둔 어스름이 별빛 씨라는 화폭을 둘러싸고 파스텔로 분(扮)했다. 우린 천천히 정자로 들어섰다. 짙푸른 바다 위로 수평선이 타올랐다. 정자에는 아무도 없었다. 항구는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 오직 둘뿐이었다. 우린 분침과 초침이 되어 파도에 마주서서 해가 달려오는 원형의 길을 읽었다. 

 일순간 하늘이 맑아졌다. 불똥이 튀듯 수평선에서 가냘픈 바람이 일었다. 물안개는 선홍빛 연이 되어 꼬리를 늘어뜨렸다. 바위틈에서 파도가 현악기 소리를 내며 깨어지고, 털을 다듬던 괭이갈매기가 힘차게 날아올랐다. 가슴이 떨렸다. 나는 별빛 씨를 바라보았다. 수평선에 시선을 묻던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맞췄다. 우린 벅찬 표정으로 서로를 응시했다. 그녀가 말했다. 

- 우린 해돋이에 지네요.

- 해는 늘 태어나죠. 반대편에서.

 내 몇 안 되는 독자들이여, 상상해보라. 저 바다 끝에서 해가 꿈틀거린다. 한여름의 진한 하늘에 햇빛이 착색 없이 새겨진다. 아름다운 별빛 씨가 내 눈앞에서 그믐달처럼 웃고 있다. 나는 바다로 고개를 돌려, 말없이 기다렸다. 마음의 슬픔이 잠잠해질 때까지, 떠나간 벗들과 머물지 못한 약속들이 서로를 용서할 때까지. 오래 가질 수 없던 뾰족한 평화와 일어나면 죽고 싶던 과거가 바위틈에서 울다 갔다. 나는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울컥울컥 돋아나는 눈물을 참았다.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 세상은 이토록 찬연하다. 내 흔적은 시가 되리라……. 촌각을 다투는 시간 동안 풀잎에 이슬이 고이고 바다가 산뜻하게 일렁였다. 별빛 씨의 머리칼이 연분홍 바람에 부드럽게 흔들렸다. 나는, 우리는, 그대로 말없이 해를 기다렸다. 이 순간을 오랫동안 그려온 사람들처럼. 무지개를 찾아 나섰다가 비를 맞으며 돌아오던, 그저 소풍이면 좋았던 어린 날의 소년소녀들처럼. 기다리는 동안 우리 가슴은 하늘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수평선 한가운데 해의 머리가 꿈틀거리며 드러나 빛을 뿌렸다. 청록빛으로 우아했던 처마가 온통 붉게 물들었다. 해는 우렁차게 기지개를 켰다. 만경창파를 건너온 한 무리의 철새들이 생기 넘치게 활공했다. 나는 수평선으로 손을 뻗어 타오르는 공기를 그러쥐었다. 별빛 씨도 덩달아 손을 들어 불꽃처럼 옹그렸다. 나는 환희에 차 그녀를 보았다. 그녀도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물었다. 

- 당신 이름, 뭐라고 저장했는지 알아요?

- 뭐라고 했는데요?

- 별빛 씨.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 오, 저도 별명으로 저장했는데.

- 뭔데요? 

- 수평선. 수평선이라고 했어요. 존칭은 안 붙였는데. 붙여야겠다.

- 좋네요. 상관없어요.

 해는 묵직한 속력을 과시하듯 위엄 있게 차올랐다. 물비늘이 반짝거렸다. 차가운 바닷가에 긴수염고래처럼 거대한 해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눈부신 순간을 융단 삼아 우린 하염없이 하늘을 바라봤다. 마음이 큼지막하게 부풀어 올랐다. 그녀의 팔과 내 팔이 부딪혔다. 손가락이 움찔거리며 스쳤다. 어깨와 어깨가 살포시 만났다가, 부끄럽게 밀려났다. 나는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그녀가 내 쪽으로 당겨왔다. 햇살처럼 발그무레한 볼로 그녀는 눈을 내리깔며 내게 기댔다. 나는 그녀의 머리에 살며시 귓가를 갖다 대었다. 그녀의 손이 내 옆구리에 닿았다. 수평선에서 불어오는 낯뜨거운 바람이 그녀의 머리칼처럼 산들거렸다. 별빛 씨의 체온은 따뜻했다. 그녀의 흰 치마가 발목을 스쳤다. 가슴께가 뻐근하게 맥이 뛰었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기다리던 사진작가처럼 우두커니 서서, 언젠가 설아에게 했던 것처럼, 난 별빛 씨와 보낸 일탈의 결정적인 순간을 목전에 두고 있다. 떠나간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다. 혹 다시 볼 수 없더라도, 내게 주어진 이 특별한 찰나를 결단코 놓치지 않겠다. 나는 힘주어 그녀를 보았다. 수평선의 다홍빛 끄트머리와 짙게 달아오른 파도의 숨결이 맑은 눈 속에서 출렁이고 있었다. 손끝으로 그녀를 끌어 서로를 마주보았다. 화로처럼 아늑한 햇빛이 그녀의 입가에 비췄다. 어디선가 마법처럼 거문고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것은 파도만으로도, 햇살만으로도 이룰 수 없는 음률이었다. 「If」도, 「동반자」도 아니었고, 브루흐도, 브람스도, 라흐마니노프도 아니었다. 그것은 나만의 것이었다. 나는 수평선이다. 그녀는 별빛이다. 운명처럼 만난 지금을 달리 설명할 방법은 없다. 

 그녀가 포근하게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나는 그녀에게 길게 입을 맞추었다. 우린 따스하게 달궈진 고목 의자에 엎어졌다. 나는 물었다. 

- 이름이 뭐죠?

- 박재이예요. 당신은요?

- 김진훈입니다.

 기둥 사이로 햇살이 쏟아져내렸다. 바다가 푸른 물결을 되찾을 때까지, 우린 정자를 늪 삼아 숨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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