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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언호 Oct 16. 2024

귀로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

시인과 촌장, 가시나무



 이튿날 내가 폭신한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 재인은 환한 발코니 앞에 의자를 놓고 커피를 끓이고 있었다. 우린 하루를 일찍 시작하는 캠핑장에 들어가 텐트를 빌리려다, 그 정신에 설치하느라 진 빼는 건 무리라고 판단했다. 대신 나는 서운해하는 그녀를 위해 고즈넉한 숙소를 찾아 들어갔다. 따뜻하고 보드라운 방에서 우린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기억도 없이 잠에 빠졌다. 사각거리는 이불 소리에 그녀가 나를 돌아보고 웃으며 말했다.

- 잘 잤어요?

 나는 눈을 비비며 멋쩍게 말했다.

- 네. 잘 잤죠?

- 네, 푹 잤어요. 커피 탈까요?

- 괜찮아요. 안 마셔서. 고마워요.

- 커피는 안 마시면서, 담배는 피우네?

- 지겹다, 이제.

 부스스한 내 꼴과 달리 그녀의 머리칼은 햇빛에 찰랑거렸다. 나는 물었다.

- 벌써 씻었어요?

- 네. 꽤 시끄러웠는데, 안 깼나 보네요?

- 아예 못 들었어요.

 그녀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떨구고 커피잔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기지개를 켰다. 그녀가 망설이듯 조심스레 물었다.

- 오늘은 일정 있어요?

- 서서히 돌아가야죠. 그쪽은?

- 저도 있긴 한데, 저녁까지만 가면 될 것 같아요. 사실 안 가도 될 것 같기도 하고.

- 어떤 건데요.

- 학과 사람들이랑 데생 연습해야 해요. 지루해요.

- 그래도 가야죠. 배울 점이 많을 것 같은데.

- 가면 벗어야 하는데?

- 네?

- 누드 데생. 처음 들어봐요?

- 그걸 학과 사람들끼리 한다고?

- 네, 돌아가면서.

- 아…….

 난 정말 무어라 답해야 할지를 몰랐다. 그녀가 킥 웃으며 말했다.

- 장난이에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 진짜?

- 네. 보통 정물화 데생 하죠.

  내 몇 안 되는 독자들이여, 내가 설마 그녀의 말을 믿었다고는 착각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재인은 교수를 따라 하듯 엄격한 표정으로 손을 치켜들고 말했다. 검지 위로 햇빛이 반짝였다.

- 원칙을 지켜서, 시간 안에, 담백하게. 아이, 지겨워.

- 가기 싫은가 보네요?

- 싫죠. 당신은 뭐 없어요 오늘?

- 할 일이 있었는데, 지금 가도 늦을 것 같기는 해요.

- 뭔데요?

- 학교 매체실에서 마이크랑 카메라를 챙겨야 하는데, 문을 일찍 닫아서.

- 오, 신기하다. 영상 촬영하나 보네요.

- 네. 군대에선 보안상 촬영 절차가 복잡하거든요. 밖에서 찍어 가는 게 편해요.

- 아, 군대에서 필요한 거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굴리고 웃었다. 아직 김이 나는 포트를 잡으려다 손을 데었다. 앗, 하며 물러서는 날 보더니 재인이 놀라 일어났다. 나는 괜찮다고 말하며 반대쪽 손으로 물을 따랐다. 커피를 들고 재인에게 다가가 함께 창밖을 바라보았다. 화창한 바다 저편으로 간밤에 횡단한 설악대교가 우뚝 서 있었다. 나는 그 붉은 다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 어제, 기억나요? 우리 저기서 여기까지 왔어요.

 그녀가 내 곁에 붙어서 웃으며 답했다.

- 네, 소원 들어줘서 고마웠어요.

- 버킷리스트? 근데 그거, 원래부터 생각해왔던 거예요? 즉석에서 만든 거 아니고?

 그녀는 장난기 어린 눈빛을 굴리며 말했다.

- 글쎄요?

- 즉석이네.

- 글쎄, 모르겠네.

- 햇반도 아니고.

- 진짜 안 웃겨요.

 재인은 눈을 흘기더니 발그레한 얼굴로 총총 돌아서 침대에 앉았다. 나는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얼마나 더 마음을 할애할 수 있을까. 난 안다. 아무리 사랑하려 해도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사랑한다는 건 헤어진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어제 같은 추억으로 아파해야 한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재인은 내게 해맑게 미소지었다.

- 씻어요. 꾀죄죄해요.

 난 못난 생각을 들킨 사람처럼 당황해서 어기적어기적 화장실로 들어갔다. 씻는 동안 바깥에서는 그녀가 서랍장을 열어 보고, 데스크에 전화하고, TV를 켰다 껐다 하는 소리가 들렸다. 시원하고 깨끗한 물로 몸을 적시니 잠시나마 피로가 가시는 듯했다. 나는 느긋하게 샤워를 즐겼다. 개운한 표정으로 나오는 나를 보며 지연이 핀잔을 주듯 말했다.

- 샤워하다 날 새겠다.

- 졸았어요. 누가 못 자게 해가지고.

- 뭐래. 재즈 좋아해요?

 재인은 폴 데스먼드의 「Feeling Blue」를 틀었다. 난 웃으며 엄지를 들어 보였다. 나는 물고기처럼 부드럽게 몸을 트는 그녀를 따라 음악에 몸을 맡겼다. 우린 뉴욕 어느 한적한 재즈바의 무용수가 되어 느릿한 춤을 췄다. 햇살이 재인의 어깨를 따라 흘러내렸다. 그녀의 손과 턱이 내 어깨에 닿을 때마다, 이것이 현실이라는 달콤씁쓸한 설렘이 다가왔다. 설아가 떠오르기도 했지만 그 순간을 가로막을 수준은 아니었다. 우리는 곧 헤어질 거다. 이 시간을 꼭꼭 씹어서 삼켜야 한다. 재인은 맑게 웃었다. 정제된 다이아몬드 같은 미소였다. 재인은 내가 언젠가 그려 본 우아한 미대생의 표본이었다. 한참을 춤추며 방안을 거닐다 숨소리가 가팔라지자 우린 나란히 침대 위에 널브러졌다. 달아오른 얼굴로 그녀가 내게 물었다.

- 나랑 하루만 더 여기 있을래요?

 나는 손바닥으로 그녀의 볼을 쓸어넘기며 말했다.

- 그건 어려워요.

- 휴가 며칠 남았을 거 아녜요. 또 언제 본대.

- 옷이 찝찝해요.

- 사면 돼죠.

 재인이 내 눈을 빤히 바라봤다. 나는 조용히 말했다.

- 어제는 정말 특별했어요. 오늘은 평범할 거예요.

- 오늘도 특별하면 되죠. 왜 그렇게 생각해요?

- 호사다마, 난 그게 무서워요.

 재인은 내 팔에 고개를 묻고 말없이 침대보만 툭툭 쳤다. 나는 천장을 응시하며 말했다.

- 생각이 너무 많네요, 내가.

 그녀는 내게 폭 안겼다. 나는 그녀를 토닥였다. 열어둔 창문에서 따뜻한 바람이 불어왔다.



되감을 수 없는 일들을

이적, 매듭


 

 짐을 챙겨 나왔을 때는 오후 한 시가 지나 있었다. 우린 속초항 주변에서 물회덮밥을 먹었다. 싱싱한 가자미회와 아삭한 채소를 초고추장에 쓱쓱 비벼 한입을 크게 넣었다. 새콤한 향이 입가에 찌르르하게 맴돌았다. 지연은 열심히 먹는 날 보며 질 수 없다며 큼지막하게 밥을 푸다 입술이 초고추장 범벅이 됐다. 나는 입안에 음식을 가득 넣고 무심히 그녀를 봤다가 그만 캑캑거렸다. 그녀는 으례 그 새초롬한 눈빛으로 나를 흘겼다.

 밥을 먹고 나른한 햇살을 받으며 우린 낙산사에 갔다. 하늘과 바다가 똑같이 파란 곳, 수평선이 나비의 몸통처럼 새파란 그곳에는 해수관음상이 커다랗게 놓여 있다. 나는 차를 빌려 그녀를 태우고 해안도로를 달렸다. 푸른 파도가 햇발을 받아 나릿하게 물결쳤다. 막 항해를 마친 배들이 닻을 놓고 있었다. 재인은 창문에 팔을 기댄 채 바람을 느꼈다. 불현듯 설아가 겹쳤다. 멍하니 고개를 돌리는데, 문득 재인이 말했다.

- 어제, 왜 말 걸었는지 알아요?

나는 속력을 늦추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엷은 미소를 띄고 있었다.

- 도서관에서 봤던 사람이라 그런 거 아녜요?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그랬으면 말 몇 마디 주고받고 갔죠.

- 그럼 왜?

- 나를 궁금해 하지 않아서. 이름도, 사는 곳도, 어떤 사람인지도. 과거만 물어봤잖아요.

- 보통 그렇게 물어보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나요?

- 이 사람은 과거에 살고 있구나...... 멋있네. 뭐 그랬어요.

- 재밌네요.

 재인이 기어에 올린 내 손을 살포시 쥐며 말했다.

- 우리, 낙산사는 다음에 갈까요?

- 왜요?

- 전설에, 낙산사 홍련암에서 유리창 너머로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대요. 다음에 여기서 또 만나면, 그때 가서 소원 빌어요.

 거짓말, 지난번에 빈 소원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모양이구나. 난 모르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음악을 틀었다. 처음 듣는 노래가 산들바람을 타고 울려퍼졌다.



우리 세상은 너무 넓어서

내 작은 소리는 네게 닿을 수 없네

오윤아, 마음을 다해 부르면



 재인이 나긋하게 말했다.

- 제가 좋아하는 노래예요. 참 맑죠?”

- 네, 좋네요.

- 있잖아요.

 그녀는 흩날리는 머리칼을 목덜미로 넘기며 물었다.

- 나를 위한 음악을 남겨 줄래요?

 우리는 모감주나무의 황금빛 꽃이 나뒹구는 그늘로 들어서고 있었다. 처서(處暑)가 지나 잎새에 푸르스름한 감빛이 돌고, 열매가 아롱다롱 익어가고 있었다. 나뭇가지 사이로 햇살이 비스듬히 흘러들어 재인을 적셨다. 그녀는 편안하게 말을 이어갔다.

- 세상 다른 어떤 음악도 신경 쓰지 말고, 당신만의 음악으로. 그게 뭐든 난 계속 들을게요.

- 그래요.

 닮고 싶은 누군가가 있었다. 사춘기 시절을 무기력하게 보내지 않을 수 있었던, 나로 하여금 작곡을 시작하게 한 사람. 나는 그처럼 투철하면서도 역동적인 곡을 만들고 싶었고, 한참 모자란 실력에 좌절했고, 그가 돌연 은퇴해버릴까 봐 겁이 나기도 했었다. 내가 언젠가 그의 앨범 작업을 함께했던 분들에게 발탁되었을 때, 그들은 내게 말했다. 나만의 색을 지키라고. 나는 그 말을 미제사건처럼 지니고 있었다. 똑같이 예술을 하는 사람으로, 재인은 내 마음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말이 잔잔하고 따듯하게 밀려들었다. 그녀는 말했다.

- 그 노래를 캔버스에 옮겨줄게요.

 우린 서로를 마주보며 밝게 웃었다. 왔던 길을 되짚는 대신, 재인과 함께하게 된다면 어떤 새로운 길이 펼쳐질까 궁금해졌다. 재인이 졸라서 난 그녀를 시내에 데려갔다. 그녀는 창가에 부딪히는 햇살을 가만가만 짚으며 예쁘게 눈을 찡그리고, 도시의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수다를 떨었다. 신호등 너머로 보이는 육교 양쪽으로 문패가 닳은 상점가들이 늘어서 있었다. 장바구니를 든 주민들이 바쁜 걸음을 옮기고, 할머니 몇 분이 계단참에서 나물을 팔고 있었다. 이곳이 여행지이기 전에 누군가의 고향이라는 것이 느껴지도록, 푸근하고 정겨운 기운이 도심 가득히 여울져 있었다. 일전에 여수에 갔을 때가 떠올랐다. 갯내가 번지는 시장통 곳곳에는 살아가야 할 이유가 산적해 있었다. 이곳도 마찬가지다. 산다는 건 그리 거창하지 않을지 모른다. 삶은 삶이고 나는 나이기에 붙어서 나의 삶이 되는 것이다. 각자가 살기로 한 방식을 존중하고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 덜 따뜻해지고, 더 말라붙으며 어른이 되는 게 아니라 더 뜨겁고, 덜 미워하며 어른이 되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핸들에 팔을 얹고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불행한 표정은 아니었다. 재인이 날 보며 맑게 미소지었다.

 우린 중앙시장 갓길에 차를 대고 먹거리를 샀다. 난 전날 생각했던 대로 닭강정, 호떡, 그리고 아바이 순대를 샀다. 호떡을 사는 나에게 지연은 가다가 다 식으면 무슨 소용이냐고 핀잔을 놓았다. 나는 웃으며, 식은 호떡이 맛있어야 진짜 호떡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시장가를 거닐며 젓갈을 집어 먹어 보고, 순댓집 앞을 서성이고, 닭강정을 세 박스 주문하더니, 마침내는 여기 호떡이 많이 맛있느냐고 내게 물었다. 그녀의 쑥스러운 물음에 나는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녀가 긁적이며 말했다.

- 아니, 몸만 달랑 가면 부모님도 싫어하실 것 같고 해서, 닭강정은 친구들도 좀 주고…….

- 그렇게 씀씀이가 넓어서 이 험한 세상 살겠어요?

- 참 내, 사람이 늘 계획한 대로만 사나. 그랬음 여기서 안 만났죠 이렇게.

- 따라와요. 기왕 살 거면 안 식는 걸 사야지.

- 아니, 뭐라 했다고 또. 하여간 뒤끝은.

 난 좀 전에 서성이던 순댓집 앞으로 지연을 데려가 말했다.

- 이거 사 가요. 시그니처니까.

- 냄새가 예사롭지 않은데, 괜찮을까요?

- 한 번 먹으면 계속 먹어요.

- 그런가…….

 망설일 땐 언제고, 재인은 이내 순대를 종류별로 하나씩 사 들고 나왔다. 난 대놓고 웃어버렸다. 그녀가 멋쩍게 말했다.

- 뭐요. 맛없으면 청구할 거예요.

- 웃기네. 두고두고 드세요.

- 나는 그녀의 짐을 반쯤 뺏어서 들고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지연은 종종걸음으로 곁을 따르며 흔들리면 음식 모양이 망가지지 않냐고 물었다. 나는 팔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시늉을 하며 그녀를 놀렸다. 우리는 천천히 차를 반납하고 터미널로 갔다. 시계는 어느새 오후 4시에 가까워 있었다. 곧 출발하는 버스를 예약하고 나란히 앉아 기다렸다. 재인이 이어폰을 꽂고 한쪽을 건넸다. 요시마타 료의 「Have a ball」를 들었다. 그녀는 이 곡이 담긴 「냉정과 열정 사이」의 사운드트랙을 전부 좋아한다고 했다. 이내 주제곡 「冷靜と情熱のあいだ」의 첼로가 적요롭게 흘러나왔다. 설아가 떠올랐다. 설아와 함께 서강대교에 간 2018년 10월 31일이 떠올랐다. 텅 빈 대합실에 뉴스 소리만 가득했지만 내겐 음악만이 들렸다. 우연과 운명, 난 그중 어디에 기대야 할까? 그 사이 어딘가에 답이 있는 걸까? 난 지연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다.

- 나도 부탁하고 싶은 그림이 있어요.

 의자에 기대 늘어져 있던 재인이 실눈을 뜨고 날 올려다봤다.

- 어떤 그림이요?

- 헤어지지 않는 빗방울이 드는 창가를 그려주세요.

- 뭔 소리람. 암호예요?

- 그럴지도, 아닐지도.

 난 살며시 웃었다.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다시 음악에 빠져들었다. 이내 버스가 왔다. 지연은 졸린 눈으로 내게 기댔다. 난 그녀의 머리맡에 고개를 내려놓았다. 버스는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처럼 꾸밈없이 해안을 스쳐 보냈다. 고속도로 어디쯤에서 나는 잠들었고, 눈을 떴을 때는 햇발이 찬란한 바다 대신 먹구름투성이 한강이 무겁게 드리워 있었다.



지금도 등뒤를 돌아보면

토이, 오늘 서울은 하루종일 맑음(Vocal by 윤하)



 재인의 집은 강변역 부근이라 했다. 나는 반대쪽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타야 했다. 노을이 꺼진 창밖으로 는개가 흩어졌다. 그녀는 양손 가득 짐을 들고 짐짓 씩씩하게 말했다.

- 전 금방 가요. 얼른 가요.

- 무겁지 않아요? 택시 잡아줄까요?

- 좀만 가면 바로 집이에요. 괜찮아요.

- 그럼 데려다줄게요.

- 괜찮아요. 가는 거 보고 갈래요.

 말하며 그녀는 내 등을 떠밀었다. 나는 반쯤 내몰리듯 밖으로 나와 기가 막히게 초록불인 횡단보도를 건넜다. 퇴근 시간이 지나 정류장은 한산했다. 먹물 같은 도로 위로 바퀴 자국이 옅게 퍼졌다. 비는 가는 비가 아니라 오는 비였다. 재인이 내 옆에 꼭 붙어 걷는 바람에 바지춤에 닭강정 박스가 자꾸만 걸렸다. 그녀는 그때마다 미안한 표정을 지었지만, 곁에서 떨어지지는 않았다. 나는 안내판을 확인하고 그녀에게 말했다.

- 10분이면 와요. 얼른 가, 비 세지겠다.

- 택시 타죠, 뭐. 괜찮아요. 보고 갈게요.

 지연과 나는 맞은편 가로등과 분주하게 달리는 차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녀가 시선을 돌리고 조심스레 물었다.

- 왜 내가 '별빛 씨'였어요?

 나는 가림막에 맺히는 비를 올려다보며 답했다.

- 별빛 같았으니까.

 그녀가 발그레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나는 넌지시 그녀를 보며 물었다.

- 나는 왜 수평선이었나요?

- 해가 뜨잖아요. 같이 있으면 내 맘에도 해 뜰 것 같은, 그런.

 미소가 어렸다. 나를 좋게 봐줄 줄은 짐작조차 못했던 것이다. 우린 아직도, 해돋이를 기다리던 둘만의 시간에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일을 겪고 나니 눈앞의 도시가 너무 초라해 보였다. 그녀는 박스를 내려놓고 내게 손을 포개며 물었다.

- 다음에 만나면, 재회인가요?

 나는 잡은 손에 가만히 힘을 주며 답했다.

- 당신이 어떤 마음이건 내겐 기회겠죠.

 그녀는 나긋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는 조금씩, 천천히 내렸다. 등불마다 담황빛 바람이 빗방울을 태우고 지나쳤다. 나는 그대로 손을 잡고 서서, 마구 떠오르는 말들을 삼켰다. 그녀가 따스하게 웃으며 물었다.

- 눈 좋아해요? 첫눈. 아니다. 끝눈. 첫눈은 너무 클리셰야. 끝눈 오면 만날래요?

- 끝눈이 뭐죠?

- 그해 겨울의 마지막 눈이요.

 난 그녀와 테라스에서 처음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처럼, 그러나 그때와는 다른 질감의 그 습기 어린 눈꺼풀에 눈을 맞추며 나지막한 미소로 답했다.

- 그럽시다. 고마워요.

 저만치 버스가 보였다. 비에 흐릿해진 버스는 이곳으로 오는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또렷하게 말했다.

- 멋진 사람 만나서 좋았어요. 잘 가요.

 나는 순간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재인을 꼭 끌어안았다. 버스가 코앞에 올 때까지, 차창에 부딪친 유리 같은 빗방울이 이마를 벨 때까지 놓지 않았다. 그녀의 선홍빛 입술에 입을 맞추고, 힘차게 답했다.

- 잘 가요.

 나를 태운 버스가 교차로 건너편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녀는 정류장에 서서 번호판을 바라보았다. 우린 알고 있었다. 앞으로 가급적 연락하지 않을 것이고, 때론 지루하지만 살아갈 가치와 이유가 있는 각자의 삶 속을 파고들 것을. 내가 준비되지 않는 한 그녀를 온전히 사랑할 수는 없을 것이며, 그녀는 분명 비슷한 아픔이 있으면서도 내게 다가왔으니 절대 먼저 연락하지 않을 것임을. 그래, 재인은 자기 마음보다 나를 먼저 고려해줬다. 내가 뭐라고 그런 호사를 누리고도 재인을 내쳤는지, 자책할 힘도 없었다. 왜 이런지는 그만 묻고 싶었다. 누구 때문에 이런지, 고작 첫사랑이라는 여자 때문에 이런 건지 물어보는 짓은 그만두고 싶었다. 난 그저 슬펐다. 기적 같은 하루 속 박재인이라는 여자는 특별했고,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다 내가 놓친 것이다.  

 창틀에 가랑비가 울컥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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