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시작해도 될까요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고요히 사과를 베어무는 것이다. 아무일도 없는 것처럼 행동하기 위해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입에 무언가를 넣어주는 것이지. 사무실의 날카로운 모서리들이 쉽게 동정하지 않도록 조용히 안개를 뿌려두는 것도 중요하다. 나는 평소와 다르지 않으므로. 겉옷을 벗어 의자 위에 포개어둔다. 빈 화면에 어지러운 숫자들을 정리하는 것으로 일과는 시작된다. 새해가 시작되고 권고사직을 통보받았다. 나는 이제 유통기한 한달짜리 노동자다.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쓸데없다 생각했다. 저 멀리 보이는 오아시스가 신기루라는 것보다 고여서 썪은 물이라는 것이 더 충격적인 것처럼 홀로 외면했던 사실이 사실로 다가온 것은 무척 당혹스러운 일이다.
평소와 다름없이 일을 하다가도 축축해진 온 몸에서 우울감이 울컥울컥 삐져나왔다. 겉잡을 수 없는 감정은 아니었다. 칼 끝에 찔린 오후의 손가락처럼 파고드는 것은 금방이었다. 퇴근하면 진한 초코케이크와 달콤한 와인을 사야겠다.
술은 아래로 떨어지고 취기는 빙글빙글 바람개비가 되고 모국어를 잃은 우주인의 눈물방울이 방울방울 움추렸다 펑펑 터진다. 그것은 불꽃놀이처럼 화려했고 마지막 비행처럼 아쉽기도했다. 아직도 믿기지 않은 현실이다. 이 밤이 지나면......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책상도 빠르게 정리했다. 애초에 짐이 많지도 않았다. 퇴직금은 2주 안에 들어올 것이고 실업급여는 신청하면 다음달에나 받을 수 있겠다. 정신나간 머리를 붙잡아준 것은 카드값이었다. 내 뺨을 때리며 현실을 바로 볼 수 있게 도와주었다. 슬프게도 1인 가정은 기울면 무너진다.
그러나 공허한 마음은 무엇으로 채워야할까. 늦잠을 자고 낮잠을 자고 새벽에 잠이 들었다. 한심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들이 늘어갔다. 유투브를 종일 보거나 봤던 영화를 또 봤다. 소란스러움이 그리워질 때면 시끄러운 예능을 틀어두기도 하였다. 실루엣만 보이는 하루하루는 금새 사라지고 만다.
문득 아이스아메리카노가 먹고 싶어 잠옷차림으로 나갔다. 공기의 온도가 바뀌어있었다. 메마른 가지에 새순이 돋아나고 꽃봉오리가 피었다. 몽글몽글한 꿈 속을 걷는 것처럼 기분은 좋았지만 멈춰 있는 시간 속에 사는 사람이었던 나는 이상한 괴리감에 빠졌다. 그리고 더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집으로 되돌아갈 이유로 충분하기도 했다.
침대에 걸터 앉았다. 낡은 잠옷을 내려다보았다. 알고 있었다. 나는 낡은 잠옷과 같았다. 흔하디 흔한 경리 1명을 대체하기에는 파릇한 신입도 줄을 섰고 나보다 자격증도 많고 경력도 탄탄한 사람도 많다는 것을. 다른 직종으로 가기에는 나이 많은 신입이고 같은 직종으로 가기에는 자격증이 부족했다. 알고 있었다. 게다가 이런 핑계로 구직활동 조차 하지 않았다. 거절 당하는 것이 무서웠다. 나를 포장할 힘도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른 사람도 할 수 있었기에 특별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못난이다.
나의 못남을 마주보니 후련했다. 그렇다. 나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이다. 자존감도 낮고 자신감도 없는 그런 인간이다. 권고사직을 통보받고 더 이상 구직활동도 못하는 겁쟁이이다. 낡은 잠옷은 버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애정이 있다면 버릴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나도 그렇다. 스스로 버릴 수 없는 까닭은 그럼에도 여태까지 치열하게 살았던 것을 잘 알고 있지 않는가.
메마른 가지에도 초록이 일어난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 때론 당연한 것들도 낯설어질 수가 있다. 사실은 하고 싶은 일이 많았다. 대부분 스쳐지나가듯 해보고 싶은 일이지만 시간이 많은 지금이 기회이다. 도서관에서 소설책을 빌려 읽고, 수채화와 피아노를 배워보자. 영화관에 가서 제일 마지막 타임의 영화를 보고, 매일을 블로그에 기록하여 나만의 일기장을 만들자. 마지막으로 나의 꿈으로 만든 이야기책을 만들자. 그 전에 제일 먼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러 나가야겠다.
내일을 계획하는 것만으로도 텅 빈 마음에 조각이 하나 앉았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것은 판도라의 상자 맨 밑에 남은 희망과도 같았다. 더 늦기전에 서른의 축배를 들어. 이제 시작이니까. 비록 설레발일지라도 오늘은 취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