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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훈이 Jun 30. 2022

내가 와인 아카데미를 등록하게 된 계기

스물네 번째, 자양동 고래바

스물네 번째, 자양동 고래바


처음 월급을 받기 시작했던 시기, 모처럼 서울을 방문한 엄마께 식사 대접을 하기 위해 레스토랑을 예약했다. 전통 시장 골목에 간판도 없이 꼭꼭 숨어있지만 알음알음 찾아오는 사람들로 늘 붐볐던 <자양동 롱테이블>. 10명 정도 앉을 수 있을 것 같은 테이블 하나를 둔 곳이었는데, 원테이블 레스토랑은 처음이라 자리를 잡았을 땐 어쩐지 어깨를 펼 수 없었다. 하지만 와인 한 잔이 긴장을 풀어준 걸까. 아니면 다닥다닥 붙어 앉아 있음에도 서로를 의식하지 않는 그곳만의 공기 때문일까. 엄마와 나는 금세 그 안에 녹아들었고 우리만의 대화를 즐겼다. 그 후 특별한 날이면 롱테이블을 즐겨 찾았는데, 그때만 해도 몰랐다. 주방에서 우직하게 팬을 쥐시던 사장님의 내면에 재밌는 꿈이 있을 줄은, 그리고 그걸 실천하는 행동력을 갖춘 분이셨을 줄은.



어느 날, 내가 사랑했던 원테이블 레스토랑은 문을 닫았다. 대신 사장님께서 멀지 않은 곳에 "고래바"라는 와인바를 오픈하셨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추억의 공간과 비슷한 분위기일까, 엄마가 좋아했던 스테이크와 내가 바닥까지 싹싹 긁어먹었던 성게알 파스타를 또 먹을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며 부리나케 달려갔는데, 그곳엔 내 예상을 뒤엎는 와인바가 기다리고 있었다. 



묵직한 클래식 대신 어깨가 들썩이는 가벼운 음악이 공간을 채운다. 단정하게 차려입은 소믈리에 대신 오버롤에 캡모자를 쓴 직원분이 주문을 받는다. 나이프와 포크가 아닌 나무젓가락과 일회용 접시가 세팅되고, 반듯한 메뉴판 대신 구겨진 주황색 종이 한 장이 나온다. (지금은 카카오톡 친구를 추가해 메뉴를 확인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스테이크 대신 떡볶이가, 당연히 맥주 안주라 생각했던 반건조 갑오징어 구이가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는 곳. 양식, 일식에 분식까지 섞여 있다. 



일반적인 와인바나 레스토랑이라면 상상하지 못할 조합인데 어쩐지 싫지 않다. 이대로 되나 싶으면서도 흥미로웠다. 그동안 내게 와인이란 '격식을 갖춰 마시는 술', '특별한 날 먹는 비싼 술'이라는 이미지가 강해 쉽사리 도전하지 못했는데, 그 장벽이 단숨에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어색하지 않은 척할 필요 없다는 데에서 오는 편안함이 있었고 마음껏 모른 척해도 된다는 사실이 신이 났다.


컨벤셔널부터 내추럴까지, 없는 거 빼고 다 있는 고래바


끌리는 안주를 정한 후, 웰컴 드링크로 목을 축이며 주인공을 고른다. 셀러 몇 대는 우스울, 수 십 병 혹은 수 백 병의 와인들 사이에서 오늘 나의 파트너를 찾는 거다. 예산에 맞춰 선택하거나 눈길을 사로잡는 레이블을 보고 고를 수도 있고, 지난주에 가장 잘 팔린 BEST 와인을 참고하는 법, 안전하게 직원분의 추천을 받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고래바를 여러 차례 방문해 본 결과, 개인적으로는 추천하는 방법은 남의 후기에 의존하지 않고 그날 기분에 따라 손이 이끄는 대로 와인을 마셔보는 것이다. 내가 와인을 고르는 게 아니라 와인이 나를 선택하는 듯한 느낌. 어디서도 쉽게 경험할 수 없는 고래바만의 매력이다. (물론 실패할 가능성도 있으나, 원래 실패를 통해 내 취향을 배우는 거랬다)



이쯤 되면 '그래도 와인바인데 비용이..'라고 걱정하는 분들이 계실 것 같다.

고래바를 언급할 때 빠지지 않는 단어 중 하나가 가격인데, 이곳에서 판매하는 보틀 가격은 십원 단위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1000원보다 매력적인 990원~'과 같은 마케팅 수단이 아니라 수입사에서 가져온 원가에 마진을 많이 붙이지 않아 그런 듯했다. 타 업장에 비해 너무 저렴하게 판매하는 바람에 오픈 초기에는 일부 수입사와 마찰도 있었다고 하니, 그야말로 사장님의 신념과 고집이 만들어 낸 특별한 가격이라 볼 수 있다. 

 

 물론 와인 가격이 저렴한 대신, 다른 비용으로 균형을 맞춘다. 고래바는 이용 시간에 따라 금액이 부과되고 (최초 1시간 5,500원, 이후 10분에 1,100원) 젓가락이나 와인잔 등을 교체할 시 일정 비용이 추가된다. 무심코 앉아 있다 와인 한 병 값이 추가되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윤을 남겨야 하는 '업장'임을 감안한다면 이 정도의 타협은 필요하다고 본다. 


나 참치김밥 좋아했네...


분명 호불호 갈리는 시스템이지만 나는 고래바의 운영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다양한 가격대의 와인을 직접 선택하고 경험하며 비싼 게 좋은 것만은 아님을 배웠고, 잔의 크기나 생김새에 연연하지 않은 덕에 소품에 대한 부담이 사라졌다. 떡볶이, 생양배추에 와인을 곁들이며 '고기엔 레드와인, 해산물엔 화이트지'라는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졌고, 어디선가 주워들은 타인의 평가를 나의 것인 양 떠드는 대신, 서툴더라도 내가 느낀 것을 표현하고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즐거움을 알았다.




여전히 나에게 와인은 쉽지 않다. 같은 와인인데 어제와 오늘이 다르게 느껴질 때도 허다하고 레이블에 담긴 정보나 유행의 흐름을 읽지도 못한다. 하지만 비슷한 색상의 액체들이 혀 끝에서, 코 안에서 서로 다른 개성을 뽐내는 게 신기하고, 이러한 차이를 음미하는 시간이 즐겁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선물할 수 있는 좋아하는 와인이 생겨 뿌듯하고 스스로를 '와인을 즐기는 사람'이라 말하는 달라진 내 모습이 좋다. 그리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고래바였다. 





라벨을 마시지 말고 와인을 마시자는 곳.


마케팅에 휩쓸려 맛있음을 주입받기보단, 자신의 입맛에 맞는 와인을 찾으라는 고래바.

마냥 친절하고 세련된 와인바를 찾는 이들에겐 맞지 않을  있다. 잔잔한 분위기와 다정한 서비스를 원하는 분들께도 추천하지 않는다. 하지만 ①와인에 대한 마음의 장벽을 허물고 ②실패에 대한 두려움 없이 마음껏 와인을 선택해보고 싶다면, ③와인에 어울리는 음식은 정해져 있을  같아 쉽사리 손이 가지 않았던 분들이라면 고래바를 통해 "와인은 결국  입에 맞는  최고"라는  느껴 보셨으면 좋겠다. 혹시 아는가. 갑작스럽게 찾아온 와인의 세계에 더 깊게 발 담그고 싶어 와인 아카데미에 등록한 나처럼, 새로운 세상에 푹 빠지는 경험을 하게 될지. 





주소 : 서울 광진구 뚝섬로57길 58 2층

전화번호 : 070-4300-4312

영업시간 : 평일 오후 5시 ~ 밤 11시

                주말 오후 3시 ~ 밤 11시 (일요일 9시)

휴무 : 매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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