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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훈이 Aug 01. 2017

열일곱번째, 천호 블랑제리 11-17

우직하게 그리고 꾸준하게

빵집 : 블랑제리 11-17

위치 : 서울시 강동구 올림픽로 624

메뉴 : 씹을수록 고소한 천호빵, 쫀득쫀득 쉴 새 없이 들어가는 치즈 바게트, 부드러운 시트와 크림이 가득한 생크림 케이크, 선물용으로도 좋은 파운드케이크 등







어느 쌀랑한 겨울. 서울의 동쪽을 들썩이게 만든 작은 빵집 하나가 있었다. 번지를 상호명으로 사용하는 건 지금이야 그리 낯설지 않지만, 그땐 꽤나 특이한 방식이었기에 외우기도 쉽지 않았다. 성내동 11-17번지에 위치했었던, 블랑제리 11-17.

몇 년 전 대로변으로 이전하면서 이제는 이름과 주소가 일치하지 않게 되었지만, 이름에 담긴 내공과 인기는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다.









당시 인근에 사는 빵 친구의 소개로 알게 된 11-17은 매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미어터질 듯한 부재료와 뭘 집어도 실패 확률이 현저히 낮은 빵 맛. 충분히 착한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오전 11시~오후 1시 사이에 진행되는 가격 할인까지. 뭐 이런 곳이 다 있나 싶었다. 더 놀라웠던 건 당시 20대셨던 젊은 쉐프님. 얼마의 경력이 있어야 20대에 이런 공간을 이끌 수 있을까, 빵 천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들이 오만 사천 이백 개쯤은 스쳐 지나간 것 같다.





강원도에서 오셨다는 쉐프님은 우리나라 대표 명장님 한 분께 일을 배웠다고 하셨다. 어쩐지 어디서 많이 본 빵들이다 싶었다. (예를 들면 에멘탈 치즈빵, 크랜베리 호두 식빵 등) 명장님의 빵집은 당시 백화점에도 입점해 있던 브랜드라 자주 사 먹었었는데,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유사한 경험을 할 수 있다니. 주머니 가벼운 학생에게 그보다 더 큰 기쁨은 없었다.











블랑제리 11-17이 생긴 이후 나는 천호역을 자주 찾았다. 꽤 가깝지만 갈 일이 없던 동네에 새로운 사랑방이 나타난 셈이었다. 공강이 긴 날 슬쩍 방문하기도 하고, 점심을 사야 한다며 도서관에 자리만 맡아놓고 다녀온 적도 있었다. 좋은 곳은 모두가 알아보는 법이라, 11-17은 순식간에 유명해졌다. 주말이면 좁은 매장은 발 디딜 틈 없이 북적거렸고, 조금 늦게 가면 원하는 빵은 품절이었다. 당시엔 오월의 종을 제외하고는 그렇게 인기 있는 빵집이 많지 않았던 터라 11-17의 인기는 내게 참 흥미로우면서도 두려운 것이었다. 물론 그 두려움은 어디까지나 '내가 자주 못 가게 될까 봐'라는 것이었다.







합리적인 가격에 빵까지 맛있으니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말랑말랑한 빵 안에 롤치즈를 듬뿍 넣은 치즈 바게트는 한결같은 나의 최애템이었고, 건과일이 듬뿍 들어 상큼한 레생크디아망은이름이 어려워 유독 인상 깊었다. 고소한 하드 빵에 크림치즈가 뭉탱이로 들어간 크림치즈 세이글은 따로 스프레드를 바르지 않아도 되어 간편했으며, 뽀얗고 쫀득한 빵에 슈크림, 초코크림, 크림치즈가 든 화이트 번 시리즈는 골라 먹는 재미가 있었다. 커다란 식빵과 기다란 올리브 포카치아는 식사 대용으로 훌륭해 동네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고 이후 샌드위치, 머핀, 슈, 타르트 등이 등장하며 11-17를 갈 때마다 나의 고민은 깊어졌다. 쏟아지는 신제품 이외에도 블랑제리 11-17 덕분에 크리스마스 빵 파네토네에 눈을 떴고, 난생처음 까눌레를 맛보았으니 그야말로 나에게 신세계를 열어준 빵집이었다.







빵뿐 만이 아니다. 케이크도 주문받는다는 소식에 친구의 생일날, 아메리칸 치즈 케이크 한 판을 주문해 보았다. 사이즈가 큰 케이크일수록 신중에 또 신중을 기하는 평소 성격과 달리 즉흥적인 선택이었는데 결과는 완전 성공적. 저 멀리 가천대까지 날아가는 일정이었음에도 나의 발걸음은 한없이 가벼웠고, 묵직하고 진한 케이크 맛에 나와 친구들은 참 행복했었다.



이전 후 블랑제리 11-17








좁은 빵집을 가득 채운 인파와 텅 빈 트레이에 익숙해지던 즈음, 블랑제리 11-17는 보금자리를 옮겼다. 성내동 11-17번지가 아닌, 천호역과 가까운 대로변으로. 성내동 빵집 11-17의 시즌 2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새로운 매장은 기존과 사뭇 달랐다. 그리 넓은 외관은 아니었으나 빨간 차양이 멀리서도 눈에 띄었고, 금색으로 쓰인 글자가 멋스러웠다. 기다란 매장은 복층으로 이루어져 예전과 달리 먹고 갈 수 있는 테이블도 생겼으며, 쉐프님의 감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세련된 듯, 투박한 인테리어가 정겨웠다.





빵을 위한 공간에도 변화가 생겼다. 모든 공간이 열려 있던 이전과 달리 빵들은 정갈한 나무 진열장 안에 놓여 있었고, 쇼케이스를 가득 채운 색색깔의 케이크와 조각 케이크, 마카롱을 보며 쉐프님의 또 다른 면모를 느낄 수 있었다. 빵의 종류 역시 한층 다양해졌는데, 검은깨와 조 등 각종 곡물이 든 ‘천호빵’은 씹을수록 고소해 순식간에 나의 애정템 2호가 되었다. 그 이외에도 파운드케이크, 쉬폰 케이크, 프레즐, 크로와상 등 갈 때마다 신메뉴가 쏟아져 따라가기 힘들 지경이다.






블랑제리 11-17의 발전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르봉 마리아쥬라는 디저트 카페를 오픈해 맛집 프로그램에 등장하기도 했고, 다른 곳과의 콜라보레이션을 통해 성수동 카페 훔볼트에서도 맹활약 중이다.








성내동에서 시작해 서울 각지로 조금씩 퍼져 나가는 블랑제리 11-17. 수많은 빵집들이 생겨나는 와중에도 묵묵히, 하지만 꾸준히 입지를 넓혀가는 천호동 동네 빵집을 보며 처음 인사를 나누었을 때 느꼈던 윤문주 쉐프님의 우직한 빵사랑과 신념이 떠오른다. 다음은 어떤 지역 일지, 다음은 어떤 메뉴 일지, 내일이 기대되는 곳. 블랑제리 11-17.








하나) 말랑말랑한 담백한 빵 속에 롤치즈가 가득 든 치즈 바게트는 가격도 착하고 정말 맛있어요. 치즈 좋아하시는 분들은 꼭 드셔 보세요! (데우면 더 맛있습니다)


둘) 오전 11시 ~ 오후 1시에 가면 20% 할인받을 수 있어요. 시간 되시는 분들은 놓치지 마세요.


셋) 크리스마스가 되면 파네토네와 슈톨렌이 나와요. 슈톨렌은 취향 차이가 있겠지만, 파네토네는 가격도 맛도 크기도 적당한 편이니 올 겨울에 도전해 보세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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