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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훈이 Jul 06. 2018

나이 먹은 신입사원 일기 - 퇴사 선언

신입사원 일기의 끝이 보이던 날


사실은 -

오래전부터 마음이 정해져 있었다.


잔재주로 벌어먹어 본 경험 때문인지 돈은 나에게 그리 큰 요소가 아니었다.

그래서 윗사람들이 말하는 '받는 만큼 일해라', '월급 받으려면 그 정도는 해야지' 등의 말은

동기 부여가 아닌 강요일 뿐이었다.



주변의 뽐뿌도 있었다.

오래간만에 연락이 된 친구들과는 매일같이 내 것, 개성, 행동력에 대해 이야기했고

뭔가를 저질러 보고 싶다는 사람들의 꿈은 늘 나를 설레게 했다.

잘 안됐을 때 그들을 원망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쨌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론을 내렸다.



가고 싶은 분야는 분명하다.

생각해보면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던 것이었다.

합리화일 수도 있고, 쉽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으니 힘들 때 도망칠 곳이 없어

커피를 배웠다던 꽃집 사장님의 말처럼,

하다 하다 지쳐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올 때쯤엔

새로운 '좋은 것', '재밌는 것'이 나타나지 않을까.







마음의 결정을 내린 나는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는 사수에게 메신저를 보냈다.

'오늘 안 바쁘시면 맥주 마셔요!'라는 말에 그가 답했다.

'안됨. 안됨. 나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됐어요.'


1년 동안 회사를 다니면서 딱 두 번 울었던 것 같은데,

저 말을 보자마자 회의실로 달려가 남몰래 눈물을 닦았다.




이 회사에서 누군가 나를 붙잡는다면, 그래서 내가 흔들린다면,

그 사람은 나의 사수일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지사장님, 나의 대리님, 친한 과장님, 좋아하는 후배가 붙잡아도 허허 웃어 보일 수 있겠지만,

사수가 붙잡는 다면 눈물이 먼저 날 것을 조금 오래전부터 예상하고 있었다.




자리로 돌아온 나는 애써 아닌 척,

맥주 마시는데 무슨 마음의 준비까지 필요하냐는 말로 약속 시간을 받아냈다.

그리곤 초조한 마음을 감추기 위해서

나의 결정을 알고 있는 후배에게 괜스레 말을 걸고 장난을 치며 시간을 보냈다.


평소답지 않은, 참 부산스러운 오후였다.






업무를 마치고 전부터 궁금했던 이자카야에 도착한 우리는 안주가 나오기도 전에 맥주잔을 비워댔다.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늘 그랬듯이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 언제였는지,

또 언제 모일 것인지 그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다.




두 번째 맥주잔이 등장하고 조심스레 운을 띄웠다.

'제가 없어도 잘 지내세요.'



사수님은 예상했던 것보다 놀라지 않았다.

2주 전 퇴사한 동기를 보고 분명 동요할 것 같았다며, 어느 정도 예상했다고 말했다.

그가 몰랐던 사실이 하나 있다면 - 퇴사는 내가 먼저 꺼낸 얘기였다.

나는 2월을, 동기는 3월을 마지막으로 보고 있다가,

건강상의 이유로 그 친구가 먼저 떠나게 된 것이었을 뿐이지

나의 마음은 오래전부터 결정된 것이었다.



그는 한참 동안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회사에 몰입하는 대리님, 다른 팀원들, 사수님과 달리,

나는 회사 밖이 너무너무 재밌는 사람이어서 하고 싶은 게 참 많다고.

20대의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해 지구 반대편에서 몇 달을 살아볼 수는 없어도

내가 좋아하는 무언가를 위해 투자하며 나를 위한 시간을 늘려보는 기회를 갖고 싶다고.

회사에 몸 담은 1년 동안 일도 많이 배웠지만, 나의 성향과 나의 취향을 더 잘 알 수 있었던 기회였다고.

그렇기에 힘들었지만 꽤 괜찮은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좋아하는' 것을 위해 떠나겠다는 나를 보며 그는 잡을 수가 없다고 했다.

단지 일이 힘들어서라던가, 회사가 싫어서라면 설득하겠지만

다른 가치를 위해 떠나는 것이기에 부러우면서도 진심으로 축하한다 말했다.



그 이후로도 한참 동안 나의 이야기를 했다.

평소 사수에게 하지 못했던 이야기, 회사에 대한 생각과 서운했던 것들,

 함께 보낸 시간들에 대해 말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는 지금까지 나의 이야기를 들었으니, 본인의 입장에서 몇 마디 하고 싶다고 했다.


내가 회사를 떠나려는 마음이 반반이라면 한 번쯤은 잡으려 했다고.

아직 일을 배우는 단계이니 조금 더 해보면, 더 잘하게 되면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지 않겠냐고.

사람이 아쉬워서 잡고 싶은데 8-90% 확신을 가졌다고 하니 차마 그럴 수가 없다고 했다.




흔들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사람에 좌지우지되는 성격이어서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이유로,

좋아라 해 준다는 이유로 모든 걸 껴안고 온 시간이 얼마였던가.


하지만 이미 뱉은 말이었고, 막연하지만 이것저것 계획을 세워놓은지라 무르고 싶진 않았다.

이제는 정에 휘둘리는 게 아니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의 생활을 이끌어 가고 싶었다.



아쉬워하는 그에게 말했다.

표현은 안 했지만 나는 사수님도, 친한 과장님도, 먼저 퇴사한 동기도 참 좋아한다고.

처음 넷이 모여 술잔을 기울이던 그 날은 내가 회사에서 만난 최고의 순간 중 하나였고

이 사람들과 평생 동안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면 참 행복하겠구나 생각했다고.

앞으로 종종 맥주 마시러 올 테니 너무 서운해하지 말라고.


눈을 흘기며 그가 대답했다.

이 곳을 스쳐간 수많은 이들이 말로는 자주 오겠다 했지만 아무도 오지 않는다며, 나 역시 믿지 않겠다고 했다.

그 말을 시작으로 우리는 또다시 투닥 거렸고 몇 잔의 맥주를 더 비워내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떠한 설득도, 고민도 더는 없었다.



적당한 취기를 느끼며 돌아오던 지하철 안에서 사수가 말했다.

자신이 대리님과 나 사이에서 중간다리 역할을 못한 것 같아 마음에 걸린다고 했다.

그 말에 나는, 막내이면서 너무 내 색깔을 드러내고 속마음을 숨기지 못했던 게 마음에 걸린다고 했다.


그냥 처음이었으니까.

늘 막내였던 그에게 나는 첫 부사수였고,

늘 여기저기 잠시 머물기만 했던 나에게 그는 첫 사수였으니까.

모든 게 처음이었고 서툴렀던 우리가 이 정도로 합을 맞춰

성과를 내고 인정도 받았던 건 꽤 멋진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더 오래 할 수 없음이 아쉽지만,

그렇기에 지금 떠나는 게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취준생 시절 꾸었던 꿈 중 하나가 사수와 가까워져서 퇴근 후에 맥주 마시는 거였는데

퇴사 선언 덕분에 나는 또 하나의 꿈을 이루게 되었다.

다음 날 제출해야 하는 레퍼런스와 나머지 일들이 여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사수가 배신감을 느낄까 봐 걱정했던 것과 달리 축하와 응원을 보내주어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한 차례 큰 산을 넘은 기분이다.

내일 대리님에게 최종 선고를 하고 나면 나의 퇴사는 확정될 것이다.

잘 말하고 잘 끝내고 그냥 잘. 잘. 잘.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다.





고스란히 박제해 두고 싶은 순간이었는데 아무것도 선명하게 기억나지 않아 아쉽다.

녹음이라도 해둘 걸 그랬다.








/ 퇴사하기 전에 적어 두었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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