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좋아할 수 있을까?
푸른 내음을 내뿜던 시절이었다. 초록에 핑크빛을 더하느라 정신없던 어느 날, 친구가 불쑥 말을 꺼냈다.
“사실 처음부터 걔를 그렇게 좋아한 건 아니었어.”
친구의 남자친구 얘기였다. 딱히 관심은 없었지만 잘해줘서 만나기 시작했더니 좋아하게 되었다고 했다. 비슷한 전개는 주변에도 꽤나 많았다. 심지어 비호감이던 사람에게 고백을 받고 나니 불쑥 호감이 생겼다는 친구도 있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신기했다. 나는 그런 스토리의 주인공이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나의 선택은 ‘가장’ 좋아하는 것, ‘진짜’ 좋아하는 것, 나를 ‘안달 나게’ 하는 것이었다. 조금의 호감으로는 도무지 만족이 되지 않았다. 분명 더 좋아하는 게 생기고, 그게 내 마음을 흔들어버릴 테니까. 내 마음을 가득 채워서 하루 종일 어쩔 수 없이 너만 생각하게 만드는 그 사람이야말로 나의 연인이 될 수 있었다. 물론 될 수 없는 경우도 많았다. 그의 마음이 내 마음과 포개지는 기적이 일어날 때만 연인이 될 수 있는 법이니까.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내 선택이 곧 성취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것. 짝사랑은 늘 애가 탔고, 연애가 시작되어도 끓는 속은 크게 달라지 않았다.
잔뜩 부풀어 오른 마음이 나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심장에서 흘러나온 감정은 머리부터 얼굴, 팔과 다리를 지나 손끝, 발끝까지 휘감았다. 팔다리가 흔들릴 때도, 입과 위장이 움직일 때도, 다른 사람과 마주할 때도 나는 온통 모든 감각은 하나로 향해 있었다. 그 애가 스치면 닫힌 입이 헤벌쭉 열리고 흐린 눈이 반짝 빛났다. 저 편에 숨어있던 태양이 스르르 떠올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움켜쥐던 어둠을 밀어내고, 온몸과 마음 곳곳에 빛을 뿌렸다. 쉽게 빠지지 않겠다는 다짐, 삶을 송두리째 내어주지 않겠다는 결심도 그 볕에 속절없이 녹아내렸다. 알고 있는 모든 언어로는 이런 마음을 담을 수 없기에 감정을 삼켰지만, 정작 나만 빼고 모두가 내 마음을 알아챘다. 그런 내가 종종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혼자만 동동대며 허기진 마음을 바라볼 때면 자주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좋아했으면 좋겠어.
교직을 택한 건 그런 마음에서 비롯된 것일지 모른다. 가르치는 것도, 가르치는 과목도 좋아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건 아니니까. 온몸을 던져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좋아하지 않았기에 편히 좋아할 수 있었다. 마음보단 몸이 피곤해서, 분노하지만 아프지는 않아서 좋았다. 매달 통장에 따박따박 찍히는 숫자를 확인하는 것도 신이 났다. 꽤나 만족스러운 날들이었다. 조금 심심하다는 것만 빼고는.
밋밋한 마음에 쓱 한번 찬바람이 스치더니 그 후론 빈 틈 없이 바쁜 일상에 숭숭 구멍이 뚫린 기분이 들었다. 헛헛함을 채우기 위해 아이들과 다양한 활동을 하고, 이런저런 특강과 여러 가지 기획을 시도했다. 그럼에도 도무지 메울 수 없는 틈으로 시린 바람이 들었다. 서늘함에 문득문득 눈이 떠지던 어느 새벽, 견딜 수 없는 마음을 써 내려갔다. 그제야 나의 마지막 퍼즐이 맞춰진 기분이었다. 피곤했지만 마지막 조각을 지키기 위해서 잘게 쪼갠 시간과 체력을 하나씩 꺼내어 뚫린 자리를 채웠다. 점점 비축한 조각이 바닥을 드러내자 몸도 마음도 삐걱거렸다. 그때쯤 결심했다. 덜 좋아하는 것 대신 가장 좋아하는 걸 선택하기로.
가장 좋아하는 것이 일이 되고 나니 삶 자체가 일이 되어버렸다. 다시 통제 불능 상태로 빠졌다. 덜 좋아하는 것이 꼴 보기 싫을 땐 더 좋아하는 것으로 도망칠 수 있었지만, 가장 좋아하는 것이 날 힘들게 할 땐 쉬이 위로가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견딜 수 없는 건 아무런 대답조차 들리지 않을 때. 그저 좋아하는 마음 안에서 허우적대면서도 그 마음을 멈출 수 없을 때였다. 그럴 때면 열심히 움직이는 내가 가엽기도 하고, 이게 가능한가 싶을 정도를 해내는 내가 대견하기도 했다.
월, 목 ‘어른들의 사회생활’ 연재, 수요일 시나리오 마감, 목요일 글쓰기 모임. 격주 소설 합평. 새로운 프로그램 기획과 간간이 들어오는 이런저런 요청까지. 정신이 없지만 보답은 보잘것없다 못해 보이지 않는다. 좀처럼 마음을 보여주는 않는 그의 뒤통수만 바라보는 일이 애가 타고 화가 난다. 그렇다고 외면할 수도 없다. 그러기엔 내 마음이 너무도 크다. 아직은. 차마 놓지 못해 끝을 겨우 잡은 손을 포개고 그 위에 얼굴을 파묻었다. 잠시만 숨어버리고 싶었다. 뜨거운 내 마음으로부터.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입금 알람이었다. 공들여 매주 2번씩 꼬박 한 달을 써 내려간 글에 대한 원고료는 고작 10만 원 안팎. 그 쥐꼬리만 한 숫자에 신이 났다. 이 돈을 쪼개면 보고 싶었던 사람들과의 약속에 부담을 덜 수도 있고,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선물도 보낼 수 있으며, 애증 하는 글과 시름하는 나를 위한 달콤함을 쟁여둘 수도 있었다. 덜 좋아하는 걸 택했을 때의 1/10에도 못 미치는 액수에 덩실대는 나를 진짜 춤추게 한 건 그다음이었다. 한 줄의 댓글. 감추고 싶어도 도무지 감춰지지 않는 내 마음에 상대의 화답이 툭 떨어진 기분이었다. 닳을 때까지 읽어 내려간 문장을 고이 접어 마음에 넣었다. 좋아하면 안 될 것만 같을 때마다 꺼내 몇 번이고 꼭꼭 씹고 다시 깊숙이 묻어두었다. 숙성된 그 응원이 언젠가 불쑥 찾아올지 모를 내 눈물과 상처를 쓰다듬을 수 있도록. 그리하여 지치지 않고 마음껏 좋아할 수 있도록.
계속 좋아하고 싶다. 아주 오랫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