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다짐
그가 사라졌다. 늘 그런 식이다. 제 멋대로 불쑥 와놓고 정신 차려보면 어느새 혼자서 저만치 가버린다. 언제나 제멋 대로인 나쁜 놈. 좀 서둘러 가버렸으면 좋겠다 싶을 때는 여기저기 눌어붙어 꼼짝도 않더니 제발 내 옆에 꼭 붙어 있었으면 싶을 땐 사라지고 없다. 인사조차 하지 못했는데. 이번엔 나란히 걸으며 다정하게 보낼 거라 기대하고 다짐했건만, 빠르게 멀어지는 그놈의 뒤통수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녀석, 시간. 2021이 익숙해지기도 전에 2022로 모습을 바꿔버리더니 그 마저도 눈도장을 찍기 전에 벌써 성큼 앞질러 가버렸다.
야속한 그를 잡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내가 빠르게 움직이기로 했다. 이른 시간에 눈을 뜨고, 모든 행동을 서둘렀다. 영화와 드라마, 팟캐스트도 1.5배속, 책도 잡지도 휘리릭, 걸음도 속속히. 나의 부지런함으로 그와 함께 할 수 있는 순간을 늘이고 싶었다. 가능한 아주 길게. 그래서 더 바지런히 움직였다. 그래야 우리가 더 오래 마주한다고 느낄 수 있으니까. 그런데 이상했다. 1.5배만큼 늘어날 것 같던 우리의 교차점은 1.5배만큼 흐릿해질 뿐이었다. 너무 희미해서 형체를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그 자취들을 보며 깨달았다. 그저 많은 자국을 남기려는 욕심에 깊게 꾹꾹 눌러내지 못했음을. 내가 무엇을 했는지, 왜 이렇게 동동거리고 있는지도 가물가물했다. 그를 쫓느라 나를 잃었다.
그가 아니라 ‘나’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내가 왜 그에게 그렇게 집착하게 되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나는 마음이 아주 분주했다. 지난날을 후회하는 건 아니지만 자꾸 미련이 남았다. 무엇보다 빠르게 사라지는 그를 보면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럴 때마다 마음이 지난날로 향했다. 왜 빨리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지 못했지? 쓸데없이 왜 공부를 했지? 아니 아니야. 그냥 차라리 공부를 계속할걸. 임용 말고 행시 준비를 했어야 했어. 아니, 사대를 가지 말았어야 했어. 특목고를 갈걸. 아, 됐다 됐어.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지금이 좋아.
그와 함께 뒹굴던 쓰고 매운 날들을 돌아보면 새삼 고마움이 피어올랐다. 촘촘하진 않지만 하나하나 꾹꾹 누른 ‘나’의 자국들에게. 나를 떠나버렸지만, ‘나’에게 찍힌 그의 지문들에게. 여기저기 모가 난 ‘나’를 둥글게 만들고, 물렁대던 ‘나’를 단단하게 만든 건 바로 그였다. 지루하리만큼 느리게 흘러가던, 의미 없는 시간. 조금만 속도를 늦추기로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마음이 바쁘다. 단단하고 따뜻한 글을 쓰고 싶지만 재능이 부족하고, 노력으로 빈틈을 채우기엔 시간이 부족하니까. 섬세하고 부드러운 글을 쓰기 위해 세상과 사람을 살펴야 하고 부지런히 습작도 해야 한다. 책도, 드라마도, 영화도 성실히 봐야 한다. 그러면서 분명 좋은 작품을 볼 때마다 ‘나’는 열을 낼 것이고, 질투로 가득 차오른 마음을 비우기 위해 친구들을 만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푼돈도 벌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또 1.5배속의 시간을 탐낼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안에서 매일 0.5배속의 순간을 만들어낼 것이다. 아주 느릿느릿하게 그를 지나갈 것이다. 그가 스쳐 지나가는 순간을 쪼개고 쪼개서 펼쳐볼 참이다. 그 조각들에 촘촘하게 도장을 찍는 대신 하나하나 가만히 들여다볼 생각이다. 그러니까, 내가 그를 쫓아가기에 급급하기보다는 내가 도도하게 그를 통과할 것이다.
문장을 하나하나 뜯어서 곱씹고, 영화 속 아주 작은 인물의 삶에 들어가 본다. 바퀴 달린 것의 힘을 빌면 금방 갈 거리를 두 발로 천천히 걷는다. 시멘트를 뚫고 나온 작은 풀, 옷깃을 여미는 사람들, 느릿느릿 성실하게 흐르는 구름의 움직임, 세포를 깊숙이 찌르는 차가운 바람을 만난다. 커피 향으로 공간을 가득 채우고 달콤한 디저트로 입 안을 채우며 나를 흐르는 시간을 그저 바라본다.
그러다 갑자기 벌러덩 눕는다. 어느새 불쑥 앞서 가버린 놈의 뒤통수가 아니라, 나를 스쳐가는 그의 모습을 모든 각도에서 세심하게 바라본다. 그렇게 떠나보낸 그는 아쉽지 않다. 아니, 아쉽지만 미련이 남지 않는다. 아니, 미련이 조금 남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그 시간 속엔 ‘내’가 있으니까. 2022의 얼굴로 나타난 그와의 만남에선 꼭 그가 아닌 ‘나’를 붙들고 싶다. 0.5배속의 시간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