캥거루족의 요즘 일상
나는 캥거루족이다. 매일 동거인과 의식주를 넘나드는 취향 전쟁을 치를 때마다 생각한다.
'더는 같이 못 살겠어, 진짜!'
하지만 어마어마한 집값에 비해 앙증맞은 소득을 마주할 때마다 독립을 향한 열망을 구겨 넣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프리랜서를 선언하면서 가뜩이나 귀엽던 내 월급은 확 쪼그라들었으니까. 그런 나를 보며 엄마는 자주 혀를 찼다.
<서울 캥거루의 독립운동기> 제12호 초고입니다.
“으휴 지 아빠를 닮아서...”
어릴 때 듣던 말을 다 커서까지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잘 다니는 회사를 때려친 것도 속이 터지는데 대체 뭘 하고 돌아다는지 모르겠고, 툭하면 여행을 떠난다느니, 뭘 배우고 싶다느니 헛소리만 해대고, 남들이 다하는 재테크나 연금 따위엔 도무지 관심을 보이지 않은 딸내미가 답답하다 못해 이해할 수 없다는 거다. 그런 나를 볼 때마다, 평생 성실하게 일했지만 그만큼 성실하게 본인의 욕망에 충실하게 살아온 아빠가 떠오른다고 했다. 아빠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빙그레 미소를 보인다. 그럼, 내 딸이 날 닮았지. 음, 그게 칭찬이 아닌 걸 모르는 걸까, 모르고 싶은 걸까.
비록 집에서 현실감 제로로 찍혔지만 절대, 결코, 네버, 스스로를 비현실적인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현실의 때가 묻고 묻은 어른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뭐랄까 삶의 지혜가 20% 정도 부족할 뿐이라고 할까. 그래서 삶이 조금 퍽퍽하긴 하지만 그 체증을 내려주는 선물 같은 인연들이 적시에 뿌려지니 나쁘지 않은 생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회사로부터 독립 선언을 한 뒤엔 나의 부족함이 꽤 문제가 되었다. 조직이라는 울타리가 없는 건 한계 없는 자유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보호 없는 생존이기도 했으니까. 자유롭게 꿈을 꾸며 살아남고 싶었기에, 대책이 필요했다.
좋아하는 일, 잘하는 일, 잘해 보이는 일을 구별해야 했고, 스스로를 잘 포장해야 했다. 그러면서 알게 되었다. 좋아하는 일은 많지만 잘하는 일은 많지 않고, 잘해 보이는 일은 적었으며, 그중 돈이 되는 일은 더 적다는 사실을. 글을 쓰겠다고 일을 그만두었지만 글을 쓰기 위해서 일을 해야 했다. 꿈을 꾸기 위해선 현실에 단단히 발을 붙이고 있어야 하니까. 허공에 둥둥 떠다니던 꿈을 지상으로 내려놓는 일 중 하나가 바로, 책 팔기였다.
독립출판물을 내고 책방에 입고까지 마쳤지만 딱히 다른 활동을 딱히 하진 않았다. 일을 하느라 바쁘다고 하기엔 본업을 하면서도 열심히 하는 작가들이 많았다. 어쩌면 책을 판매하는 사람보다 글을 쓰는 작가라는 이름표를 달고 예쁜 꿈속에 머물고 싶었는지도 모르고, 그저 작가라는 이름이 부끄러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더 주저할 수 없었다. 글이란 독자에게 닿아야 의미가 있음을, 그러니 독자의 손에 닿도록 해내야 함을, 무엇보다 그래야만 내가 계속 쓸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용기를 내었다. 나름의 최선을 다해 북마켓과 인스타 같은 곳에 기웃거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이상한 악순환은 반복되었다. 독립을 하려니 돈을 벌어야 하고 그러려면 글을 써야 하는데, 글을 쓰려면 시간이 필요했기에 돈 버는 시간을 줄여야 했다. 그러다 보니 독립의 꿈은 점점 멀어져만 갔다. 다른 일자리도 구했다. 소액의 단기 아르바이트지만 소처럼 열심히 일하는 건 내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현실주의자적 면모이니까. 맞긴 할까. 노동이 아니라 돈이 돈을 버는 세상이라는 점에서 비현실적인 요소인 것 같기도 하지만.
작업하던 시나리오의 방향도 현실적으로 틀었다. ‘상업적 문법에 익숙하지 않다’는 감독님의 조언을 적극 받아들여 투자 가능성 있는 소재를 가지고 상업적 요소가 가득한 스토리로 전개하기로 했다. 이야기라는 건 듣는 사람이 있을 때만 생명력을 얻는 거니까. 내 목소리가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주파수를 잘 찾아보도록 노력하기로 했다.
“넌 너희 엄마랑 아빠를 적당히 잘 섞어 놓은 것 같아.”
생의 절반 가까이 함께한 친구가 말했다. 이상주의자인 아빠를 닮아 본인의 욕망에 충실하게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극현실주의자인 엄마를 닮아 생활을 꾸리기 위해 쉼 없이 일을 열심히 한다나. 그 말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현실에 단단히 두 발을 붙이고 꿈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 나갔으면 좋겠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독립을 할 수 있었으면 참 좋겠다. 그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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