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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담아 Jul 26. 2023

티핑 포인트 #1

짜증나는 하루, 불길한 예감

딸깍 딸깍. 타타타타타닥. 신경질적인 소리만 빠르게 오가는 사무실. 오늘도 야근이다. 특별한 일도 아니지만 유독 짜증이 밀려온다. 예상을 빗나간 일은 늘 감정을 잔뜩 부풀리기 마련이니까. 주로 대학 교재를 출판하는 이 회사는 새 학기 직전엔 바빴지만 그 외엔 제법 한가했다. 그게 지금 회사의 가장 큰 매력이었다. 잠깐 바쁘지만 주로 여유롭다는 것, 크게 도전적이고 골치아픈 업무가 없다는 것. 물론 디자이너인 내가 디자인 업무 외에도 자질구레한 경영지원업무까지 맡고 있다는 게 좀 흠이긴 했지만 큰 불만은 없었다. 그런데 요즘 사장에게 없던 기업가 정신이 생긴 게 문제였다. 뜬금없이 혁신과 개혁을 들먹이며 대학교재가 아닌 다른 출판물까지 확장하겠다고 설치는 바람에 그 여파가 죄 없는 직원들에게까지 퍼지고 있었다.


그 몹쓸 바람은 몇 달 전부터 불기 시작했다. 사장은 뜬금없이 직원 회의를 소집해 혁신과 발전을 강조하더니 어학 교육 프로그램 회사와 협업하겠다고 선언했다. 협력적 파트너십을 발휘해 어린이 및 청소년을 타깃으로 한 다양한 교재를 만들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영상과 전차책에 익숙한 세대에게 종이책을 들이미는 게 과연 혁신인가, 이미 사업자가 꽉 차 있는 레드 오션에 뛰어드는 게 발전인가 의문이 들었지만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어차피 사업가로서의 단호한 결단으로 무장한 사장에게 먹힐 이야기도 아니었다. 오히려 기업가의 직관으로 나를 ‘일 하기 싫어서 꾀를 부리는’ 직원으로 낙인찍을 게 뻔했다. 아직 사장의 뛰어난 기업가 정신을 이해하지 못한 누군가는 의문을 제기했다. 소진 씨였다.

“어린이와 청소년 대상 교재는 대학 교재와 너무 다른데 위험부담이 있지 않을까요?”

“그런 위험 부담 없이 어떻게 혁신이 있겠어?”

이번엔 사장의 심기를 제대로 파악한 김 부장이 나섰다. 더 큰 성장을 위해서 어느 정도의 위험은 감수해야한다며, 요즘 젊은 사람들은 참 패기가 없다는 비난 섞인 한탄으로 말을 마쳤다. 회의라고 쓰고 훈계라 읽는 이 시간에 소신 발언을 할 수 있는 것 자체가 패기 아닐까, 생각했지만 역시 나는 조용히 낙서 가득한 노트에 시선을 고정했다. 제발 그 누구도 내게 의견 동조를 구하지 않기를 바라며. 중도 고수하기. 그게 내가 그 회사에서 지키는 최선의 방어이자 예의였다. 어느 쪽에서도 치우치지 않도록 중간을 지키는 건 많은 품이 드는 일이었다. 양쪽 상황을 체크하고 수시로 반영해서 나의 리액션을 정하고 최종 포지션을 미세 조정해야했다. 나이를 먹고 연차가 쌓일수록 요령이 생겼지만 여전히 힘에 부칠 때가 있다. 그런 순간이 쌓이다보면 한 번씩 폭발할 때가 있는데, 그게 오늘이었다.


불시에 날아올 야근을 피하기 위해서 일부러 일찍 출근해서 모든 일을 다 완료했건만 일을 다 했으니 다른 일을 좀 ‘도와’주라니. 속이 뒤집힐 노릇이었다. 내가 여기 자원봉사하러 왔니? 나보다 돈 많고 여유로운 인간(회사도 법적으론 인격을 부여 받은 법인이니까)을 도와주는 봉사도 있나? 나는 당신과 그런 온정이 아니라 계약으로 엮인 관계거든. 내가 일을 더 ‘도와’주면, 당신은 날 뭘 ‘도와’줄래? 하고 싶은 말이 속사포처럼 쏟아졌다. 물론 마음속으로만.


그도 그럴 것이 오늘은 대학 동기들과의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일종의 계모임으로 여행을 가거나 평소에 가기 힘들 법한 식당을 주로 가는데 오늘은 무려 호텔뷔페였다. 늦거나 빠지면 본인만 손해였다. 최대한 대강 마무리 하고 매우 피곤하다고 핏기 없는 표정을 연출하며 ‘몸이 안 좋아 가보겠다’ 며 빠르게 나왔다. 뒤통수가 따가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을 호텔 뷔페의 수많은 음식이 더 중요했다.


미리 호출한 택시에 재빨리 오른 후 거울을 꺼냈다. 회사에서 없던 혈색을 더해야 했다. 입술을 덧 바르는데 갑자기 차가 끼익- 급정거를 했다. 악! 내가 토해낸 짧은 한숨에 신경이 쓰였는지 힐끔 뒤를 돌아보던 기사님의 눈이 갑자기 커졌다.

 “소...손님! 혹시 괜찮으세요? 피...피가!”

차가 정차하는 순간 상체가 앞으로 푹 고꾸라지면서 입술을 그리던 립글로스 브러시가 오른쪽 뺨에 난 한 줄기를 그리고 흰 색 원피스에 몇 방울의 흔적을 남긴 것이었다! 하아- 뒷좌석 바닥에 떨어진 브러시를 주우며 말했다.

“아녜요. 그냥 좀 빨리 가주세요.”

 그때 멈췄어야 했다. 좋지 않은 예감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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