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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담아 Jul 29. 2023

티핑 포인트 #2

가장 진부하고도 통속적인 건 나였다

조금 늦었지만 아주 늦지 않은 시간에 가까스로 도착했다. 이미 동기들은 빠르게 접시를 비워내고 있었다. 급한 걸음으로 들어가 앉아 짜증났던 상황을 쏟아냈다. 이미 짧게 카톡으로 전했지만 그런 건조한 팩트에 담을 수 없었던 나의 억울함과 짜증, 그리고 그걸 무릅쓰고 최선을 다하고자 했던 나의 노력을 호소하고 싶었다. 누구도 내 말을 끊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진지하게 듣는 이는 하나 없었다. 카톡으로 전달했던 내 메시지보다 더 메마르고 이모티콘보다 건조한 표정으로 헐, 진짜? 대박. 미친 거 아니니, 따위의 맞장구를 뱉어냈다. 그렇다고 서운하진 않았다. 어차피 나도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테니까. 남이 지나온 직장 생활 고충보다 당장 내 눈 앞에 놓인 허기가 더 중요한 법 아닌가. 나도 서둘러 음식을 향해 걸어갔다.


“너 오늘 진짜 힘들었구나?”

기름기 가득한 음식 위주로 가득 채운 내 접시를 보고 동기 하나가 말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앞에 놓인 와인 잔을 들었다. 요리에서 배어나온 고소하고 부드러운 기름과 묵직한 와인 향이 뒤섞이자 요동쳤던 감정이 조금 진정되는 것 같았다. 그러자 가까스로 6명의 얼굴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그 중 유나의 얼굴이 유독 핼쑥해보였다. 그 앞에 놓인, 회 몇 점과 드레싱 없는 샐러드만 듬성듬성 담긴 접시를 가리키며 물었다.

“너 다이어트 해? 왜 죄다 풀떼기만 있어?”

유나는 씩 웃더니 손을 내밀었다. 한 눈에도 번뜩 띄는 반지가 보였다. 응? 얘가 남자 친구가 있었던가? 결혼 얘기가 없던 것 같은데... 혼자 이런 저런 생각이 스치려 할 때 유나가 입을 열었다. 3개월 전에 소개팅을 했고, 결혼을 하기로 했다고. 아주 짧게 적막이 흘렀다. 모두들 같은 생각이었는지 유나가 과하게 손을 내저으며 ‘그런 거 아니라’ 고 못을 박았다. 그제야 잠시 눌렸던 일시 정지 버튼이 풀린 듯 질문 세례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런 시기였다. 몇 년 전엔 다들 만나면 어학 점수와 자격증, 자기소개서와 면접, 간간이 스쳐가는 연애 이야기가 화제였다면 이제는 조금 달라졌다. 또라이 같은 직장 상사, 이기적인 직장동료, 소시오 패스 같은 관리자 얘기는 놀랍도록 상투적이어서 모든 직장에 유형별 몇 명의 인간을 복붙해 넣어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때마다 약간 소름이 끼치기도 했지만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묘한 위안도 있었다. 박봉에 체계없는 회사지만 그나마 ‘디자인’ 전공을 살려 일하는 건 나뿐이라는 작은 뿌듯함도 있었다. 하지만 나‘만’ 그렇지 않다는 그 안도감에서 빗겨나가는 것도 있었다. 바로 결혼.

“너는 재혁이랑 결혼 안 해?”

“에이- 설마. 너네 엄청 오래 만나지 않았어? 하겠지 곧.”

애들의 질문에 그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재혁이와 6년을 만났다. 이십 대 끝자락에 만나서 30대를 함께 넘어선 커플이라면 자연스레 결혼을 떠올리듯 그와의 결혼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재혁의 취직과 이직, 적응의 시간을 기다렸고 이제는 거의 다다랐다 생각했다. 다른 친구들처럼 웨딩촬영과 브라이덜 샤워, 청첩장과 버진로드로 이어지는 그 시작점과 맞은 지점에.

“야, 쟤 윤재혁 아냐?”

티라미수와 마카롱, 조각케이크와 쿠키, 과일 따위로 채운 접시와 와인 잔과 뒤섞인 커피 잔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나려할 때쯤이었다. 유나가 가리키는 쪽으로 우리 모두의 시선이 돌아갔다. 누군가는 내 눈치를 살피느라 바빴고, 누군가는 ‘일 때문에 왔나보다’며 애써 나를 위로했고, 누군가는 낯선 여자를 다정하게 바라보는 그의 눈빛과 행동에 나를 대신해 분노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한동안 내가 보지 못했던 윤재혁의 표정을 그저 바라만 봤다. 그리고 재혁에게 걸어갔다. 그가 바라보는 사람이 내가 모르는 먼 친척이거나 이 모든 게 일 때문에 연출된 어쩔 수 없는 상황일지 모른다 생각하며.


“어디 다쳤어?”

하얀 원피스에 붉게 물든 립글로즈 자국을 보더니 엄마가 대뜸 한마디 했다. 퉁퉁 부은 눈과 얼굴도 엄마의 상상을 더하는데 한몫했겠지. 대답대신 고개를 저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모든 게 귀찮았다. 무거운 몸을 침대로 던졌다. 호텔에서의 악몽이 떠올랐다.


당황한 표정으로 마주 앉은 여자에게 양해를 구한 뒤 내 손을 끌고 나온 그 자식은 ‘다 말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그래, 그 말하려던 게 뭔지 들어나 보자, 고 생각했다. 대체 어떤 창의적인 변명을 하는지, 설령 그게 꾸며낸 이야기라도 너무 성의 있고 참신한 논리라면 살짝 속아주는 척을 해볼 요량이었다. 그런데 그 새끼 입에서 나온 말은 너무 충격적이었다.

“6년을 만났다고 당연히 결혼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

당연한 건 아니지만 당연하지 않은 걸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고, 그러면 그게 또 당연해지는 게 세상 이치 아닌가. 우리 식구들과 내 지인, 심지어 나까지도 이 새끼와의 결혼을 너무도 당연하게 여겼다. 이 새끼의 이런 속내와 행동거지도 모른 채 말이다. 내가 그 수많은 ‘당연함’을 삼키는 동안 그 새끼는 차분하게 말했다. 결혼의 압박 앞에서 정말 나를 사랑하는지, 꼭 나여야 하는지에 대해서 깊이 고민해보았다고.  인생에 단 한번 뿐인 선택이기에 신중하고 싶었다고도 했다. 풉- 웃음이 났다. 차라리 질렸다거나 다른 사람이 좋아졌다거나 하는 투명한 말이 나을 뻔 했다.

“네가 결혼을 한 번만 할 건 어떻게 확신하는데?”

비꼬는 듯한 내 말에 그 새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이성적이었다. 결혼 적령기가 지나도록 만난 오랜 연인의 결혼이 당연하지 않은 마당에 결혼을 단 한 번만 하는 건 왜 당연한데? 세상에 당연한 게 없지 암. 차갑게 말하고 돌아섰지만 눈물이 똑 떨어졌다. 한 방울, 그게 시작이었다. 뜨거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다시 생각해도 너무 화가 나고 억울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책상 앞에 앉았다. 스탠드를 켜고 책상 위에 놓인 거울에 비친 얼굴을 봤다. 엉망이었다. 그동안 몰랐던 눈가의 자글자글한 주름도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가슴 부근에 묻은 붉은 자국은 방정치 못해 보이는 나를 더 추레하게 만들었다. 치마폭까지 이어진 붉은 자국은 정말 심장에서 흘러내리는 핏방울 같아 보였다. 그 위로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왜 눈물이 나고 난리야.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그 자식한테 관심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소개팅에서 만난 그 새끼의 애프터를 받아주고, 어쩌다 보니 6년 째 만났던 것 뿐이다. 그 새끼의 장점은 그냥 딱히 나쁘지 않다는 것 그것 하나였다. 화가 났다. 너무 화가 났다. 그 새끼가 아니라 나한테. 그동안 내 인생 모든 게 진부했다. 남들과 별 다를 것 없는 학창시절, 적당한 4년제 대학, 평범한 회사, 보통의 연애, 통속적인 이별... 그중 가장 뻔한 건 나였다. 나는 단 한 번도 내가 좋아한 걸 ‘선택’한 적이 없었다. 가족, 회사, 친구, 애인, 대학, 직업, 직장... 전부 내가 선택할 기회를 박탈당했거나 그냥 나를 선택한 걸 선택한 ‘척’ 했다. 이제부터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그게 무엇이든 내가 ‘선택’하기로 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누군가를, 진짜 하고 싶은 어떤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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