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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담아 Oct 04. 2023

티핑 포인트 #5

내뱉은 언어는 현실이 되었다

“미쳤어? 잘 다니던 회사를 왜 관둬? 재혁이 때문에 그래?”

어쩔 수 없이 퇴사 소식을 알렸을 때 엄마는 예상대로 매우 언짢아했다. 자꾸 캐묻는 퇴사 이유를 실은 나도 명확히 댈 수 없었다. 물론 윤재혁과의 이별로 인한 충격 때문은 아니었다. 김 부장과 딸랑이 때문에 홧김에 사직서를 날린 것도 아니었다. 갑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살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퇴사를 결심한 것도 굳이 따지자면 그저 '한 방울' 때문이었다. 아슬아슬하게 찰랑이는 컵의 물이 단 한 방울 때문에 넘쳐버리 듯, 내 삶 위로 톡 떨어진 방울 하나가 애써 균형을 맞추던 내 삶을 터뜨렸다.


호텔에서 마주한 낯선 윤재혁의 얼굴이 내 생의 한 조각을 무너뜨렸고, 그 뒤에 서 있던 모든 삶의 파편들이 도미노처럼 촤르르르르륵 쓰러졌다. 쓰러진 블럭들은 회사 생활에 균열을 일으켰고, 대학 동기 단톡방을 뒤흔들었다. 윤재혁의 몹쓸 장면을 함께 목도했던 그 무리들이었다. 그날 밤 알람을 꺼둔 단톡방엔 무려 100개가 넘는 대화가 남겨져 있었다. 나에 대한 걱정이 몇 방울 섞인 궁금증으로 도배되던 대화는 나의 침묵으로 인해 유나의 결혼 준비, 다른 동기들의 쓰라린 연애 경험, 유부로서의 삶으로 이어졌다. 대강 훑어봤지만 뭐라고 써야할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고민 끝에 출력한 문장은 결국 '어제 피곤해서 일찍 잠들었다'는 말이었다. 심플한 내 대답에 개인톡을 보내는 동기도 더러 있었다. 아예 카톡 알람을 꺼버렸다.


"야, 너 그럼 공돈 생긴 거네?!"

뒤늦게 윤재혁과의 일을 들은 수빈은 부딪힌 술잔보다 더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결혼자금 명목으로 꾸준히 부었던 적금을 얘기하는 거였다. 혹시 몰라 조금씩 사두었던 주식도 오를 때까지 더 묵혀둘 수 있겠다며 위로했다. 할 말을 잃고 눈을 흘기는 내 빈 잔을 넘치도록 채우며 수빈은 말을 이어 갔다.

"사람은 가도 돈은 남았으니 잘 됐지. 애초에 결혼같은 건 안 하는 게 낫다니까?!"

"한 애들이 꼭 그렇게 말하더라. 지들은 다 해놓고."

"난 다르지. 한 애가 아니라 했던 애잖아. 그런 내가, 진심으로 충고하는 거야. 친구야."

어이가 없다며 핀잔을 주었지만 그 말에 묘하게 마음이 놓인 건 사실이었다. 어쭙잖은 위로를 건넸던 동기들 말에선 도무지 느낄 수 없던 온기가, 공기에 퍼진 언어 틈 속에서 무심하게 스며 나왔다. 그 따스함에 잔뜩 부풀어 오른 마음은, 그 돈을 온전히 나를 위해 꺼내 쓰기로 했다. 고민은 '그 돈을 어디에 쓸까'로 옮겨갔다.

명품 가방? 어차피 사봤자 모시느라 별로 잘 쓰지 못할 게 뻔했다. 온전히 내가 즐길 수 있는 것에 지출하고 하고 싶었다. 여행? 여행이라면 좋아했다. 회사를 다니며 길게 연차를 낼 수 없어서 늘 아쉬웠기에, 오랫동안 여유롭게 외국에 머무는 꿈을 꾸었다. 이 참에 여행을 가볼까? 수빈과 급하게 핸드폰으로 어디가 좋을지 검색을 해보았다. 신나게 움직이던 손가락이 멈춘 건 항공권을 검색할 때쯤이었다. 그제야 불현듯 떠올랐다. 코로나 시기를 지나는 동안 여권이 만료되었다는 사실을. 안일했던 지난 날의 나를 반성하는 동시에, 짬을 내서 여권 사진을 찍고 재발급 신청하는 동안 거쳐야 하는 모든 것들이 귀찮아졌다. 됐어, 여행도 일이야. 핸드폰을 내려두고 술잔을 들었다. 그때 수빈이 말했다.

"너 그림을 다시 그려보는 건 어때?"

에이, 손을 내저었지만 수빈의 눈빛은 꽤 진지했다. 그 단단한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수빈을 처음 만난 날이 떠올랐다.


우리가 서로를 알게 된 건 드로잉 클래스였다. 직장 생활에 적응하다보니 자연스레 취미 생활 하나 쯤을 꿈꾸게 되었고, 내겐 당연히 그림이었다. 꽤 열심히 하던 나와 달리 수빈은 시큰둥해 보였다. 대신 사람에게 열심이었다. 수강생들과 강사가 하는 말을 잘 기억했고, 그들이 그린 그림이나 착용한 의상과 소품 따위를 기가 막히게 기억했다. 알고 보니 수빈이 얻고 싶은 건 취미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대화가 통하는 친구. 그림을 그리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좋아했기에, 이런 곳에 오면 1인분이 불가능한 맛집도 같이 가고, 혼자 묵기엔 너무 비싼 2인용 예쁜 숙소로 함께 여행도 가고, 우울과 기쁨을 오가며 일상을 나눌 수 있는 친구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나와 친구가 된 이후 수빈은 그 수업에 더 이상 오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그린 그림은 열심히 봐주었다. 그림이 아까우니 엽서로 뽑아 보라고 부축인 것도 수빈이었다.

"너 아이패드로도 그리고 그랬잖아. 인스타툰, 웹툰 그런 거 해봐.“

“그런 건 아무나 하나... 난 그림만 그렸지 그런 건 안 해봤는데?”

“아무나 하는 건 아니지. 근데 또 네가 그 아무나가 될 수도 있잖아?”

수빈의 부채질에 마음이 흔들렸다. 어느 새 수빈은 '웹툰 수익', '웹툰 전망', ‘인스타툰과 웹툰 차이’ 따위를 키워드로 작성된 장밋빛 포스팅을 잔뜩 공유했다. 대화창에 잔뜩 쌓인 링크를 다 확인해보기도 전에 웹툰을 원작으로 한 성공적인 드라마와 영화 리스트도 보여줬다. 그 아름다운 결실이 내 것이 아니라는 걸, 그 반대편에 있을 가능성이 더 짙다는 걸 잘 알면서도 합리적인 사고는 저 멀리 밀어버렸다. 대신 수빈의 부추김과 잔뜩 오른 취기를 핑계 삼아 잔뜩 피어오른 헛된 희망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집에 오는 길, 수빈에게 나의 다짐을 알렸다.

‘그래, 나 퇴사하고 하고 싶은 걸 할거야. 꿈을 찾아 갈 거라구!!'

문제는 그 다짐을 수빈과의 대화창이 아니라 동기 단톡방에 썼다는 사실이었다.


애초에 취기가 빚어낸 작은 씨앗은 사람들 사이를 굴러다며 점점 더 부풀어 올랐다. 어느 새 나는 정말 ‘한 방울’이 아니라 애초에 품은 작가란 꿈 때문에 퇴사를 결심한 것만 같았다.  어쩌면 수빈과의 대화가 진짜 마지막 ‘한 방울’이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예상보다 빨리, 아니 어쩌면 시나리오에 없던 퇴사를 현실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난 하고 싶은 일을 위해 멋지게 사직서를 던진, 결혼보다 꿈을 선택한 사람이 되었다. 그건 나로 살고 싶지만 ‘우리’ 안에 있고 싶은 내 욕망을 충족하는 그림이었다. 물론 그 모든 건 내 계획엔 없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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