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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담아 Oct 05. 2023

티핑 포인트 #6

24시간이 모자라

여러 벌의 옷을 입었다 벗었다 해도 성에 차는 옷이 없었다. 와인빛 원피스는 늦가을에 입기엔 조금 두꺼운 것 같았고, 마음에 드는 스커트는 어울리는 상의가 없었다. 바지 정장은 그새 살이 올랐는지 허리와 골반 부분이 보기 흉했다. 대체 뭘 입지. 출발해야할 시간이 다가왔지만 쉽사리 마음을 정할 수 없었다. 퇴사 이후 동기들 모임은 처음인데다 과 선후배들이 꽤나 모일 게 분명했다. 그들이 물어올 근황토크를 떠올리며 평소라면 10분이 채 걸리지 않을 메이크업에 꽤나 시간을 쏟았다. 결혼식장에서는 남편과 직장이 없는 내게 훈수를 두는 기혼자들의 늘어진 뱃살이나 잘 나가는 직장인들의 주름 따위를 찾으며 시간을 보냈다. 물론 그들은 대부분 마지막 인사를 이렇게 맺었다.

"어머, 역시 싱글은 다르다. 멋있다 야, 부러워.“


나의 퇴사를 진짜 반긴 사람은 놀랍게도 유나였다. 결혼을 앞두고 나보다 먼저 퇴사를 한 유나는 퇴사 동지가 생겨 너무 좋다며, 퇴사를 하면 확실히 삶의 질이 달라진다고 했다. 유나의 인스타를 보면 정말 그런 것만 같았다. 그 속에는 퇴사자의 여유롭고 아름다운 시간들이 펼쳐져 있었다. 이국적인 거리나 단정하면서도 어딘가 힙한 매력있는 공간, 그 모든 배경 속에서 주인공처럼 빛나게 웃고 있는 유나까지. 필라테스와 러닝을 즐기는 건강하고 탄력있는 생활, 이미 계약한 신혼집에서 직접 차린 멋진 식사와 간식 위에 흐르는 맛있는 여유. 거기엔 #오운완 #비건요리 #제로웨이스트 같은 소신 있고 트랜디한 해시태그가 붙었다. 유나의 일상을 보고 있자니 마치 퇴사 이후엔 내 삶도 그렇게 아름답게 물들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도 그런 멋진 세계에 입문할 채비를 마쳤다. 다만, 유나와는 조금 다른 방식을 택했다. 일단 웹툰 콘텐츠 기획 수업을 신청했다. 나는 유나와 달리 ‘꿈’을 위해서 퇴사한 거니까. 마냥 쉼으로만 채워지는 일상보다는 배움이 주는 적당한 긴장감이 함께 하는 시간이 더 의미도 있지 않은가. 결제는 내일배움카드제로 했다. 남들이 출근하는 시간보다 조금 늦게 나와 돈을 벌기 위해 진을 빼는 게 아니라 새로운 무언가로 나를 채워가는 기분이 좋았다. 수업을 마치고 나른한 오후를 걷는 감각도 좋았다. 햇살이 내려앉은 풍경도, 뻗은 손끝을 물들일 것 같은 파란 하늘도 낯설지만 반가웠다. 그런 느슨한 시간은 고작 한 달 정도 되었을 때 쯤 균열이 생겼다. 매달 들어오던 월급이 들어오지 않음을 자각하기 시작할 때쯤이었다. 수업이 끝난 뒤 대강 편의점에서 끼니를 떼우고 저렴한 카페에 앉아 그림을 끄적거리다가 그마저 아까워 집으로 곧장 향하는 날이 많아졌다. 방 안에 처박혀서 수업 과제를 한답시고 시름했지만 많은 시간을 인터넷 속을 유영하며 보냈다. 특히 무의미하게 인스타와 카톡 프사를 넘기다 눈에 걸리는 예쁜 착장, 멋진 음식, 그럴싸한 공간을 보고 있을 때면 내 삶만 무쓸모한 기분이 들었다.


내 인스타 계정은 텅 비어 있었다. 그저 누군가의 삶을 염탐하거나 이 세계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이름만 겨우 올리고 있는 정도였다. 직장인의 삶에서 인스타에 올릴만한 게 무엇이 있겠는가. 갑자기 나를 '퇴사동지'라 부르던 유나와 내 삶의 간극은 차라리 내가 직장에 다니고 있을 때가 더 가까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장인 오예진은 그저 '시간'이 없을 뿐, 여유가 생기면 이유나처럼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었으니까. 그런데 직장을 그만두고 나니 우리가 너무도 다른 세계에 놓여 있는 것만 같았다. 차이 나는 인스타 게시물과 팔로워 수만큼. 그 자각이 잠시 스쳤던 여유를 잡아먹기 시작했다. 점점 조급해지는 마음에 불을 지른 건 바로 윤재혁의 바뀐 프사였다. 행복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때 본 여자애가 찍어준 건가? 그래, 넌 아주 좋아 죽겠니? 속에 불붙은 열이 조급증을 폭발시켰다. 벌떡 일어나서 중얼거렸다.

'그래, 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일단 당장의 여유를 위해 약간의 금전이 필요했다. 숨고 어플을 다운받고 북디자이너 고수로 등록했다. '고수'라는 단어에 살짝 멈칫하긴 했지만, 프리랜서는 자기 PR과 자신감도 능력이라고 했다. 약간의 빈 시간과 인턴 경력까지 긁어서 경력 7년 차로 올렸다. 요청함을 계속 확인하며 괜스레 프로필을 수정하다 문득 정신을 차렸다. 그래,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정리해둔 경력사항에 맞춰 포트폴리오를 정리했다. 북 디자이너로서의 회사 경력과 취미로 그리던 드로잉, 웹툰 수업시간에 끄적였던 것들을 키워드별로 정리했다. 별 거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만으로도 하루가 훌쩍 지나버렸다. 완전히 끝나지 않은 포트폴리오에 지칠 때마다 유명하다는 웹툰과 웹툰 원작 영화, 드라마를 챙겨봤다. 그림이야 어느 정도 익숙하기도 하고 연습하면 될 것 같은데 아무래도 기승전결을 갖춘 극을 짜야 한다는 건 조금 부담스러웠다. 생각나는 아이디어들이 몇 개 있었지만 조각처럼 둥둥 떠다닐 뿐 그걸 어떻게 엮여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아빠였다.

"지금 집이야? 내가 오늘까지 신청해야하는 게 있는데..."

필요한 서류를 좀 떼어오라는 것이었다. 집이긴 하지만 노는 게 아니라 일을 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집=쉼'이라는 아빠의 강력한 공식을 깨뜨리긴 무리였다. 아빠가 말한 서류는 인터넷으로 금방 뗄 수 있었지만 그 역시 아빠에게 전화로 설명하는 건 무리였다. 어쩔 수 없이 주민센터로 가서 서류를 떼고 아빠에게로 가는 길, 이번엔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조카의 하원을 맡고 있는 엄마가 갑자기 일이 생겼다고 했다. 아니, 다들 내가 직장에 다닐 때는 어떻게 생활한 건지. 바쁘다는 볼멘소리가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엄마의 잔소리 폭격이 시작되었다.

"넌 집에서 놀면서 그런 것도 못해?"


가까스로 조카의 유치원 버스 하차 장소로 가는 도중에 수빈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업무 때문에 우체국에 들를 일이 있어서 밖에 나왔는데 심심해서 전화를 걸었다는 것이었다. 아니, 내가 무슨 동네북도 아니고 다들 필요할 때마다 나한테 전화질이냐고!! 괜스레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눌러내며 말했다.

"나, 바쁘다고.... 노는 사람 아니라고."

"그래. 너 엄~청 바쁘지! 내가 다 알아."

까르르거리던 수빈은 높은 옥타브로 내 말을 받아 이어갔다. 원래 한 곳에 정착한 사람들보다 끊임없이 상대를 찾아나서는 자가 훨씬 바쁘다는 거였다. 이미 짝이 정해지면 좀 풀어지기도 하고 잘 보이기 위해서 들이는 수고도 덜어내기 마련인데 아직 운명의 상대를 기다릴 때라면 언제 어디서 만날 지 모를 기회를 포착하기 위해 항상 긴장을 놓을 수 없다고 했다.

"나도 연애 프리랜서잖아. 24시간 내내 바쁘거든. 그래서 잘 알아."

멀리서 노란 버스가 다가왔다. 수빈과 전화를 얼른 끊고 버스에서 내리는 조카를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조카는 반가움과 놀라움이 뒤섞인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모, 회사 안 가?"

"응. 이모는 프리랜서거든."

아리송한 표정을 머금으며 그게 뭐냐고 묻는 조카에게 대답대신 볼에 입을 맞췄다. 좋은 향이 났다. 그 기분 좋은 내음이 내 지친 품을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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