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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담아 Oct 12. 2023

티핑 포인트 # 7

애매한 나이, 애매한 포지션

고민할 필요 없이 검은 옷을 급히 꺼내 입었다. 만 나이 덕에 겨우 삼십대 초반이라 우길 수 있는 애매한 서른넷은 그런 나이다. 누군가의 장례식이 어색하지 않는 나이. 영정 사진 속 인물이 조금이라도 덜 탱탱하고 더 희끗하다는 사실에 그나마 안도하게 되는 나이. 그럼에도 상복을 입고 있는 자의 눈물에 안심했던 마음을 뉘우치게 되는 나이. 이 감정에 휘둘리다 저 감정에 누그러지고, 속에서 수많은 감정이 싸우지만 또 그런대로 견뎌지는 나이. 그러면서도 자꾸 가까워지는 질병과 죽음을 마주할 때마다 속수무책이 되어 버리는 나이. 


조문을 마치고 북적대는 테이블 한 쪽에 동기들과 함께 앉았다. 테이블 위에 놓인 나무젓가락이나 종이에 동기의 회사 이름이 정갈하게 박혀 있었다. 한 구석에는 훨씬 더 크게 박힌 근조 화환도 보였다. 문득 걱정이 밀려왔다. 우리 부모님 장례식은 어떻게 하지. 그나마 동생이 평생직장이라는 교직에 있고, 결혼을 해서 사위가 있으니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장녀가 되어서 할 수 있는 거라곤 눈물을 흘리는 것 뿐이라는 생각에 지금 당장 울고 싶어졌다.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직장이 그리워질 줄이야. 아니야. 잘 나가는 프리랜서라면 말이 달라질 거야. 온갖 거래처와 지인들이 조문객으로 오겠지. 그래, 얼른 돈을 벌어야겠어.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유나가 내 머릿속 회로를 깨뜨렸다. 

“예진아, 너 혹시 아르바이트 하나 안 할래?”

영상콘텐츠 제작 회사에 다니는 친구가 이번에는 인스타툰을 제작할 거라고 했다. 돈이 필요했지만 관련 경력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조금 걸렸다. 잘 해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뒤이어 유나의 입에서 흘러나온 숫자에 냉큼 하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어. 어차피 모든 건 부풀리는 거고, 결국 보이는 게 전부야.” 

수빈은 원래 생존을 위해 좋은 파트너를 찾을 때는 몸집을 잔뜩 부풀리고 화려하게 치장하는 게 도리라고 했다. 일단 그렇게 눈에 띄어야 좋은 짝을 찾는 거라고. 기회를 먼저 잡고 생각해봐야지 깊이 생각하다간 기회를 놓치는 게 이 세계의 법칙이라는 거였다. 맞는 말이었다. 게다가 지금 내가 찬 밥 더운 밥 가릴 땐가. 다음날 바로 미팅을 진행했다. 

"계약서는..."

"에이, 저 못 믿으시겠요? 유나 절친한 친구 분이라면서요."

그렇게 말하는 놈 치고 믿을 놈 하나 없다는 걸 빤히 알지만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A사 대리'가 아니라 '오예진'으로서 의뢰받은 첫 업무였으니까. 왠지 깐깐한 인상을 남기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이 바닥은 다 이렇다'는 식의 뉘앙스도 따갑게 느껴졌다. 그래, 소개시켜준 유나의 얼굴을 봐서 좀 참아야지. 그들이 보여준 레퍼런스와 영상 스토리 내용을 파악했다. 이미 영상에 기본 구성이 있기에 크게 어려운 일 같지는 않았다. 생각보다 투입 대비 효율이 좋은 일거리였다. 몇 번의 시안과 수정이 오간 뒤에 최종본을 보냈고, 그들은 내 결과물에 만족했는지 빠른 입금으로 보답했다. 하지만 아름다운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이 났다. 


"작가님 다음 주 수요일에 시간 되시죠?“

"네? 저 그게..." 

"저희랑 계속 일 하실 거 잖아요. 다음 일정은..."

물론 투자 대비 효율이 좋은 이 일을 놓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불쑥 전화해 일정을 통보하는 무례함이 걸렸다. 직장에 있을 때는 적어도 조직 내에서 통용되는 룰이라는 게 있었다. 잘 굴러가지 않더라도 직급과 보고 체계가 있었고, 결정적인 순간에 날 배반하더라도 사칙이 존재했다. 자주 깨지고 희미하더라도 사내 직원들 사이의 암묵적인 합의라는 것도 있었다. 그런데 그 모든 울타리에서 벗어난 나는 그 모든 룰을 스스로 만들고 처음 만나는 상대와 하나하나 조율해 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게다가 그 '조율'은 주로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일방적인 수긍으로 끝을 맺었다. 일감을 주는 사람은 내가 궁금한 것들(돈은 언제 입금해주는지, 내 페이 책정 기준은 어떻게 되는지, 왜  정산 때문에 가져간 내 개인정보는 언제 파기하는지 등등)은 설명해주지 않은 채 그저 통보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내용은 내 예상을 뛰어넘을 때가 많았다.

“네? 제주도 출장이요?”

“괜찮으시죠? 경비는 저희가 다 내드릴테니 걱정 마세요.”

프리랜서에게도 출장이 있던가, 제대로 고민해볼 시간조차 없이 상대는 거침없이 밀고 들어왔다. 경비가 문제가 아니라 출장비용을 추가로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내가 생각을 말로 꺼내기도 전에 생대는 이미 한 보 더 전진했다. 

"작가님 아예 저희 회사에 자리를 하나 마련해 드릴까요? 저희랑 계속 같이 하실 거니까."

좀 헷갈렸다. 이건 나한테 영입 제안을 하는 거야, 아니면 그냥 호구가 되라는 거야. 전화를 끊고도 찜찜한 뒷맛이 남았다.  


“야, 그거 딱 간 보는 거네. 얘가 아주 감이 떨어졌구만!”

내 얘기를 듣더니 수빈은 단번에 명확한 결론을 내렸다. 아직 서로에 대한 확신은 없지만 약간의 호감은 있는 사이, 괜스레 툭 던져보는 미끼 같은 거라고 했다. 그렇게 애매하게 찔러보는 놈치고 멀쩡한 놈을 본 적 없으니 조심하는 게 좋겠다며, 절대 ‘다 잡은 고기’같은 느낌을 줘서는 안 된다고 당부도 잊지 않았다. 그제야 그동안 내 삶에 설렘으로 발끝이 짜릿해지는 감각이 무뎌졌지만 그만큼 나를 당황하게 하는 얼얼한 찰나도 희미해졌음을 깨달았다. 그 익숙한 안온함 때문에 한 사람과의 오랜 연애에, 마음에 꼭 들지도 않았던 직장에 머물렀다는 사실도. 


결국 두 번째 프로젝트는 계속 삐걱거렸다. 보내주기로 한 자료는 자꾸만 지연되더니 마감일 이 가까워져서야 보내줬고, 내게 지급 되어야 하는 돈은 기한이 훌쩍 넘어가도록 소식이 없었다. 대체 언제 지급되는지 초조하고 답답한 마음을 접고 접다 겨우 물었을 때 들은 대답은 '작업 퀄리티가 떨어져서 내부에서 수정을 했고, 기한이 늦어져서 네고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소리야? 문제가 있었다면 미리 수정 요청을 했어야 했고, 애초에 예정된 자료를 늦게 넘긴 건 너네 잖아요! 차곡차곡 쌓인 짜증 위로 한 방울 한 방울씩 분노가 더해졌다. 가득 찬 불편한 심기가 마음 안에서 찰랑거렸다. 아, 그래서 언제, 얼마를 줄거냐고!!! 내가 궁금한 건 딱 그 두 가지였건만 계약 업체에서 돈을 지급 안 해준다는 둥, 회사 사정이 어렵다는 둥 쓸데없는 말만 늘어놓았다. 최대한 예의를 지키고 싶었다. 상식적인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막 해도 괜찮은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똑, 마지막 한 방울이 채워졌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아니, 참고 싶지 않았다. 나도 어려워. 넌 내 상황 봐주니? 당장 돈 달라고, 내 돈!! 결국 폭발한 마음을 담아 한 마디를 던졌다. 

'내일까지 처리되지 않으면 해당 청구건 내용증명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휴, 가만히 있어도 제 때 돈이 나오던 옛날이 조금씩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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