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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담아 Oct 14. 2023

티핑 포인트 # 9

새로운 인연의 시작

씨앗에서 싹이 트고 꽃이 만개하는 계절이었다. 하지만 내가 뿌린 씨앗들은 여전히 꽃은커녕 싹도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언제쯤, 어떤 모양의 싹이 트고 꽃이 필지, 열매가 맺긴 할지 알 수 없어 애가 타고 몸이 달 때 강태란이 나타났다. 


강태란은 내가 꿈꾸던 퇴사자의 모습이었다. 내 시간들은 나를 노화시켰다면, 강태란을 스친 세월은 그녀를 잘 숙성시킨 느낌이었다. 말할 때마다 풍기는 우아한 기운과 단단하게 여문 표정에 나도 모르게 빠져들었다. 첫 눈에 돌아보게 하는 외모는 아니었지만 대화를 나눌수록 힐끔거리게 하는 매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역시 일류대, 대기업 출신은 다르구나, 그런 탄탄한 커리어가 있는 사람들이야 말로 자신만의 길을 찾아 나선다고 할 수 있는 거구나 싶기도 했다. 내가 포기한 X는 강태란의 것에 비하면 너무도 작아서 뒤돌아서는 데 큰 결단 따위는 필요 없는 선택지였던 것만 같았다. 애써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강태란의 눈을 마주보려 했지만 자꾸만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너무 오래 작업을 한 탓에 목과 어깨가 굽은 탓이라 스스로 위로해보았지만 여전히 마음은 펴지지 않았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지병을 얻었다는 강태란은 자신의 능력을 더 이상 회사를 위해 쓰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내겐 그마저 강태란의 프로패셔널함을 증명하는 훈장처럼 느껴졌다. 그에 반해 나는 특정 시기에 야근을 밥 먹듯이 했지만 늘 적당한 수준으로 일했기에, 크게 아픈 곳이 없었다. 짜증나는 김 부장과 눈꼴 시린 딸랑이가 있었지만 중도의 포지션에서 모두와 적정 거리를 유지했기에 넘칠 만큼의 스트레스를 받는 건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회사에 대한 열정은 없었지만 내 능력에 대한 확신 또한 없었기에 쉬이 떠나지 못했다. 


“문화계의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싶어요. 제가 작가님 유명하게 만들어 드릴게요!”

불빛을 등지고 그늘 안으로 숨던 나를 강태란이 다시 끄집어냈다. 대체 어떻게, 무슨 수로 그 과장된 꿈을 실현한다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그 당찬 포부를 믿고 싶었다. 아니, 강태란이라면 가능할 것 같았다. 강태란과 함께라면 한 번씩 밀려드는 X에 대한 희미한 그리움을 싹 날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단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다면, 그렇게 능력 있는 강태란이 대체 왜 나한테 이런 제안을 하느냐 였다. 그런 내 마음을 어떻게 읽었는지 강태란은 이미 닳고 닳은 유명 작가가 아니라 능력 있는 신진 작가들을 발굴해서 키워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작은 책방에서 발견한 내 책과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작업물들이 정말 좋았다고, 덧붙였다. 어찌 그리 내가 듣고 싶은 말만 골라 하는 건지, 혹시 강태란의 능력은 앞에 앉은 이의 마음을 다 들여다볼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좋은 작품은 더 많이 알려야 해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작가님은 작업만 하세요.”

가뜩이나 책 입고 메일과 발송, 홍보 등 자질구레한 일에 잔뜩 지친 참이었다. 누가 대신 그런 일들을 해주고 작업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러면 우리의 관계는 대체 어떻게 되는 거지? 슬슬 궁금한 것들이 하나, 둘씩 생기기 시작할 때쯤 강태란은 계획을 하나, 둘씩 말하기 시작했다. 일단 최근에 오픈한 복합문화공간에 내 작품을 전시하고 싶다고, 전시 기간 동안 간단한 프로그램 운영도 해주면 좋겠다고도 했다. 생각해본 적 없는 전개였다. 전시는커녕 프로그램을 만들어 진행해본 적도 없었다. 

"걱정마세요. 제가 다 만들어드릴게요. 작가님, 작업실은 있으세요?"

작업실이라니. 그런 사치품이 내게 있을 리 없었다. 자신의 공간을 작업실처럼 마음껏 쓰라는 강태란의 호의에 또 한 번 마음이 흔들리긴 했지만 완전히 넘어간 건 아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 내민 호의를 함부로 덥석 물어버릴만큼 어리숙한 나이는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이어지는 말에 완전히 넘어가고 말았다. 


바로 종합소득세 신고. 그게 대체 무어란 말인가. 내 생 뿐 아니라 부모님과 동생, 제부, 주변 친구까지 가까운 이들의 삶에도 없던 단어였다. 혼자 해보겠다고 열심히 인터넷을 검색해봤지만 도무지 알기 어려운 용어들 뿐이었다. 내가 존재하는 사회에 나도 모르게 돌아가는 수많은 것들이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대로 홈택스에 접속해 보았지만 어지러웠다. 내게 친숙한 언어로 만들어진 낯선 세상이 괘씸했다. 분한 마음 한편에는 이 모든 걸 알아서 해주던 나의 X, 전 직장에 대한 그리움이 속절없이 피어올랐다. 국민건강보험, 고용보험, 국민연금에서 무언가가 날아올 때도 비슷한 마음이 불쑥불쑥 올라왔다. 그저 내 눈에 보이지 않은 곳에서 작동했던, 이름만 무성하게 듣던 존재를 마주할 때마다 익숙한 곳으로 숨고 싶었다. 그렇게 밉보이는 구석만 한 가득이던 내 X가 이런 자질구레한 일로부터 나를 보호해주고 있었다니 새삼 없던 애정이 솟아오를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 모든 걸 도와주겠다는 사람이 나타나다니. 미련따윈 쏙 들어가 버렸다. 


"그래, 일단 질러보는 거야. 몸만 사리다간 아무 일도 안 일어나." 

강태란이 자리를 뜬 뒤 뒤 테이블에 앉아 있던 수빈이 다가오며 말했다. 

“낯선 사람을 조심하라고 굳이 여기까지 쫓아와서 하는 소리가 고작 그거냐?”

“에이, 설마. 한 잔 하면서 요거 한 번 풀어보자.”

씩 웃으며 수빈이 핸드폰을 흔들어댔다. 그 안에 저장된 녹음 파일을 들으며 강태란과의 대화를 복기해보았다. 모든 가능성과 교류해야 했지만 모든 위험을 차단하기도 해야하는 시대였다.  강태란의 명함에 적힌 '문화예술기획 푸른'과 함께 적힌 주소도 검색했다. 포털 사이트에 장소로 나오는 걸 보니 사기는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신진 작가들을 발굴하겠다는 그 포부에 도무지 공감이 가질 않았다. 자선 사업가도 아니고 대체 왜? 무료 전시라는 것도 꺼림칙했다. 대관비에 수수료까지 몇 퍼센트씩 떼어가는 게 관행인 곳이 예술계 아닌가? 그럼에도 믿고 싶었다. 이런 선한 마음으로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도 있다고. 그 행운이 내게 왔다고. 드디어 뿌린 씨앗들에서 싹이 움틀 조짐이 보이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함께 싹을 틔우고 의지할 수 있는 동업자가 생겼다는 사실에 마음마저 간질간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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