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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담아 Oct 15. 2023

티핑 포인트 # 10

현실 자각 타임

"너 여기 알바생이야?"

"너야 말로 여기로 퇴근하냐?“

수빈은 무료 콜키지에 외부 음식 반입이 가능한 공간으로 여기만한 곳이 없다고 했다. 술과 음악, 적당한 인테리어, 이야기와 친구가 함께한 이곳이 바로 진짜 ‘문화 공간’이라고도 했다. cctv 너머 있을 강태란의 시선이 조금 신경 쓰였지만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그 화면 속에 비친 우리는, 이 공간은 어떤 모습일까? 희망의 씨앗을 숨겨두었을 것만 같은 설렘이 여전히 아른거릴까? 그저 지루와 초조로 얼룩진 뿌연 잔상만 보일까? 발끝을 간지럽히던 기대는 이곳의 문지방을 넘나들수록 흐릿해져갔다. 이제는 너덜너덜해진 그 희망 나부랭이를 잡고 만지작거렸다. 강태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전시할 때 작가님이 상주하면 좋지 않을까요?”

어차피 집에 있으면 늘어져 있기 마련이니 작업 공간으로 마음껏 쓰라는 말도 덧붙였다. 딱히 손해 볼 일은 아니었다. 강태란이 복합문화공간을 꿈꾸는 그곳엔 무료로 커피와 물을 마실 수도 있고, 구석에 마련된 냉장고에 먹을 걸 넣어두었다가 간단하게 끼니를 해결하기도 좋았다. 책과 작업한 그림을 전시하고 준비해온 엽서와 책갈피도 펼쳤다. 직접 만든 포스터와 리플렛도 수줍게 놓았다. 마지막으로 강태란이 뽑아준 명함을 더했다. ‘문화기획 푸른 대표작가’라는 수식어가 낯설지만 싫지 않았다. 그 이름에 어울리도록 문을 열고 발을 디딘 누군가에게 공간과 전시를 소개하고 간혹 엽서나 책갈피 같은 것들을 판매하기도 했다. 대부분이 내 지인인 방문객들의 칭찬에 민망했지만 '그래도 뭘 하긴 하는 구나'하는 가족의 눈빛에는 내심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커리어에 한 줄이라도 더 새길 수 있다는 뿌듯함은 덤이었다. 하지만 그 이름은 오래가지 않았다.


"예진 씨, 이것 좀 세팅해줄래? 나는 오늘 미팅이 있어서."

강태란이 손짓한 곳을 보니 핸드메이드 수공예품들이 수북했다. 대체 그게 무엇인지, 왜 그걸 내게 맡기는지 질문을 할 틈도 없이 강태란은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전시도 슬슬 끝나가니 다른 작가를 섭외도 해야 하고 지원사업도 알아보고 외부 인맥도 만나려면 정신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 여유로운 내가 진열도 하고 판매도 하라는 것이었다. 

“어쨌든 공간 운영은 해야 하잖아. 안 그래?”

그 공간 운영을 왜 내가 해야 하는 건지 고민하는 사이 강태란은 이미 자리를 뜨고 없었다. 분노할 대상이 눈앞에서 사라지자 핸드폰으로 방향을 틀어 수빈과 예림에게 전달했다. 예림은 같이 일을 하기로 한 마당에 일일이 손익 계산을 따지는 건 그렇지 좀 않냐고 했다. 그 말에 터지기 직전까지 잔뜩 부풀어 오른 나의 분노는 갑자기 갈 곳을 잃고 방황하기 시작했다. 내가 너무 이기적으로 나만 생각했나? 그래, 전시도 무료로 해주잖아. 아니지, 자기도 판매 수수료를 받잖아. 아냐, 그래도 기회를 줬잖아. 참나, 윈윈이잖아. 왜 고마워 해야해? 아니야. 모든 기회에 감사해야지. 이유 없는 불행을 피하는 것만도 감사한 시대잖아. 이런 저런 생각을 오가는 동안 단단하게 차오른 분노는 조금씩 김이 빠지기 시작했다. 그때 수빈으로부터 답이 왔다. 

‘치킨? 떡볶이?’


“안주 제한이 있는 건 좀 걸리네.”

아직 뜨끈한 피자를 펼치며 수빈이 중얼거렸다. 그래도 남의 공간인데 최대한 깨끗하게 먹고 치울 수 있는 걸 고른 탓이었다. 수빈은 굿즈와 책 진열에 바코드 작업까지 하고 있는 나를 보면서 쯧쯧 혀를 찼다. 명함에 적힌 ‘대표 작가’를 대신 ‘대표 호구’라고 박으라고도 했다. 

“네 생각에도 나 그런 것 같아?”

“당연하지. 이런 자질구레한 일 하면서 따로 받는 돈도 없다며.”

수빈의 대답에 바닥에 말라가던 간질거리는 기분은 점점 분노의 싹으로 바뀌어 갔다. 생각해보면 그랬다. 분명 '동업' 관계인데 묘하게 힘의 균형이 기우는 느낌이 들었다. 나이로 갖는 위계며, 은근 말끝마다 강조하는 학벌이나 대기업 경력도 거슬렸다. 그러면서도 공간이란 자본을 가진 자의 후광은 나를 자꾸 위축시켰다. 그게 비록 대출의 언덕 위에 쌓인, 위태롭게 흔들리는 빛이라도 말이다. 어차피 너나 할 것 없이 전부 덜컹대는 시대 아닌가. 갸우뚱하다 중심을 잃더라도 야트막한 내 공간 위에 나빠지는 게 나아보였다. 잔뜩 쌓여있던 바코드 스티커를 한쪽으로 치우고 보란 듯이 수빈이 사온 피자를 입에 넣고 맥주 캔을 부딪혔다. cctv를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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