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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담아 Oct 16. 2023

티핑 포인트 # 11

썸과 삼각관계

어릴 때 친구가 진짜 친구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 그 어릴 때의 기준은 대체 몇 살일까? 내가 수빈을 처음 만난 건 서른 살쯤이었으니 어릴 때 친구인걸까? 수빈과 나를 친구의 연으로 이어준 건 싱글 직장인이란 공통분모였다. 그 느슨한 연결선을 단단하게 묶어준 건 돈을 좋아하지만 주식과 부동산보다는 그림이나 책에 관심이 많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내가 직장을 그만두면서 직장생활이라는 커다란 공통분모가 사라졌다. 아무래도 각자의 생활패턴과 관심사가 달라질테니 우리 사이에 틈이 벌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여겼다. 하지만 수빈의 생각은 달랐다. 


“내가 말했지? 일이랑 연애는 도긴개긴이라고.”

자유연애주의자인 본인도 소속이 없는 프리랜서라는 말에 비웃었지만 누군가와의 공생 관계를 통해 생존에 유리함을 얻고자 하는 걸 보면 수빈의 견해가 아주 헛소리는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경제적 효율성과 직업적 가치관을 따져가며 함께 일할 누군가를 찾으려 애쓰느라 힘이 빠지다가도 수빈의 연애담을 들을 때면 나만 부유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에 괜스레 힘이 나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우리 사이에는 결정적 차이가 하나 있었다. 바로 썸에 대한 호불호. 확실하지 않은 관계 위에서 잔뜩 들뜬 이야기에 시큰둥한 나를 볼 때마다 수빈은 답답해했다.

"아니, 그렇게 재밌는 게 왜 싫어?“


나는 확실치 않은 아슬아슬함보단 명확한 경계 안에 머무는 안정감이 좋았다. 설레는 연애 감정이 밋밋한 일상의 유일한 짜릿함이라는 수빈의 단조로운 삶이 부러웠다. 매 순간 피로와 긴장 섞인 소란이 터지는 나는 특별한 이벤트 따윈 필요하지 않았으니까. 강태란과 손을 잡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예상하지 못한 순간을 마주할 때마다 그걸 확신에 찬 행동으로 처리해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흔들리는 마음을 ‘나’에게 꺼내서 어떤 ‘그룹’에 넣으면 조금은 단단해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누군가와 손을 덥석 잡고 있으면 내가 좀 괜찮은 것 같다는 안도감을 건질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어쩌면 강태란에게 그걸 들켰는지도 모른다. 타인의 눈을 통해서 나의 쓸모를 인정받고 싶은 욕망. 자존감이 바닥까지 떨어진 내게 날아든 윤재혁의 칭찬 한 마디에 마음이 팔랑였던 것처럼. 내 말에 귀 기울여 주는 모습, 내가 좋아하는 일에 관심을 가져주는 눈빛, 내가 가진 사소한 재능에 칭찬하는 말 같은 강태란의 달콤한 미끼 앞에서 내 마음은 금세 녹아내리고 말았다. 윤재혁이 어느 새 애인이 되었듯, 강태란은 금방 비즈니스 파트너가 되었다. 다만, 아차 싶은 순간이 조금 더 빨리 왔달까. 찰떡같이 잘 맞는다 믿었던 상대가 왠지 나랑 맞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내가 잘못 판단했던 건 아닌지 싶은 순간. 괜스레 약간의 거리감이 필요하다 느껴지지만 갑자기 멀어지기도 애매한 순간. 수빈은 이럴 때 필요한 건 새로운 인물의 등장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최현호를 떠올렸다. 나와 작업을 해보고 싶다는 웹툰 콘텐츠를 개발사 PD 최현호 이야기를 강태란에게 슬쩍 꺼냈다. 


“예진 씨한테? 왜? 그 사람 잘 알아본 거 맞아?”

강태란은 자신의 엄청난 이력과 인맥, 연륜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며 그런 낯선 이를 조심해야 한다고 단단히 일렀다. 참나, 내 능력을 믿고 같이 일을 하고 싶다고 연락한 게 너였거든요?!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속으로 다짐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내 능력을 보여주고야 만다고. 최현호에게 당장 연락을 하고 미팅 약속을 잡았다. 강태란 효과 때문에 최현호는 웬만하면 괜찮아 보일 것 같았다. 삼각관계의 맹점이었다. 새로운 사람의 등장이 둘 사이에 활력을 불어넣기도 하지만 새 인물이 오히려 원래의 관계에 얽매이게 될 수도 있다는 것. 그 사람을 바라볼 때 적용되는 기준이 일반적인 게 아니라 이미 옆에 있던 사람이 되어버리곤 하니까. 강태란을 처음 만났을 때는 꼼꼼하게 따졌던 것이 최현호 앞에서는 흐물해졌다. 강태란이라는 기준치가 새로 만들어졌으니까. 아마 그래서 였을 것이다. 최현호의 제안을 쉽게 받아들인 건. 그쪽에서 내게 원한 건 글 작가의 스토리에 어울리는 캐릭터를 그려내는 작업이었다. 최현호가 건네준 스토리 자료를 받아들며 시무룩해지는 마음을 애써 추스렸다. 


“이게 기회야! 이 삼각관계를 잘 이용하는 게 핵심이라고!”

기회라는 말 뒤에 붙은 문장에 갸우뚱하는 내게 수빈은 설명을 덧붙였다. 관계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핵심은 객관적인 능력이나 매력이 아니라고 했다. 

“그건 대외적 평판이고, 관계에서는 그 사람의 주관적 평가만 중요해.”

미심쩍어 하는 내 표정을 보더니 수빈은 ‘윤재혁이 널 찬 건 네 매력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거랑 똑같은 이치’라는 말에 묘하게 설득 당하고 말았다. 그 덕에 새로운 사람의 등장은 두 사람의 관계에 새로운 변화를 초래한다는 말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최현호로부터의 러브콜은 강태란에게 굳이 매달리지 않아도 되는 마음의 여유, 그와의 관계를 놓을 수 있는 명분 같은 걸 만들어 주었고, 그건 나를 이 관계에서 꽤나 힘을 얻게 된 기분이었다. 자신의 스케줄을 핑계로 내게 공간을 봐달라는 강태란의 제안을 자연스럽게 거절할 명분도 생겼다. 

“어머, 좋은 일이네! 작가님이 잘 되면 나도 좋지!”

강태란이 뱉은 문장은 대체 어떤 꿍꿍이를 숨기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우리 사이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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