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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담아 Oct 17. 2023

티핑 포인트 #12

액션과 리액션의 법칙

“내 마음을 모르겠어.”

썸남 앞에서 수빈의 고민은 언제나 자신의 마음이었다. 하지만 나는 늘 상대의 반응이 중요했다. 내 마음보다 상대의 행동이 내게 남기는 파장이 더 컸다. 이번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강태란과의 관계에서 새롭게 등장한 최현호라는 변수로 새롭게 재편된 나의 포지션과 마음을 살피기보다는 강태란의 반응을 곱씹었다. 기분이 묘했다. 대체 강태란의 속을 알 수 없어서 조금 답답하다가 다시 ‘작가님’으로 격상한 호칭에 마음이 조금 놓이기도 했다. 자꾸 강태란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마음을 붙잡아 안으로 넣어버렸지만 감각은 금세 또 밖으로 삐져나와 사방을 서성이곤 했다. 그건 내가 키워온 나만의 생존 능력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상대의 요구와 반응을 빠르게 알아차리고 그에 적합한 리액션을 만들어내는 것. 할 수만 있다면 치워버리고 싶지만 유일한 능력이라 버릴 수 없는 그것.


결국 이번에도 최현호가 원할만한 리액션을 만들기 위해 넘겨받았던 스토리를 가볍게 한 번 훑었다. 전체적인 톤 앤 매너를 체크하고, 좀 더 꼼꼼하게 한 번 더 읽었다. 캐릭터별 표현 문구와 에피소드를 따로 정리하면서 인물을 상상했다. 각각 어떤 점을 부각시킬지, 어떤 차이를 통해 특징을 살려낼지 고민하며 스케치를 시작했다. 그림으로는 의뢰가 들어온 첫 작업이라 나름 긴장과 의욕이 불타올랐다. 한 번 불붙은 손길은 쉽게 꺼지지 않았지만 모든 순간 벌어지는 수많은 선택의 조합 앞에서 자주 멈칫했다. 명확하게 그려지는 획도 있었지만 지우고 지워도 확신이 없는 선도 있었다. 대체 어떤 게 나은 지 고심하며 손을 움직일 때면 늘 최종 컨펌을 내려주던 상사가 그리워질 지경이었다. 그 날것의 고민과 절규를 고스란히 생중계하는 나를 보며 수빈은 나지막이 물었다. 

“나 진짜 궁금한 게 있는데... 그렇게 해서 얼마 받아?”


수빈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조직에서는 상대가 원하는 리액션을 탐구하는 것만 배웠기 때문이다. 이별로 종지부를 찍었던 내 긴 연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상대로부터 내가 원하는 리액션을 끌어내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내게 일과 공간, 사랑을 주는 사람들은 내 니즈를 물어본 적이 없었다. 그저 그들이 원하는 걸 말했고, 내가 원한다고 생각하는 것들, 혹은 그들이 생각했을 때 내가 원하길 원하는 것들을 주었다. 그리고 내가 목소리를 내면 ‘밝힌다’고 했다. 그들의 말이 어느 정도는 맞았다. 깜깜해서 보이지 않던 내 마음에 불을 밝히고 내 욕망을 들여다 본 셈이니까. 하지만 그들이 '밝힌다'고 내뱉는 문장 속 주어는 내 마음이 아니라 ‘돈’인 경우가 많았고, 종종 생략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상대가 원하는 걸 빠르고 정확하게 했다. 그게 내가 만든 나만의 룰이었다. 내 몫을 한 뒤에 내 목소리를 낸다. 이번에도 그랬다. 파일을 넘겨받은 최현호는 회의 후 연락을 준다고 했지만 대체 그게 언제인지는 명확히 알려주지 않았지만 기다리기로 했다.


언제나 그렇듯 기다림은 마음을 더 조급히 만들었다. 그럴 때마다 관리자 없는 시간들은 독이었다. 집중이 흐트러져 괜스레 의미 없이 sns를 돌아다녔고 그러다 윤재혁의 계정까지 들어갔다. 그런데 이게 웬걸. 커플링을 낀 채 포개진 두 개의 손이 보이는 게 아닌가. 배경과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나랑은 그렇게 지지부진 했던 게 다른 사람이랑은 이렇게 빠르게 진행된다고? 결국 모든 문제는 나였던 건가. 핸드폰을 보고 있던 손이 덜덜덜 떨렸다.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빠르게 올 줄은 몰랐다. 윤재혁에 대한 미련이 남은 건 아니지만 지난 내 시간들이 너무 아팠다. 그 자식과 보낸 기나긴 내 시간이 허망하게 느껴졌다. 삶을 리액션으로만 채운 내가 바보같이 느껴졌다. 시간을 되돌릴 순 없지만 이제라도 나만의 룰을 바꾸고 싶어졌다. 상대에게 원하는 리액션을 끌어내도록 액션을 취하기로 했다. 벌떡 일어났다. 그동안 버리지 못했던 윤재혁과의 추억이 쌓인 물건과 핸드폰에 저장된 수많은 사진들을 다 치워버렸다. 그리고 강태란과 마주했다. 


"대표님, 공간 운영하는 사람을 뽑아야 하지 않을까요?" 

"예진 씨 있잖아."

"저는 창작만 하라면서요. 나머지는 대표님이 다 해준다고."

"예진이 너 여기 무료로 쓰고 있잖아. 전시도 그랬고. 내가 애쓰는 건 안 보여?"

강태란은 자신이 쓰던 노트북을 내게 보였다. 화면 속 지원사업 기획안엔 일상 대화 속에 내가 무심코 던졌던 아이디어 버젓이 쓰여 있었다. 참나, 아이디어를 가져다 쓰는 주제에 자기가 다 해준다는 건 또 무슨 소리지? 하지만 강태란은 오히려 불쾌함을 드러냈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아이디어로 글발도 안 되는 내가 쓸 수 없는 지원 사업을 대신 써주고 있으며, 공간 없이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거 아니냐고 했다. 

“거래는 말이야 네가 줄 수 있는 카드를 분명히 가지고 와야 하는 거야. 알겠니?”


기가 찼다. 애초에 내게 기대한 게 무엇이었냐는 질문에 그저 ‘좋은 작품’이라는 답을 들었을 땐 할 말을 잃었다. 허술한 나의 선공을 강태란은 여유롭게 받아쳤고, 결국 난 날아든 공을 피하지도, 받지도 못한 채 난 그대로 서 있었다. 좋은 작품을 원한다면 내 노동력을 착취할 게 아니라 나한테 물적, 심적 자원을 지원해야줘야 하는 거 아닌가. 괜찮은 사람 따윈 개나 줘버리라고, 다시는 호구가 되지 않겠다며 뾰족하게 날을 세웠는데 능력도 없는 주제에 잇속만 챙기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강태란 말대로 상대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기 위해서는 줄 수 있는 게 필요했다. 아니, 근데 애초에 내 능력을 알아본 자기의 '안목'을 그렇게 칭찬하더니, 내가 능력이 없다면 너도 무능력한 거 아니니? 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난 능력주의 시대에 가장 대역죄인인 무능력자였으니까. 그리고 한 가지만큼은 확실하게 깨달았다. 내 이름에 붙은 ‘프리’랜서는 아무 곳에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를 상징하는 게 아니고, 내 모든 게 무료에 가까운 값어치를 지닌다는 의미였다는 것. 내 앞에 펼쳐진 무한한 프리를 확 구겨 발로 뻥 차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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