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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담아 Oct 19. 2023

티핑 포인트 #14

칼잡이의 정체

'이거 혹시 작가님 작품 아니예요?'

처음 강태란에게 연락이 왔을 땐 조금 당황스러웠다. 잠시 후 보내온 사진을 확인했을 땐 자존심이 상했다. 분명 내가 최현호에게 보낸 시안이었다. 채색이 달라졌지만 분명 내 것이 맞았다. 나와 애매한 안녕을 한 강태란은 무명 작가를 우롱한 최현호의 만행에 분개했다. 

"아니, 벼룩의 간을 빼먹지. 이게 뭐하자는 거야. 이런 양아치 새끼들은 진짜 가만 두면 안 돼!"

심장이 점점, 미친듯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부글거리는 노여움을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내 분노를 빼앗은 강태란에게도, 양아치 최현호 새끼한테도 화가 났다. 아아아아악!!!! 입을 틀어막고 분노를 짧게 뱉어냈다. 밖에는 부모님에 예림네 식구까지 와있었다. 워워, 침착하자. 우글바글 듫끊던 마음이 조금씩 식어가면서 두 개의 단어가 떠올랐다. 액션과 리액션. 내겐 시간이 필요했다. 


포털에 비슷한 사례를 검색해보고 저작권 조항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익숙하지 않은 법률 용어를 바라볼수록 이성보다 감성이 부스럭댔다. 문장을 쪼개고 어휘를 하나하나 분색했지만 내 머릿속은 심장에서부터 흘러나온 분노와 후회로 가득 찰뿐이었다. 끓어오르는 부아가 잠식해버린 이성은 해야 할 일 따위를 출력하지 못했다. 그때 메시지가 왔다. 강태란이었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요.’


잠시 망설였다. 최현호의 제안에 살짝 들떴던 설레발, 명확한 역할 관계를 운운했던 내 주둥이가 떠올라 괜스레 얼굴이 붉어졌고, 조금은 일방적이고 꽤나 번복되었던 강태란의 말투와 태도도 아른거려 속이 끓어올랐다. 이걸 빌미로 또 엮이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가 내가 그만큼 탐날만한 인재는 아니라는 생각에 마음이 차가워졌다. 식은 감정 위로 생각이 부서졌다. 헤어진 X에게서 온 연락에 흔들리는 건 옳지 않지만 살짝 도움을 받을 수 있진 않을까. 그 인간이 내게 인류애를 발휘할 수도 있는 게 아닐까. 어설픈 비즈니스 관계에서 성긴 우정이 튀어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 그런 선한 마음이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전쟁터인 직장에서도 어제의 적이 오늘의 아군이 되는 판에 지옥이라는 직장 밖에서는 당연히 모든 가능성과 교류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최현호라는 새로운 적군을 위해 강태란과 손을 잡을 이유는 충분했다. 심지어 강태란은 한 때 사법고시를 준비했다하지 않았는가. 나는 강태란이 슬쩍 내민 손을 덥석 잡았다. 그 온기를 연료 삼아 최현호의 예상 리액션을 준비하고, 그에 대한 나의 리액션을 준비했다. 최초의 내 액션도.


전화를 걸었지만 최현호는 받지 않았다. 예상 리액션에 포함되어 있었기에 당황하지 않고, 회사로 찾아갔다. 최현호는 자리에 없었다. 이 역시 예상 리액션 중 하나였다. 다른 직원을 찾아 사정을 이야기했다. 처음엔 모르쇠로 일관하던 직원은 내가 내민 두 개의 그림을 보더니 어디론가 메시지를 보내는 눈치였다. 결국 그날 저녁 연락이 온 최현호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두 개가 분명 다른 그림이며, 세상에 비슷한 그림체가 얼마나 많은 지에 대해 설명하기 바빴다. 거기에 원래 아이디어는 저작권이 없는 법이라고, 서로 공유하고 모방하면서 작품이 풍성해지고 발전해지는 거 아니냐며, 그런 개방적인 태도를 배워야 한다는 충고도 덧붙였다. 아, 그놈의 프리한 아이디어! 하지만 이번엔 마냥 당하고 있을 내가 아니었다. 그 리액션에 어울릴 법한 적당한 리액션을 꺼냈다. 

“그래도 제가 보낸 그림을 그대로 쓰셨잖아요.”

“비슷한 거죠. 그리고 채색이 완전히 다르잖아요.”

“컬러부분은 다른 작가분에게 권리가 있어도 드로잉은 제 꺼 아닌가요?”

“작가님 벌써부터 그렇게 내 꺼 운운하면서 권리만 밝히면 어떡해요.”


와, 내가 만든 것에 대해 내 권리를 주장하지 말라니. 정말 피가 거꾸로 솟는다는 표현은 이런 상황을 위해 만들었구나. 그동안 쌓인 분노에 한 방울이 똑 더해진 게 아니라 찰랑이던 감정 위로 폭우가 쏟아져 내려 완전히 감정이 뒤집어졌다. 겹겹이 포개져있던 수많은 감정의 결이 풀어헤쳐지면서 나를 휘감았다. 대체 이 상식적인 걸 어떻게 설명해야하는 거지? 정신없이 내 주변으로 얽히고설켜 단단하게 뭉친 마음을 집어 들고 강태란에게 소개받은 변호사를 찾아갔다.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진행하기로 했다. 기간이 꽤나 걸릴 지도 모르다고 했지만 가보기로 했다. 내 권리를 주장하는 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걸, 이게 상식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나에게. 물론 그 대가는 상당했다. 돈과 시간, 에너지 모두 꽤나 드는 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최현호와 주고받은 메일이 모두 저장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모든 증거자료를 준비하는 동안 다른 일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활활 타오른 분노 뒤에 남는 건 그저 시꺼먼 재뿐이었다. 후, 불면 파르르 흩날릴만큼 힘 빠진 심신은 그저 널브러져 있었다. 그림과 글을 끄적일 마음의 여유도 없었고, 그것들을 어딘가에 내놓는 게 좀 무서워졌다. 나도 모르게 무단으로 사용될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최현호 말대로 유명한 작가도 아닌 주제에 과하게 파르르하는 건 아닌지, 내가 만든 무언가가 누군가에게 쓰인다는 사실만으로도 벅찰 일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창작자가 나인지도 모르고, 나 역시 내 작품이 어떻게 사용되지는 모르고 있다면 알려진들 무슨 소용인가. 마음이 약해질 때면 스스로에게 외쳤다. 그런 말 따위에 휘둘리지 말자. 제발 정신을 똑바로 차리자. 


팔랑이는 마음을 다 잡고나면 생각은 허무함으로 튀었다. 나를 대체 뭘 위해 이렇게 아등바등하는 걸까. 황폐하게 굴러가는 마음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그저 뾰족한 외침뿐이었지만 그 조차 뽑아낼 힘이 나지 않았다. 어차피 아무도 모르게 흩어질 시간과 에너지를 꺼내고 싶지 않았다. 그저 사라지고 싶었다. 이 고독한 소란 속에서 그저 조용히 사라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때 인스타 알림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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