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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담아 Oct 22. 2023

티핑 포인트 #16

뜨거운 안녕, 또 다른 안녕

“오, 그럼 팬을 만난거야?”

권지은이라는 새로운 인물의 등장에 수빈은 열렬히 호응했다. 아무런 제안 없이 그저 호감만 비쳤다는 점에서 더 높은 점수를 준다고 했다. 그 호들갑에 흔들리지 않으려 괜스레 ‘그분도 작가님’이라고 응수했지만 오히려 수빈은 그 정보를 더 반가워했다.

“원래 작가들이 남의 작품도 더 많이 볼걸. 그리고 이 참에 알아두면 좋지 않겠어?”

수빈의 전략에 대답 대신 책 한 권을 내밀었다. 수빈은 책 표지에 ‘권지은’이라는 이름을 확인하더니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책을 집어 들었다. 그건 내가 전달한 커피에 보답한 지은의 선물이었다.


“혹시 몰라서 한 권 챙겨 나왔거든요.”

지은은 혹시 선물하고 싶은 사람을 만날까 싶어 가지고 나왔는데, 내게 줄 수 있어서 너무 기쁘다며 책을 내밀었다. 뜻밖의 선물을 조심스레 펼쳤다. 전혀 모르는 누군가의 ‘책’을 읽는 것과 내게 직접 다가온 ‘누군가’의 책을 읽는 건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지은을 떠올리며 한 문장 한 문장 꼭꼭 씹어 읽었다. 할리우드보단 독립영화를, 버스보단 기차를, 유럽보단 아시아를 좋아하는 지은의 취향을 들여다봤다. 예쁜 것과 맛있는 음식을 즐기지만 소비를 줄이고 싶어 하는 마음도 헤아렸다. 지은에 대해서 잘 안다고 할 순 없었지만 그가 지나온 삶의 궤적과 굽이굽이 품은 고민들을 희미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마음들을 dm으로 보냈고, 몇 번의 메시지가 오가다 우린 로컬 마켓에 함께 참가하기로 했다. 그림과 소품 작업을 하는 공방 겸 카페 앞에서 열리는 소규모 마켓이었다. 아무런 안내도, 간판도 없는 작은 행사였다. 행사나 마켓이라는 단어를 붙이기에도 조금 어색한 풍경이었다.


크기와 높이, 모양이 전부 제각각인 테이블이 여기저기 불규칙적으로 놓였는데, 그게 묘하게 멋스러웠다. 그 위에 올라온 물품들도 하나같이 개성을 내뿜고 있었다. 리빙 잡지에서 튀어나온 것만 같은 예쁜 접시와 컵, 차 주전자, 도시락이 있는가 하면, 손으로 한 땀 한 땀 제작한 행주와 블랭킷이 걸려 있었다. 직접 드로잉 한 그림으로 제작한 엽서와 포스터, 마스킹 테이프 같은 것들이 그나마 내겐 가장 익숙한 물품이었다. 직접 우린 차이 티와 소스, 빈티지 옷가지와 소품들 앞에서는 지글지글 부침개가 익어가는 고소한 냄새가 퍼졌다. 그 주변에 도란도란 둘러앉은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대체 누가 판매자고, 누가 구매자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능력껏 좋아하는 걸 만들어 내오고 필요한 사람들이 가져가는 물물교환장소나 각 물건의 쓰임과 특징에 대해 자랑하거나 칭찬하는 소개 마당이랄까. 지은과 내게는 친목의 장이었다.


모든 것들이 이야기가 되었다. 노란 도시락 통을 구경하면서 내가 네팔에 다녀왔던 이야기를 꺼내면 지은은 치앙마이 여행 사진을 꺼냈다. 차이 티를 마시며 한 사람이 마살라와 향신료, 커리를 떠올리면 다른 한 사람이 세계 각국의 향신료에 대해서, 그 향과 맛의 풍성함과 차이에 대한 흥미를 풀어냈다. 김치 부침개를 호호 불면서는 수많은 김치의 발효, 빵의 발효, 술의 발효로 대화가 무르익어 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선 지은의 새 책 표지 작업에 대한 구상을 함께 했고, 글과 그림이 함께 하는 콜라보 작업에 대해서 고민했다.


“너 또다시 호구가 되려는 거야?”

“아니, 너처럼 쿨해지려고 하는 거야.”

걱정스러운 눈빛에서 갸우뚱하는 낯으로 바뀐 수빈에게 조금의 설명을 덧붙였다. 네가 연애와 이별을 반복할 때마다 상대에 대한 복수심으로 스스로를 태워버리느니 그를 놓아주고 너를 살리는 것처럼, 그런 산뜻한 관계를 나도 만들어 보겠다고. 일이든, 마음이든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주고받고, 규칙이나 시선에 얽매이기보다 상대와 새로운 정의와 규정을 만들어 나가겠다고.

“애매모호한 관계보다 명확한 갑을 관계가 낫다며. 왜 또 모호해지려는건데?”

“썸이 재밌다며. 나도 너처럼 썸 좀 타보려고 그런다 왜!”


지은은 나의 직장 상사도, 동료도 아니다. 비즈니스 파트너이자 친구이고 동지이고, 가장 열렬한 독자이자 팬이며 편집자이다. 우리는 계약서를 쓰지 않았지만 매일 새로운 프로젝트에 대한 구두계약을 한다. 필요한 경우엔 돈이 오가기도 하지만 서로가 가진 재능을 교환할 때도 많다. 나는 지은이 준비하는 신간의 디자인을 도와주고, 지은은 내가 구상한 스토리의 뼈대를 잡아준다. 이 모호함이 흘러넘칠 땐 수빈이나 예림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하고, 지은에게 직접 대화를 요청하기도 한다. ‘법대로 해’라는 말이 주문처럼 쏟아지는 요즘, 계약 대신 약속, 법 보다 신뢰로 움직이는 관계를 꿈꾸며.


그게 잘 되겠냐고? 물론 나도 모르겠다. 그저 가보는 수밖에. 살아있다면, 어디로든 움직여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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