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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담아 Oct 18. 2023

티핑 포인트 #13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괜찮지 않은 사람

“내가 교회, 성당, 절 전부 돈을 내봤는데 여기만한 데가 없어. 가성비 갑이야.” 

분노와 비애감에 비틀거리는 게 버거워 누워있는 시간이 길어진 나를 꺼내면서 수빈이 말했다. 커다랗게 써 있는 ‘사주, 타로’라는 글자에 헛웃음이 났지만 어쩌면 수빈의 말이 맞았다. 판단 없이 너그러이 내 말에 귀 기울여주고, 이래라 저래라 하는 충고 대신 적절한 조언을 따뜻하게 해주는 사람이 흔치 않았으니까. 쭈뼛거리는 나와 달리 수빈은 요즘 골치 아픈 썸남들과 회사 이야기를 술술 꺼내 놨다. 연애든, 직장이든 어느 놈을 고르는 게 좋을지가 그녀의 고민이었다.


“뭐가 궁금하세요?”

수빈의 상담이 끝나자 질문은 나를 향했다. 글쎄. 대체 나는 뭐가 궁금한 걸까. 답답할 뿐 내가 묻고 싶은 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알고 싶은 건 많은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물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이 답답한 상황이 언제쯤 끝날지, 프리랜서로 살아도 되는 건지,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둥둥 떠다니는 물음표를 삼킨 채 침묵을 내뿜는 내게 상대가 다른 질문을 던졌다. 몇 마디 대화 끝에 타로 카드가 펼쳐졌고, 이게 뭐라고 카드를 뒤집을 때마다 심장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그런데... 카드가 왠지 밝아 보이지 않았다. 


“음, 엄청 성실하고 분주하게 무언가를 계속해오셨네요. 지금은 좀 지친 상태고...”

괜스레 눈물이 울컥 솟아올랐다. 차오른 눈물을 들킬까봐 카드 한 장에 시선을 고정했다. 멍청하게도 칼자루가 아닌 칼날을 손으로 쥐고 있는 인물이 보였다. 그 카드를 집어 들며 앞으로 속임수를 조심하라고 했다. 제 손을 스치고 있는 게 무언지도 모르는 표정, 그 답답한 게 나라고 생각하니 답답했던 속이 쓰려왔다. 그 바보 같은 인물 위로 눈물이 뚝 떨어졌다. 재빠르게 옷소매로 카드 위를 훔쳤다. 

“어머, 어떡해. 죄송해요...”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지. 카드야 젖어도 마르면 되지. 본인 마음에 차오른 물기나 좀 닦아줘요."

수빈의 말이 맞았다. 타로든 사주든 가성비 갑 심리치료제이자 종교였다. 생전 처음 본 사람의 그 한 마디에 참았던 눈물이 쏟아져내렸다. 한번 터진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어깨까지 들썩이며 소리내어 울었다. 괜찮은 사람이 되어 보려고 다른 사람들에게 주의를 기울였고, 내 생도 제법 괜찮게 만들고 싶어 여기저기 아등바등 뛰어다녔다. 그런데 결국 여기저기서 뻥뻥 차이며 전 사회적 호구로 전락한 기분이었다. 통장도, 마음도 너덜너덜해졌다. 해어진 마음 속에 가득 차오른 설움 때문에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만큼 흐물흐물해진 등을 수빈이 가만히 쓸어내렸다. 나의 상담사이자 성직자가 된 그분께서는 그런 우리에게 나지막이 속삭이셨다. 다른 사람의 말을 믿기 보다는 스스로의 마음에 귀 기울이라고. 나를 기만하고 속임수를 쓰는 인간은 대체 누구일까? 


강태란이라면 얼마 전에 이미 정리를 마쳤다. 전시가 끝나고도 진열했던 굿즈들과 작업한답시고 오가며 두었던 개인 짐을 뺐다. 회사에서 짐을 정리할 때보다 훨씬 단출하고 간단했다. 인계해야 할 업무도 없었고, 돌아다니며 인사를 전해야할 사람도 없었다. 오랫동안 녹아들었던 일부를 분리해내는 게 아니라 언제나 쉽게 떨어질 수 있는 조각을 살짝 떼어나면 될 일이었다.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고 커다란 힘이 들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힘이 빠졌다. 그래도 강태란이 칼잡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놓였다. 그 이외에는 딱히 만나는 사람 자체가 거의 없었으니까. 


칼잡이가 없다는 건 좋았지만 그럴수록 집에서는 걱정이 늘어났다. 부모님은 예림의 입을 통해서 이것저것 물어왔다. 대개 나도 모르거나 차마 답할 수 없는 애매하고도 예민한 질문들이라 대답 대신 한숨을 토해냈다. 그럴 때면 예림은 위로인지 조소인지 모를 말을 내뱉었다. 

“그래도 언니는 좋아하는 일 하잖아.”

예림의 고되고 지루한 직장 생활과 워킹맘의 힘겨운 일상이 쏟아졌다. 완벽히 포개지는 건 아니었지만 아는 고충이었다. 맞아. 좋아하는 일을 하는 주제에 내가 무슨 푸념이니. 부모님 집에 얹혀 살면서도 육아를 위탁하는 예림에게 종종 효의 책임을 슬쩍 떠넘기며 꿈이란 사치를 부리는 내가. 이상하게 허리띠를 졸라매면서도 낭비하는 것만 같아 따가웠다. 그러면서도 밀려드는 절박함 탓에 손에 힘이 풀렸다. 펜을 집어 던졌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 가난과 자괴감쯤은 견뎌야 하는 거야?”

“아니, 그건 사랑하는 사람이랑 결혼하면 딴 불편은 다 견뎌야 한다는 거랑 똑같은 거야.”

수빈이 평소 잘 하지 않는 첫사랑 이야길 꺼내며 나를 옹호했다. 바로 전 남편 얘기였다. 수빈의 X는 홀어머니의 부양의무를 진 외아들이었다. 어린 수빈은 주변의 많은 우려를 ‘부양할 사람이 한 사람으로 줄어서 좋은 거 아니냐’며 웃어 넘겼다. 그를 향한 충만한 사랑으로 모든 걸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물론 시간이 지날수록 현실이 사랑을 조금씩 갉아먹었다. 암 판정을 받았지만 보험 혜택에서 밀려난 시어머니, 두 사람 앞으로 고스란히 남겨진 엄청난 수술비와 수시로 재발해 입원해야 하는 삶 앞에서 수빈은 지쳐갔다.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삶을 저당 잡힌 것도 좀 억울하다 생각했지만, 그 사람과 결혼했다는 이유만으로 희생이 정당화되는 건 더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었다. 시어머니의 장례를 마치고 수빈은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그러니까 계속 좋아하려면 좋아하는 마음 말고 다른 것도 따져봐야 한다니까.”

백번 옳은 말이었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고 해서 부침이 없는 건 아니었다. 좋아하는 걸 하는 것과 좋아하는 ‘일’을 하는 건 엄연히 달랐다. 좋아하는 건 특별함인데, 그게 일상으로 전락하는 순간 반짝임이 사라지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좋아한다는 마음을 품었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걸 견뎌야 한다고 내게 윽박질렀다. 좋아하는 일을 시작하기 위해서 직장을 그만두었는데, 좋아하는 일을 계속 하기 위해서는 직장을 다시 구해야하는 것일까? 혹시, 이거야 말로 내게 던져진 시험인 걸까? 나를 자꾸 꾐에 밀어 넣는 건 가벼운 통장일까 아니면 괜스레 부푼 꿈일까? 칼잡이는 나인 걸까? 마음도 머리도 복잡하게 돌아가더니 갑자기 명치부근에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정신이 희미해지더니 앞으로 꼬꾸라졌다. 


헉헉, 숨이 가파왔다. 헉헉헉, 좀 전에 느껴졌던 찌릿한 고통이 더 깊이 파고들었다. 손으로 더듬어 보니 차가운 금속이 느껴진다. 그리고 뜨겁고 끈적이는 게 느껴진다. 뭐지? 쓰러진 바닥 위로 붉은 피가 번지고 있었다. 그리고 서늘하게 빛나는 칼날이 보였다. 내 몸통을 관통하고 있었다. 흐흐흐흐. 뒤에서 비열한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누구지? 뒤를 돌아보는 순간, 꿈에서 깼다. 


며칠 뒤 나는 놈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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