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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담아 Oct 13. 2023

티핑 포인트 # 8

어설픈 환승, 그리운 나의 X

다정한 남편과 5년 째 안정적인 결혼 생활을 이어간 프리랜서 작가. 별 다를 걸 없이 고요한 그녀의 인생이 어느 날 갑자기 강렬한 열정에 휩싸인다. 바로 새로운 사랑이 시작된 것. 주체할 수 없는 마음에 이끌려 결국 그녀는 남편을 떠나 새로운 연인에게 간다. 하지만 뜨거운 시간을 지나 그녀가 도착한 곳은 똑같이 쓸쓸하고 고요한 일상. 전 남편과 함께 했을 때와 같은 표정으로 같은 장소에 앉아 있는 그녀와 마주하고 있으니 괜스레 나도 헛헛해지는 기분이었다. 씁쓸한 내 옆구리를 수빈은 팔꿈치로 쿡쿡 찔렀다.

“표정 좀 펴. 원래 모든 게 다 저런 거야. 어떻게 평생 뜨겁냐?”

“그럼 식어도 그러려니 사는 게 답인가.”

“놉! 당연히 다시 불태워야지.”

“어떻게?”



진심으로 궁금했다. 다시 타오를 수 있는 방법이. 분명 뜨겁게 좋아하는 일을 찾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곳을 떠났는데, 내 마음은 다시 차가워지는 기분이었다. 영화 속 주인공은 새 연인과 함께 뜨거운 시간을 보내기라도 했지, 나는 혼자 타오르다 재가 되어버렸다. 처음엔 분명 열정이 있었다. 키워드별로 포트폴리오도 만들고, 인스타도 시작했으며, 크고 작은 공모전 준비도 했고, 이 모든 게 지속가능하도록 돈을 벌기 위해 외주 작업도 쉬지 않았다. 하지만 성과는 보이지 않았다. 손에 잡히는 거라곤 새 작업 수준의 과한 수정을 요구하는 진상 고객, 제때 정산이 되지 않아 말라가는 잔고 정도였다.


그럴수록 뜨거운 마음은 앞으로 나아가는 동력이 아니라 나를 지지고 볶는 화력으로 변해갔다.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는 나를 다그치고 윽박지르는 순간이 더 많아졌다. 검붉게 타들어가는 내게 넌지시 새 직장 이야기를 꺼내는 부모님에게 이제 겨우 6개월 밖에 안 되었다고 소리쳤지만 마음이 조급해지는 건 사실이었다. 특히 사라진 월급과 달리 매달 꼬박꼬박 빠짐없이 나가는 보험비, 통신요금, 카드값을 볼 때마다 싱숭생숭했다. 들어오자마자 금방 사라질지언정 잠시라도 부풀어 오르는 통장잔고에 자연스레 지어지던 흐뭇한 표정이 그리워졌다. 그때마다 올라가던 입꼬리는 제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은 지 오래. 동글동글 나란히 박힌 숫자 '0'와 함께 찍히던 징글징글한 그 이름이 그리워졌다. 황금연휴라며 집에 얼굴을 슬쩍 비춘 예림이나 장기 여행을 떠나버린 수빈을 볼 때면 그리움은 더 짙어졌다. 365일이 검은 날인 내 생활에 괜스레 심술이 났다. 

'미쳤어, 미쳤어. 그래도 지나간 똥차를 그리워 하다니. 그건 아니지. 정신 차리자.'


흔들리는 마음을 다독여보아도 점점 움츠러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점점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늘어갔고 내 고개와 시선은 하방 주시에 최적화 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하루종일 핸드폰과 타블렛을 속 세상만 오가는 내 뒷덜미를 잡아 끌어낸 건 수빈이었다.

"인스타툰을 묶어서 책으로 내면 어때? 너 출판사 다녔잖아."

"책이라고 다 같은 책이 아니거든."

흑백의 텍스트가 위주인 대학교재와 컬러와 그림이 주가 되는 책은 전혀 다른 거라는 내 설명에 수빈은 프리랜서에게 필요한 건 '도전 정신'이라는 일장 연설로 응수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책까지 어떻게 만들라는 건지 귓등으로 흘려들었지만 '포트폴리오'와 '커리어'라는 단어에 귀가 쫑긋했다. 북 디자이너와 작가로서의 커리어에 모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물론 인쇄소와 종이 판매장, 포장재 가게 등을 뛰어다니면서 그 기대감은 금방 잊었다. 가장 피를 말린 곳은 인쇄소였다. 


약속한 납기일이 다가오는데 샘플조차 도착하지 않아 연락을 하니 '일정을 너무 타이트하게 잡았다'는 부드러운 타박이 돌아왔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 애초에 상담할 때 가능하다면서요. 아웅다웅하면서 결국 나온 결과물은 더 가관이었다. 종이마다 다르게 표현된 색감이나 알 수 없는 종이 씹힘이 대다수였다. 

"저희가 납기일을 맞추느라... 정말 죄송합니다. 작가님이랑 제가 잘 안 맞나? 그건 아닌데.. 그쵸?"

내 잘못이라는 거니? 기간을 고려해서 일을 제대로 했어야지. 그리고, 내가 뭘 했다고 나랑 안 맞아. 그냥 네가 일을 못한 거지. 능글맞게 내게 책임을 떠넘기는 듯한 실장의 발언에 마음이 상했다. 김 부장이라면 이런 독사같은 놈쯤은 바로 처리를 했을텐데. 인쇄소는 딸랑이가 꼼짝 못하게 잘 주물렀는데. 휴, 나름의 분업체계가 있던 직장이 그리워졌다. 아냐, 그러지 말자. 이를 꽉 물었다. 


오랜 실랑이 끝에 완성된 책을 받았다. 책이 나왔다는 것보다 그 고된 시간들이 끝났다는 사실에 벅찼다. A부터 Z까지 하나하나 내 신경과 고민이 엉킨 결경체를 손에 잡아보았다. 서늘한 표지 온도에도 뜨거운 열기가 만져지는 기분이었다. 특히, 표지 위 오예진 세 글자를 스칠 때. 판권지가 아니라 표지에 내 이름이 박히는 건 또 다른 기분이었다. 내 마음도 밖으로 튀어나온 기분이랄까. 하지만 잠시 뿐, 다시 뜨거워지려던 희미한 불꽃은 책을 판매하기 위해 책방에 입고 메일을 보내고 대답 없는 메일함을 확인할 때마다, 보람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손익분기점을 마주할 때마다 차갑게 흔들렸다.




“새로운 곳으로 옮겨가야지.”

“어차피 또 식는다며.”

“그러니까. 식기 전에 또 새로운 곳으로. 계속. 이 언니는 그래서 계속 뜨겁다. 흐흐흐.”

수빈의 말에 고개를 내저었지만 내심 바랐다. 내게도 새로운 인연이 찾아오길. 그래서 더 이상 내가 떠나온 곳에 대한 미련한 그리움을 접고 다시 뜨거워지길. 영화 속 여주인공과 비슷한 표정이었을 내 손에 수빈은 빈 잔을 쥐어주고는 가득 채웠다. 마음껏 채우고 언제든 비울 수 있는 건 술잔 뿐인 시간들이 술술 흘렀다.

흩어지는 날들에 X를 향한 그리움이 흐릿해질 무렵, 거짓말처럼 새로운 인연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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