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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담아 Sep 26. 2023

티핑 포인트 #3

새롭게 떠오른 태양

책상에 앉아서 펜으로 그림을 그린다. 떠오르는 잔상을 펜 끝으로 출력한다. 소녀의 얼굴은 모래처럼 흩어져 인상착의를 알 수 없다. 심장엔 달인지 태양인지, 아니면 또 다른 행성인지 알 수 없는 둥그런 형체가 찌그러져 흩날린다. 마치 소녀의 얼굴처럼. 그러면서도 두 손으로는 단단하게 작은 컵을 들고 있다. 그 안에선 꽃이 피어난다. 그 소녀의 어깨 위에 따스한 감각이 스친다. 그제야 든 고개가 뻐근하다. 수빈이다. 그런데 수빈이 교복을 입고 있다. 이상하다. 쟤가 왜 교복을 입고 있지? 음, 그런데 주변을 둘러보니 교실이다. 수빈과 처음 만난 건 졸업을 하고도 한참 후인데... 내 그림을 뺏어 골똘히 보고 있는 수빈의 찡그러진 미간을 보며 생각했다. 그나저나 쟤는 요즘 미간 주름이 고민이라고 하더니 나 몰래 보톡스를 맞았나, 왜 이렇게 탱탱해졌지?


"대체 이게 무슨 그림이야?"

얼떨떨한 정신을 정리할 틈 없이 수빈이 먼저 질문을 던졌다. 이 심오한 그림은 대체 무슨 뜻인거냐, 이 여자애가 너냐, 왜 얼굴을 이 모양으로 만들었냐, 너 요즘 많이 힘드냐 등등... 그 무엇에도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다. 여기저기 아이들이 모여 들어 내 그림을 두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가장 많이 들리는 단어는 '다크'와 '그로테스크'였다. 쳇, 어디서 들은 건 있어가지고 영어를 쓰기는. 누군가를 보여주기 위해 그린 건 아니었지만 누구에게도 닿지 않는 그림이라서 괜스레 마음이 뾰족해졌다. 나도 모르게 가늘게 치켜올라간 눈매 가득 설움이 차오르더니 이내 아득해졌다.


눈앞이 선명해졌을 때 나는 손과 몸이 한층 작아져 있었다. 옆엔 홍수빈 대신 한 살 터울의 동생 오예림이 있었다. 만화책을 펼쳐놓고 그림을 끄적이고 있는 내 옆에서 정갈하게 깎은 색연필을 흐트러놓고 있었다. 정말 성가시다. 참고 참다가 내 그림 위에 거침없는 선을 만든 오예림의 만행에 결국 난 폭팔했고, 우리의 격렬한 전투 소리를 듣고 온 엄마에게 만화책도, 색연필도 빼앗겼다. 그리고 엄마는 단단히 일렀다. 만화같은 걸 봐서는 안 된다고. 그림 그릴 시간에 공부를 하라고. 그리고 책장에 있던 만화책을 전부 가지고 나갔다. 구겨진 그림도. 괜스레 서러웠다. 왜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은 없는 거지?


훌쩍이던 눈물을 훔치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꿈이었다. 책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꿈에서 나왔던 옛날의 책상과 책상 서랍은 사라졌지만 그 안에 넣어두었던 옛날의 기록들은 어딘가에 있을 게 분명했다. 방 인테리어를 바꾸면서 투박한 어릴 적 가구는 버렸지만 그 시절의 나는 차마 버리지 못해 상자 속에 넣어두었던 기억이 난다. 결국 먼지 쌓인 노트 꾸러미를 찾아냈다. 왠지 모르게 표지를 열기 전에 마음이 쿵쾅거렸다. 지금의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과거의 나를 마주하면 어쩌지? 그냥 희뿌옇고도 아름답게 기억하는 게 낫지 않을까?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나는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데, 그걸 표현하는 데 주저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질풍노도 시절을 지난 10대 오예진의 그림과 짧은 문장들이 휘갈겨 있었다. 찢겨진 교과서 위에 그려진 그림도 있었다. 그 아래는 짧게 담임에 대한 증오가 섞인 문구가 써있었다. 생각해보면 고1때까진 필통에 필기도구 대신 색연필이 가득했다. 그 색연필로 수업시간 마다 스프링 공책에 그림을 열심히 그렸는데, 조용한 성격에 시키는 건 성실하게 하는 편이라 크게 혼나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하필 담임 수업 시간에 교과서에 끄적인 그림이 걸렸고, 하필 그날 담임의 기분이 별로였는지 엄마까지 소환되었다. 담임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조용히 한숨을 나눠 쉬는 엄마의 옆모습을 보면서 K-장녀 DNA가 튀어나와 내 욕망을 떼어 마음 속 상자 안에 넣기 시작했다. 색연필로 그림을 그리는 대신 현란한 필기를 했고, 미대를 가겠다는 꿈은 '굶어죽을 일 있냐'는 부모님의 반대에 ‘인서울’, ‘시각디자인과’라는 협의점을 만들어 냈다.  


디자인의 세계는 내가 막연히 상상했던 세상과 조금 달랐다. 디자인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기보다는 사용자의 '편리'를 고민해야 하는 학문이었다. 그러니까 내 이야기보다는 타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일이었다. 조금 놀랐고, 약간 실망했지만 큰 불만 없이 따라갔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 특기는 내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거였으니까. 주변의 기대를 읽고 그에 맞춰 성실하게 움직이는 것, 극단으로 삐져나가지 않고 중간을 따라가는 일에 뛰어났던 난 수업에 흥미를 느끼진 않았지만 이상하게 여기진 않았다. 수업은 늘 재미없는 거니까. 입사 후 일에 가슴이 뛰기보다는 턱 막히는 일이 더 많았지만 놀라지 않았다. 회사는 원래 그런 곳이니까. 그런데 이제는 그 모든 게 숨 막히게 느껴졌다. 조금씩 쌓인 마음들이 더 이상 내가 외면할 수 없을 만큼 차오른 기분이 들었다. 내 위치를 정해주던 주변의 소리가 나를 조여 오는 것만 같아 밖을 향한 귀를 닫고 싶었다. 그저 내 마음 가는대로 ‘선택’하고 싶었다. 그게 무엇이든. 


어느 새 창밖에서 환한 빛이 스며들어왔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겐 새로운 날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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