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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담아 Sep 27. 2023

티핑 포인트 #4

변화는 시작되었다

벌떡 일어나서 향한 곳은 회사였다. 단단히 채운 마음으로 뻗은 문이 고작 그곳이라는 게 조금 서글펐다. 아무 것도 변한 게 없는 현실에 고작 여린 다짐 하나 펄럭이는 기분이랄까. 그마저 진짜 내 마음이었는지, 꿈이었는지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휴, 정신 차리자. 회사 문을 열었다.


혁신을 강조하는 고리타분한 사장, 그의 언어를 옮기며 애사심을 부르짖지만 결국 자신의 이익을 가장 사랑하는 김 부장, 고만고만한 불만과 적당한 눈치를 챙기는 이 주임, 조용히 자신의 일을 하지만 왠지 모를 거리감이 느껴지는 소진 씨, 그리고 쉴 새 없이 밀려드는 자질구레한 일까지. 마음에 들진 않지만 익숙한 그 풍경 속에서 평소와 별 다를 것 없는 오전이 지나갔다. 문제는 점심시간에 터졌다.

"아니, 같이 밥 좀 먹지. 식사도 회사 생활의 일부야."

조용히 도시락을 꺼내는 내게 김 부장이 던진 신호탄이었다. 코로나 시기에 시작된 도시락을  처음부터 못 마땅해했던 건 아니었다. 어차피 사회적 거리두기를 법처럼 따른 때였고, 그 덕에 나는 혼자 오롯이 즐길 수 있게 된 점심시간이 좋았다. 하지만 서서히 일상으로 돌아오면서 김 부장은 은근히 도시락 싸오는 사람들에게 눈치를 주기 시작했다. 직접적인 말은 삼켰지만 식사를 하고 와서 코를 킁킁거리며 과한 몸짓으로 창문을 열어 제쳤다. 그럴 때마다 흡연하고 온 김 부장 앞에서 똑같은 행동을 보여주고 싶었지만 꾹꾹 참았다. 월급만 쏙 빼고 치솟는 물가 속에서 내 주머니를 지키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조용히 견디는 것 뿐.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럼 저 오늘부터 5시에 퇴근해도 되나요?"

김 부장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봤다. 아랑곳하지 않고  언젠가 교사인 동생 예림과의 논쟁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조근조근 꺼냈다. 야근을 하고 느즈막히 집에 들어간 나는 이불 속에 뒹굴고 있던 예림에게 ‘일찍 퇴근해서 좋겠다’고 한 마디 뱉었다가 한바탕 설교를 들어야 했다. 교사는 점심시간에도 식사 지도와 상담 같은 자질구레한 일들을 처리해야 한다며, 학생들을 관리 감독해야 하는 그 시간도 근무 시간으로 포함될 뿐 일찍 퇴근하는 게 아니라고, 예림은 열변을 토했다. 오히려 직장인들의 자유로운 점심시간과 외출, 커피잔을 들고 점심 햇살을 받으며 걷는 로망에 대해 꺼냈다. 나는 그 카페인을 링겔 삼아 버티는 삶에 대해서 구구절절 말했고, 예림은 그 아메리카노마저 귀해 믹스커피나 카누를 때려붓는 삶에 대해 털어놓았다. 결국 이어지는 불행 배틀을 배민 어플로 끊어내던 그날의 논쟁이 이렇게 아름답게 쓰일 줄이야. 갑작스러운 내 목소리에 놀랐는지 김 부장은 쉬이 말을 잇지 못한 채 훽 문을 나서버렸다. 그를 따르는 한 명의 딸랑이까지 재빠르게 자취를 감추자 놀란 눈빛으로 소진 씨가 다가왔다. 그녀 서랍에서 꺼낸 초콜릿 하나를 건네며 말했다.

"혹시 무슨 일... 있으셨어요? 좀 변한 것 같아서. 아, 좋은 의미로요."  


글쎄. 긴 연애 끝 이별이면 제법 큰 일이 있었던 거 맞겠지? 세상이 많이 변했다지만 여전히 서른넷 여성에게 삶은 그리 다정하지 않으니까. 그것도 이미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은 여동생이 있는 경우라면 더더욱.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조카를 예뻐할 때도 '속도 없다며' 혀를 차는 가족의 타박을 견뎌야 하는 억울함이란. 부모님과 친척들의 따가운 잔소리 없이 마음껏 조카를 예뻐하고, 명절에도 어깨를 펼 수 있기를 바랐다. 웨딩과 결혼 생활, 출산으로 이어지는 친구들 대화에도 소외되지 않길 바랐다. 윤재혁과의 결혼이 그 평범한 생을 가져다 줄 거라 믿었다. 그 믿음은 와장창 깨져버렸다. 이렇게 된 이상 평범한 사람들이 모인 울타리에 접근 금지를 당한 게 아니라 내가 발길을 돌렸다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아니라 내 마음에 귀 기울이겠다 다짐했는지도 모른다. 평범하다는 게 뭔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것만은 분명하니까.  


오후 내내 구겨진 김 부장의 얼굴을 보니 내가 제법 결심을 행동을 잘 옮기고 있는 것 같았다. 이번엔 빠른 정시 퇴근을 위해 5분 전부터 주섬주섬 챙겨 6시 정각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 부장의 딸랑이가 다가와 '미친 거 아니냐'는 눈빛을 쏘아댔다. 해야할 건 다 했다고 하니  내게 '배려심과 협력심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네 일 내 일 따질 게 아니라 서로의 일을 돕는 게 직장 생활'이라고도 덧붙였다. '네 일'까지 떠맡는 사람은 꼭 정해져 있다는 사실, 그렇게 호구로 낙인 찍히면 그에 합당한 보수는커녕 고마움조차 돌려받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물었더니 그는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그럴 법도 했다. 그는 주로 '내 일'을 떠미는 사람에 속했으니까. 그동안 딸랑이의 정성이 보람이 있었는지, 배려심과 협력심을 발휘한 김 부장이 다가와 그를 거들었다.

"예진 씨, 식장이라도 잡았어? 왜 이렇게 똥 배짱이야?"

살짝 올라오던 승리감에 찬물이 쏟아졌다. 느닷없이 뿌려진 물은 눈으로 왈칵 쏟아져 나왔다. 김 부장이 김 부장했을 뿐인데, 나는 이제 결혼 따위에 미련을 두지도 않기로 했는데 왜 눈물이 나는 거지. 하필 이 놈의 회사에서, 재수 없는 김 부장과 딸랑이 앞에서 이런 꼴을 보이는 게 너무 자존심 상했다. 빠르게 회사 밖으로 나왔다. 연봉에 복지까지는 바라지도 않아(사실 바라지만 기대를 접는 게 정신 건강에 좋으니), 적어도 인격보호는 해줘야 하는 거 아냐? 김 부장 한 마디에 4년간 꾹꾹 눌러놨던 감정이 툭,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몇 주 뒤 나는 그 회사를 완전히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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