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일'을 '좋아하는' 일
얼마 전 너는 말했어. 직장을 그만두고 싶다고. 취직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너의 입에서, 굉장히 바라던 일을 하게 된 너에게서 그런 말을 이렇게나 빨리 듣게 될 줄은 몰랐어.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게 그리 놀랄 일도 아닌 것 같아. 너보다 조금 앞선 길을 걸어간 사람들에게서도 자주 들었던 말이기도 하거든. 나 역시 그중에 하나였고. 분명 원하던 일을 하게 되었는데 왜 행복하지 않았던 걸까? 기대와 현실이 다른 탓도 있겠지만 한편으론 별 일 없이 반복되는 일상, 딱히 커다란 성과와 결실도 보이지 않는 생활에 답답함을 느꼈던 것 같아.
그래서일까? 가끔 내게 물어왔지. 지금의 삶은 어떠냐고. 직장을 다닐 때와 어떻게 다른지, 그래서 지금의 삶에 만족하는지 말이야. 이제 막 졸업을 앞두거나 이제 갓 입사해서 또다시 진로에 대한 고민 앞에서 선 얼굴을 볼 때마다 고3 때 너희 모습이 떠올랐어. 엄청난 두께의 수박(수박 먹고 대학 간다) 책을 옆에 끼고 전국에 있는 온갖 학교와 학교를 뒤지면서 앞날을 고민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니. 참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어. '대학 간다고 끝이 아니다'라고 매번 외쳤지만 그럼에도 대입을 향해 채찍과 당근을 남발하는 더 강렬한 비언어적 요소들을 외쳐댔을지 모르니까. 그래, 대학만 가라 제발...
내가 그랬어. 대학만 가면 장밋빛 인생이 펼쳐질 줄 알았어. 고등학교 시절 열정과 노력은 그 잘못된 믿음 덕분이었지. 이게 끝이구나 했는데 웬걸, 그전과 다른 수많은 선택지가 계속 앞에 놓이더라. 수강신청부터 전공진입 같이 크고 작은 수많은 선택의 순간 앞에서 머뭇거리고, 고민하고, 좌절도 했어. 그런데 졸업을 해보니 그런 순간은 정말 별 것도 아닌 거야. 내 고민의 시작은 대학 졸업 후 몇 년 뒤에 시작되었거든.
학창 시절 내내 굳게 품었던 진로를 대학 입학과 함께 바꾸었는데, 종착지인 줄 알았던 교사라는 꿈과 여러 다른 길 역시 깡끄리 좌절되고 만 거야. 그때부터 진짜 내 고민이 시작됐어.
'난 뭘 좋아했지? 뭘 잘하지? 뭘 하고 싶지?'
우습게도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원대하고 허황된 꿈만 있었지 정작 '나'에 대한 탐구는 없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어. 막막했어. 대체 난 무엇을 해야 할까?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선택지들은 다 써 버렸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쥐고 있던 모든 선택지를 다 써버리고 난 뒤에야 새로운 길이 열렸어. 특별한 기회가 생겼다기보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기 때문에 하고 싶었던 일을 저질러 볼 용기가 생긴 거지. 난 글을 쓰고 싶었어. 그전까지 창작은 천재들만 가능한 영역이라 생각했기에 감히 꿈꾸지 못했지만 무난하게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길이 전부 막혔으니 밑져야 본전, 글을 한번 써 보자! 싶었던 거야.
뭣도 모르고 무작정 시나리오 수업을 등록했어. 난생처음 작법을 배우고 다른 세계의 언어를 배웠지. 낯설고 어려웠지만 재밌었어. 생계를 꾸려야 했기에 공교육과 사교육을 넘나들며 일도 했어. 두 가지 일을 하는 건 쉽지 않았어. 무엇보다 어떤 성과도 주지 않고 피로감만 남겨주는 글이 좀 미워지기 시작했어. 이러다간 죽기 전에 데뷔도 못하겠다 싶어 독립출판을 하기로 했지. 이번에도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작가가 되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책을 만들었어. 글을 쓰고, 책을 만들고, 홍보를 하고, 판매를 하고... 뭐 하나 쉬운 건 없었어. 가장 어렵게 느껴졌던 건 이 역시 딱히 성과는 없었다는 사실이야.
어이없게도 그때 내게 큰 위안이 되었던 건 '생업'이었어. 너희를 만났던 그 일 말이야. 직장은 싫었지만 너희를 만나는 대부분의 순간이 좋았어. 수업을 준비하고 가르치고, 너희와 소통하는 그 많은 시간들이 참 행복했어. 그 과정에서 몸과 마음이 타버렸고, 내 꿈을 찾고 싶다는 마음이 너무 커져버렸지만 너희와 함께 했던 그 '일'을 참 행복하게 했던 것 같아. 그럼에도 도망치고 싶었어. 가르치는 걸 좋아하지만 그 일이 날 태워버릴 만큼 많아져 버겁기도 했고, 더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었거든. 그런 내게 너희는 종종 묻곤 하지. 그래서 지금 더 행복하냐고.
글쎄. 지금도 비슷해. 매일 글을 쓰고 누군가에게 내 글을 알리는 일이 버겁게 느껴지곤 해. 가장 슬픈 건 좋아했던 것이 일이 되어버려 더 이상 마냥 좋아할 수 없게 되었다는 거야. 분명한 성과도 보이지 않는 이 일을 내가 계속하는 게 맞을까? 가족 구성원으로서 생계에 더 큰 보탬이 되어야 할 나이에 내 꿈을 핑계로 너무 욕심을 부리는 건 아닐까? 보잘것없는 재능으로 너무 허황된 꿈을 품고 있는 건 아닐까? 하루에도 수백 번씩 수 십 개의 물음표를 던지곤 해. 그리고 그 끝엔 하나의 문장이 남곤 하지.
좋아하는 걸 직업으로 삼는 게 맞는 일일까?
그래도 너는 좋아하는 일을 하잖아.
누군가가 종종 던지는 이 말이 참 아팠어. 좋아하는 일을 하면 돈은 포기해야 하는 걸까? 불안함은 기본값으로 안고 가야 하는 걸까? 안정적인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은 싫어하는 일을 참아내는 대가로 월급이나 연봉을 받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면 너무 끔찍하지 않니? 또 누군가는 말해. 원래 그 바닥이 그렇지 않냐고. 잘못된 관행이 이어져왔다고 해서 그게 당연한 건 아니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지금이 더 행복하냐고 묻는 너희의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어. 좋아하는 일과 안정적인 생활, 창작하는 삶과 상식적인 절차 이 모든 선택지 사이에서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는 사회를 이야기하는 게 미안해서. 그 사이에서 종종 거릴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내가 너무 부끄러워서.
네가 원하는 명확한 답을 줄 수 없어서 미안해. 하지만 네가 무슨 일을 하든 수많은 선택과 분노, 좌절의 순간이 올 거야. 그때마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네가 한 선택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면 좋겠어. 시간이 지날수록 휘몰아치던 마음도 평안해질 때가 올 거야. 완전히 무덤덤해질 순 없겠지만 미친 듯이 넘실대는 감정의 파도를 다스릴 수 있는 힘이 생길 테니까. 그 단단한 마음만 있다면 무슨 일을 하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해. 일을 마냥 좋아할 순 없겠지만 어떤 일을 하는 '나'를 좋아할 순 있을 테니까. 좋아하는 일을 하든,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든 중요한 건 나를 지키는 것이 아닐까? 일이 나를 삼키게 두지 않는 것. 그게 몸이든 마음이든 말이야.
나도 그래보려고 해. 당장의 결실이 없는 일을 하면서 수없이 많은 헛발질을 해가면서도 가끔 마주하는 누군가의 미소와 격려를 손에 쥐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해. 나의 작은 움직임들이, 내가 만들어내는 사소한 성과가 너희에게도 희미한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다. 너희도 어떻게든 살아낼 수 있다는 그런 희망을 품은 위로 말이야.
그러니 오늘도 난 나를 잘 지키며 단단하게 걸어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