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참사를 대하는 우리들의 자세
얼마 전 진행했던 프로그램에서 누군가가 노트북에 붙은 노란 리본을 가리켰어. 이건 대체 왜 붙여놓은 거냐고 물었지. 불쾌한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아서 떨어지지 않아 붙여 놨다며 우스갯소리를 던졌어. 돌아온 건 무뚝뚝한 표정이었어. 비슷한 사고는 많았다고, 그런 걸 정치적으로 이용하면 안 된다는 말과 함께. 정치적으로 어떻게 이용되었는지 물었지만 대답은 듣지 못했어. 사실 진짜 하고 싶었던 건 다른 말이었어. 그런 사고가 많으면 안 되는 거 아니냐고. 그리고 부끄러워졌지. 왜 나는 그 말을 꺼내지 못했을까.
생각해 보면 매번 나는 매전 큰 참사 앞에서 부끄러웠어. 처음 소식을 들을 때마다 그 심각성을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내 문제에서 헤엄치느라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사소하게 만들어버렸거든. 그 대가로 후회와 부끄러움이 뒤섞인 눈물을 쏟아내야 했지. 그럴 때마다 타조가 생각났어. 공포에 포위된 타조 이야기. 어떤 위협이 다가오면 타조는 그 상황을 탈출하는 게 아니라 모래에 머리를 처박는다고 하더라. 문득 궁금해졌어. 그렇게 하면 진짜 자기가 그 위협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당장 눈을 감고 외면하고 싶은 걸까. 아니면 눈을 감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에서 비롯된 그 멍청한 행동이 결국엔 진짜 스스로를 속이고 만 걸까. 나는 어떤 타조였을까.
참사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별 심각성을 느끼지 못한 것도 어쩌면 은연중에 타조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탓인 건 아닐까. 우리 사회에서 무수히 벌어지는 참사 앞에서 그저 눈을 감아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르지. 그래서 '이태원이냐'는 친구의 메시지에 '대체 무슨 소리냐'며 인터넷을 검색하다 그저 '그러게 왜 거기에 그렇게 몰려갔어' 라며 참사를 무심하게 흘려보냈어. 사실 '압사'라는 단어가 주는 이질감이 있기도 했어.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깔려 죽는다고? 그게 가능해? 그리고는 또다시 모래 속으로 고개를 처박았지. 어이없는 그 일이 왜 일어났는지 끊임없이 물음표를 던지기보다는 그저 가까운 지인들에게 연락을 돌리는 방식으로. 그들의 무사함을 확인하며 안도했어.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하룻밤이 지나고 얼마나 수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어처구니없이 생사의 갈림길에서 고통받았는지 알게 되었어. 그제야 모래 속에 처박고 있던 고개를 주억거리기 시작했지. 그랬더니 거꾸리 쏠렸던 피가 다시 돌기 시작했는지 부끄러움이 올라왔어. 정말 끔찍하지 않니? 타인의 죽음 앞에서 나를, 내 주변을 비켜간 불행 앞에서 안도하다니. 그런 내가 못 견디게 부끄러워지더라. 부끄러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어.
오랫동안 유가족들의 인터뷰를 진행했던 라디오 방송이 있었어.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매번 울컥 솟는 눈물에 조금 지친다,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거든. 오랜 시간이 지나도 할 말이 많을 수밖에 없는 그들의 마음 앞에서, 방송에 나와서 이야기를 풀어낼 만큼 절박한 그들의 심정 앞에서 절대 들어서는 안 될 생각인데 말이야. 내 부끄러움의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 무성해지면 그들을 향한 비난이 하나의 커다란 목소리로 피어나는 게 아닐까. 왜 비난받는 건 피해자의 몫이 되어야 할까. 기나긴 하소연이 나오기 전에 진상 규명을 했으면 될 일이잖아. 왜 그날 경찰은 마약 수사에만 초점을 맞췄는지, 왜 압사 신고전화에 출동을 하지 않았는지, 왜 참사 직후 희생자로부터 가족들을 분리시켰는지, 병원으로 수송된 희생자들의 옷은 왜 벗겼는지... 그들의 물음에 대답해 주면 될 일이잖아. 하지만 논란 끝에 겨우 타결된 국정조사가 진행됐음에도 그날의 진실에는 크게 다가가지 못했어. 이렇다 할 결과물을 제시하지 못했으니 말이야. 윗선 수사를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걸 보면 유족들의 마음은 얼마나 타들어갈까.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이든 증거든 희미해질 텐데 말이야.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 오송지하철 참사... 우리는 왜 이렇게 앞 글자만 달리 한 수많은 참사를 마주해야 하는 걸까. 그때마다 누군가는 그들을 향해 날선 언어를 서슴지 않고 뱉어내곤 해. 흔히 나오는 건 보상금이지. 얼마를 받았다더라, 돈을 받기 위해 저런다더라,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냐, 그런 곳에서 살아 나온 너희들도 가해자 아니냐... 너무도 날이 선 발언을 듣고 있자니 내가 다 서늘해지더라. 사실 그 상처와 아픔에서 가장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람들은 그들일 텐데 말이야.
어쩌면 그들은 모래에 고개를 처박고 싶은 걸지도 몰라. 그건 그저 너희의 잘못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그러니 나는 문제없을 거라고, 내 삶은 안온할 거라고, 믿고 싶기에, 그 흔들리는 믿음을 굳건히 하기 위해 끊임없이 타인과 나를 구분 짓고, 그들에게 말하는 거지. 너희 탓이라고. 내가 있는 이곳은 안전하다고. 그러면서 자신이 고개를 박고 있는 그 모래 틈 사이로 내 안의 불편감과 당사자 혹은 관계자들의 목소리가 비집고 들어오지 않도록 더 깊숙하게 머리를 내리꽂는 것일지도 몰라. 국가로 대표되는 나를 둘러싼 공동체가 더 이상 날 지켜줄 수 없다는 확신이 밀려오는 상황에서 나라도 살아내야 하니까.
공동체를 불신하게 된 우리는 내 돈이나 뜯어가는 정부에 세금도 내기 싫고, 그들이 제안하는 정책엔 모두 반기를 들고 싶어 지곤 해. 내 것을 뺏어가지 않는지 눈에 불을 켜게 되고, 내 몫을 지키기 위해 혈안이 될 테고. 인간에게 나를 지키는 '안전'에 대한 욕구는 가장 원초적인 본능이니까. 아무도 믿을 수 없기에 '나'만 믿을 수밖에 없게 되겠지. 나와 가족, 혹은 연인. 아무도 믿을 수 없어 너무도 외로운 우리는 자꾸 나 혹은 연애 영역에 매몰되는 건 아닐까. 물론 모든 인간관계의 시작은 '나'임이 분명하고, '나'라는 뿌리가 단단히 서야 다른 관계도 건강하게 맺을 수 있는 건 사실이야. 하지만 그게 더 확장되지 못하고 사적인 영역에만 머문다면, 우린 더 외롭고 고단하지 않을까?
한때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더 글로리>가 생각났어. 학교폭력이라는 사회적 문제에 학교 내의 교칙도, 사회의 법 제도도 대응하지 못하고, 친구와 가족, 교사, 그 밖의 어떤 어른도 한 아이의 아픔에 공감해 주지 못했을 때, 주인공이 선택하는 방식은 결국 사적 복수였지. 그 복수에 통쾌하면서도 아물지 않은 상처를 벅벅 긁어대며 무표정한 얼굴로 매일 김밥만 먹는 주인공을 볼 때마다 생각했어. 얼마나 외로울까. 얼마나 고단할까. 차라리 그 아이가 교사나 경찰을 붙잡고 소리치며 시스템의 힘에 기대려 노력하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울부짖음이 더 반가웠다면 좀 이상할까. 나는 우리가 주인공의 사적 복수에 통쾌감을 느끼기보다 비애를 느끼길 바라. 그리고 현실 속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삼키고 표정을 잃기 전에 부디 우리가 손을 내밀 수 있길 소망해. 내 작은 행동이 무슨 큰 변화를 일으키고 대단한 문제를 해결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생명을 잃어가는 누군가의 삶을 구할 수는 있지 않을까?
모래 속에서 질식해 죽기 전에, 계속 처박은 고개 탓에 목이 부러지기 전에, 나는 고개를 들어보려 해. 모래 속에서는 진짜 위협도, 공포도 벗어날 수 없으니까. 그저 남들과 다르지 않은 일상을 살다가 어느 순간 죽을 수 있도 있다는 불안감, 그 위험의 순간에 국가는 도와주지 않을 거라는 불신, 그게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는 영원히 공포를 지울 수 없을 테니까.
그러니 당당히 고개를 들고 모래 위에 단단히 서서 만나자,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