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턴
그날 이후 모든 게 빠르게 지났다. 마치 지난밤 꿈처럼. 아니, 어쩌면 내 시간이 전부 엉켜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뒤죽박죽 꼬여버린 세계에서 나만 툭 튕겨나왔다. 데구르르 굴러떨어진 나는 꽁꽁 엮인 사람들을 바라본다. 전부 혈연, 가족, 사랑이라는 붉은 줄로 연결되어 있는 그들을. 불쑥 외로움이 사무쳤다. 자꾸만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비좁게만 느껴졌던 서울 원룸 오피스텔이 아늑하게 느껴졌다. 유일하게 익숙한 공간. 당분간 이곳을 나갈 필요도 없었다. 급작스런 엄마의 부고 소식을 알릴 때 교감은 유감스럽다며 조심스레 계약 해지 소식을 전했다. 계약서에 적힌 기간까지 무려 6개월도 넘게 남은 시점이었다. 하지만 기존 정교사가 제자리로 돌아오겠다는 걸 막을 수가 없다는 교감에 할 말을 잃었다. 그럼 난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묻고 따질 힘도 없었다. 저항 없이 전화를 끊고 나니 톡으로 조의금 봉투가 날아들었다. 부장은 짐을 챙기러 교무실에 갔을 때 봉투를 찔러주었다. 부서 사람들이 조금씩 모은 거라고. 손 끝에서 그의 얄팍한 마음이 만져졌지만 감사하다는 말을 뱉었고, 그에 이끌려 각 교무실과 교장실을 오가며 의미 없는 인사를 나누고서야 건물을 나설 수 있었다.
작은 박스 하나. 손에 들린 짐은 그게 전부였다. 본가에 있는 엄마의 짐을 전부 정리하면 얼마나 될까. 아마 이보다 더 큰 박스로 수십 개는 나오겠지. 엄마는 그곳에 아주 깊게 뿌리내리고 오랫동안 지내왔으니까. 교과서와 지도서, 문제집은 전부 교무실 재활용 박스에 버리고 예의상 들고 나온 짐은 전부 쓰레기장에 던져버렸다. 머그잔, 칫솔, 치약, 실내화, 소형 가습기, 아이들이 적어준 쪽지와 스티커 같은 자잘한 물건들이 쏟아졌다. 애초에 그것들을 챙길 생각은 없었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줄곧 나는 가벼운 몸이다. 아무런 짐도, 부담도 없다. 위에서 짓누르는 무게도 없는 데다 속도 채우지도 않아 가뿐하다. 조금 이상한 점은 그럼에도 매트릭스에서 등이 떨어지기는커녕 자꾸 척 들러붙는 기분이 든다는 것. 온몸이 끈적하게 녹아 매트릭스에 들러붙는다. 몸을 뒤척이려고 해도 어찌나 강력하게 붙었는지 몸이 뒤집어지지 않는다. 결국 나는 거대한 중력에 항복하고 만다. 움직임을 포기한 채 그대로 축 늘어진다.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암막 커튼 사이사이에 난 뚫린 별모양으로 빛이 스몄다 사라진다. 희미하게 현관 벨소리가 들려온다. 눈꺼풀을 들어 올린다. 암막커튼 별이 밝아졌다. 몇 번째 밝은 별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내 쿵쿵쿵 문을 때리는 소리도 들린다. 우리 집이다. 아니, 내가 누운 방이다. 몸을 일으키려고 하는데 이번에도 매트릭스가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아가씨, 아가씨, 안에 있어요?”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대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설마 이 집에서 무슨 사달이라도 나는 건 아니겠지. 재수 없는 소리마, 집값 떨어지게. 사모님, 걱정 마세요. 이 아가씨 선생님이에요. 엄청 성실하다고요. 선생님이 그럴 리가 있어요? 아니, 요즘 선생님은 예전같이 않고 힘들다던데. 막 자살하는 것도 나왔잖아. 어머어머 무슨 소리야, 무섭게. 빨리 문 좀 열어봐. 사람의 목소리를 뚫고 조금 더 날카롭고 시끄러운 소리가 난다. 저들이 들어오기 전에 몸을 일으켜보려 안간힘을 써보지만 결국 또 지고 만다. 웅성대는 소리가 가까워진다. 귀를 찌를 듯한 기계음, 날카로운 목소리, 무거운 소리가 공기 중에 난무한다. 그리고... 별이 사라진다.
엄마의 뒷모습이 보인다. 아픈 관절 탓인지 살짝 뒤뚱대는 걸음이 여전한데 이상하게 빠르다. 손을 잡으려고 뻗는데 자꾸 놓친다. 엄마, 엄마, 불러보지만 들은 체하지 않는다. 집에서 엄마랑 살자며, 거기서 직장 구하라며, 괜히 타지에서 돈 버리지 말고 엄마 옆으로 오라며. 나 갈게, 엄마. 엄마랑 살게. 그제야 엄마가 걸음을 멈추더니 슬쩍 고개를 돌린다. 매서운 눈으로 나를 쏘아본다. 썩 꺼져. 분명 입을 앙 다물고 있는데 내겐 그 소리가 들린다. 섬뜩한 한기와 함께.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다 엉덩방아를 찧는다. 불쑥 솟아오르는 눈물 위로 빛이 쏟아진다.
“진아야, 강진아. 괜찮아?”
엄마가 아니라 혜린이었다. 사월도에 있어야 할 혜린이 도대체 왜 여기 있는 거지? 그나저나 내 방이 이렇게 환했나? 몸을 뒤척이자 왼쪽 팔이 따끔거렸다. 혈관 속으로 링거액이 떨어지고 있었다. 혜린이 가만히 있으라고 제지하며 빠르게 상황을 설명했다. 집주인과 복덕방 주인, 경비원이 함께 내 방에 들어왔는데, 내가 쓰러져 있었다고. 병원에서 최근 통화 목록 중 가장 빈번하게 나온 사람에게 전화를 한 것 같다고. 때마침 휴대폰이 울렸다. 이미 부재중 통화를 몇 차례 남긴 집주인의 문자였다. 아무래도 자기 아들이 들어와 살아야 할 것 같으니 비워줬으면 좋겠다고, 보증금에 이사 비용까지 얹어주겠다고. 다들 이렇게 계약 기간을 이렇게 어길 거면 대체 대체 계약서를 왜 쓰는 거지? 분했지만 분노할 힘도 없었다. 요목조목 따지고 대응방안을 알아볼 여유도, 그러기 위해 규정이 어떻게 되는지 찾아볼 여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무리 꼼지락거려봤자 손에 잡히는 건 무력감과 좌절뿐이었다. 더는 서울 끄트머리에 매달려 아등바등 애쓰고 싶지 않았다. 도시에서 밀어내는 거친 풍랑에 결국 나는, 떠나기로 했다. 다시, 사월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