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안
대충 짐을 정리하고 노트북 앞에 앉았다. 당장 실업급여로 생계를 이어갈 수 있지만 그게 끝나기 전에 일을 구해야 했다. 학기 중이라 그런지 자리가 많지는 않았다. 게다가 공고가 난 학교 위치도 들쑥날쑥했다. 지하철은커녕 버스 배차 간격도 40분 이상인 사월도의 출퇴근 경로와 시간을 가늠해 보다 결국 창을 꺼버렸다. 설령 자리가 난다 한들 지원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또다시 떠밀려온 게 분명했다. 벼랑 끝에 매달려 바동거리는 이 움직임을 멈추고 싶었다. 손만 놓으면 모든 게 끝나지 않을까.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엄마도 같은 마음이었을까.
삐빅- 낡은 소형 suv가 소리를 내며 끔뻑거렸다. 혼자 운전석에 앉는 건 처음이었다. 몇 번 핸들을 잡아본 적은 있었지만 그때마다 엄마가 곁에 있었다. 이제 엄마가 옆에 앉을 일은 없다. 완전히 혼자다. 자유롭다. 완전히 망가져도 괜찮다. 정말 괜찮다. 시동을 켰다. 어둑한 시야를 헤드라이트 불빛이 갈랐다. 액셀을 조심히 밟아보았다. 예정에 없던 주행이었지만 엄마와 함께 나섰던 길이라 어렵지 않았다. 맞은편에서 차가 다가오기 전까지는. 가뜩이나 비좁은 골목길 여기저기엔 주차된 차가 즐비했고 그 한가운데서 나는, 낯선 차와 팽팽히 맞섰다. 왜 내가 가는 길은 이렇게 늘 비좁은 건지, 그 좁은 길에 발붙이려는 나를 내쫓으려는 존재는 왜 자꾸 나타나는 건지. 이번에는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 물러날 재주도 없었다. 멈추지 않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빠른 속도로 달려오던 맞은편 차가 멈췄다. 별안간 운전석 문이 열리더니 불빛 속을 걸어오는 실루엣이 보였다. 재빨리 차 문을 잠갔다. 나락으로 떨어졌으면서, 더 떨어져도 괜찮다고 했으면서 살겠다고 발버둥 치는 내가 우스웠다. 하지만 이렇게 객사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프고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소망을 품은 내가 같잖았다.
“너 보험은 들고 운전하는 거야?”
혜린이었다. 우리 집에 오는 길이었다며 반찬꾸러미를 보였다. 얘는 왜 이렇게 오지랖이 넓은 걸까. 뒤늦게 내린 차창 너머 뻗어온 혜린의 손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잘 생각했다고, 여기 살려면 운전은 필수 아니겠냐며. 분명 동의의 표현인데 자꾸 마음이 삐딱해졌다. 앞서 가는 이의 언어, 가진 자의 여유 같은 것들, 그게 자꾸 거슬렸다. 그걸 자각하게 할 때마다 내 안의 못난 부분이 싫었다. 혜린은 제 차를 거침없이 후진으로 빼더니 금세 맨몸으로 돌아와서는 차 돌리는 법을 알려주다 결국 운전석에 앉았다. 주인인 나보다 더 자연스럽게 핸들을 매만지며 차머리를 돌리더니 말했다. 그래도 혼자서 무작정 연습하는 건 조금 무리 아니냐고. 대답하기도 전에 혜린은 조수석에 올라탔고, 왠지 모를 저항감으로 액셀을 밟았다. 점점 올라가는 속도에 혜린이 멈추라고 말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가로등도 비추지 않은 한산한 길을 빠르게 달렸다. 정말 괜찮을 것 같았다. 이대로 빠르게 사라지고 싶었다. 하지만 갑자기 핸들이 정신없이 튀기 시작했다. 아무리 손으로 잡아보려 해도 제 멋대로 날뛰었다. 핸들 조정 능력을 상실하자 차제도 덩달다 미친 듯이 흔들렸다. 쾅- 결국 가드레일을 들이받고서야 차가 멈춰 섰다.
조그마한 마을에 운전 연수 강사를 구하는 건 어렵고도 쉬웠다. 전문 강사를 부르는 건 어려웠지만 그저 운전을 알려주겠다는 사람은 꽤나 많았다. 게다가 얼마 전에 엄마를 잃고 본가에 막 내려온 나를 딱하게 여기는 이웃들, 그러니까 엄마와 언니 동생 사이로 지낸 여러 어른들이 기꺼이 내 운전 연수 선생님이 되어주겠다고 나섰다. 당사자인 내가 꺼내지도 않은 말들, 내 의지와 별개로 굴러가는 말들이 삽시간에 퍼졌다. 분명 그건 내가 아닌데 어쩌면 그게 진짜 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파에 바람만 들어 서울로 가버린 애, 엄마는 뒷전으로 하고 지 살 궁리만 한 이기적인 애, 그러면서도 정작 제 앞갈림은 못한 멍청한 애. 거기에 하나 더해졌다. 자동차 사고 가해자.
다행히 피해자는 없었다. 문제는 아직 보험 가입을 하지 않은 상태라는 것. 무언가에 찢겼는지 너덜너덜해진 타이어, 충돌 때문에 심하게 부서진 범퍼와 크게 긁히고 구겨진 좌측 차제. 눈대중으로 봐도 수리비 견적이 꽤나 나올 법했다. 내 한쪽 다리도 푹 꺾이는 기분이 들었다. 중심을 잃고 무너진 것만 같은 자동차처럼. 엄마의 장례식장에도 왔었다는 자동차 정비소 사장은 대략 200만 원가량의 견적을 불렀다. 실업급여로 겨우 연명하는 내게 그 정도의 급작스런 지출은 큰 타격이었다. 구겨진 몸을 혜린의 차에 던졌다. 그리고 혜린에게 ‘디카시’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다. 생소한 단어였지만 대충 어떤 단어의 조합인지 짐작은 갔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혜린의 말은 들어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혜린에 의하면 엄마가 동네 어르신들을 상대로 디카시를 가르쳤다. 엄마와 시라니.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엄마가 쓰는 거라고는 가계부가 전부 아니었나, 생각하던 내게 혜린은 더 믿을 수 없는 말을 했다. 엄마가 하던 일을 내가 맡아주었으면 한다고.
“너, 이 말하려고 계속 우리 집 드나든 거였어?”
“야?!!”
끼이이익- 혜린이 비명과 함께 브레이크를 외쳤다. 갑자기 뛰어든 건 고양인지 새끼 고라닌지 알 수 없었다. 심장이 벌렁거렸다. 자꾸만 예상치 못한 변수가 뛰어드는 것도 못마땅했지만 그 변인 때문에 상처받고 싶지도 않았다. 물론 주는 것도. 혜린은 돌발 변수를 무사히 넘겼고 나는 아무것도 없는 도로 위에서 비틀대다 혼자 망가져버렸다. 그렇다면 나는 가해자, 피해자, 방관자 중 어느 쪽일까. 그 어느 쪽도 되고 싶지 않았다.
“너 국어 선생님이잖아. 그러니까...”
“디카시가 뭔데? 문학이야? 비문학이야? 아님 문법이야? 고전이야?”
문학과 비문학, 고전과 문법의 쓸모를 묻는다면 줄줄 읊을 수 있었다. 문해력이 잃어가는 이 시대에 텍스트를 읽고 비판적으로 해석하는 능력은 의사소통의 기본이다. 도대체 유익한 정보를 얻을 수도 없는데 쓸모없는 소설이나 시 따위를 왜 읽어야 하느냐고 징징대는 아이들에게도 분명히 정답을 제시할 수 있었다. 내가 경험해보지 않은 타인의 삶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감각, 이건 나와 다른 존재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거라고. 고전은 역사와 같은 거다. 시간을 초월한 보편적인 정서를 느끼고 그 시대만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감성을 익히고 그걸 통해서 현대 사회의 지배적인 감수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면서 우리 마음속에 크게 자리한 감정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는 계기가 된다 같은. 물론 그게 진짜 효과를 발휘하지 않는다는 건 안다. 그래도 말할 수 있다. 그게 중요하다. 문법도 마찬가지였다. 글을 읽고 써 내려가는데 기초가 되는 규칙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디카시는... 글쎄. 게다가 어른들을 대상으로 하는 수업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것과 엄연히 다를 것이다. 교수 방법이나 모든 것이 달라질 게 분명했다. 교수법이 뭔지, 교육과정이 뭔지 알지도 못하니 쉽게 말하는 거 아니냐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낮게 한 마디만 내뱉었다.
“쉽게 말하지 마. 잘 알지도 못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