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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걸음,

혜린

by 정담아

사월도는 도로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지만 여전히 섬이었다. 조금만 차를 몰고 나가면 바다가 보였다. 그렇다고 감동적인 장면이 펼쳐지는 건 아니었다. 건너편에 아기자기한 섬도, 마구 뻗어나가고 싶을 만큼 너른 수평선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황갈색 속살을 드러내는 갯벌과 흐리멍텅한 물이 뒤섞여 촌스러운 자태를 드러낼 뿐. 그 위로 매일 어김없이 나왔다 지는 태양이 지겨웠다. 또 하루를 버텨야 하는 게 버거웠다.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생을 마감할만큼의 의지가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모든 게 귀찮고 힘에 부쳤다. 그럼에도 차를 가지고 나온 건 또다시 지난번과 같은 사고가 터지면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옅은 바람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직접적인 이유는 혜린이었다.


혜린은 성실하게 뜨고 지는 태양만큼이나 부지런히 우리 집을 드나들었다. 여전히 줄지 않은 반찬통을 비우고 다시 채웠다. 조금씩 변형된 잔소리를 던지고 창문을 열어젖혔다. 아주 가끔 그 등살에 못 이겨 식탁 앞에 앉기도 했지만 대부분 나는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쓰고 혜린을 등져누웠다. 어느 날 혜린은 별 말 없이 그런 내 이불 속으로 들어와 옆에 가만히 누웠다. 어린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사월도에 이사온 이후 거의 모든 일상은 혜린과 함께였다. 같이 학교에 가고 함께 점심을 먹고 나란히 집으로 돌아왔다. 단조로운 일상에서 우린 날마다 사사로운 사건을 만들어냈다. 하루는 급식 메뉴를, 다른 날엔 연예인 소식을, 또 어떤 날엔 학교 선생님이나 반 애들에 관한 루머를 꺼내 한없이 늘리고 자르고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는 동안 분노하고 비웃고 때때로 안타까워하거나 환호했다. 수시로 변하고 튀어 오르는 감정 속에서 중요한 건 같은 마음을 공유한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미끄러지면 혜린도 다이빙했고, 혜린이 뛰어오르면 나도 덩달아 점프했다. 품은 마음에 격차가 생긴 건 입시를 목전에 앞둔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혜린은 돌연 대학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나는 깜짝 놀랐지만 혜린은 오랫동안 품고 다닌 봉투에서 꺼낸 말처럼 단정하고 간결하게 뱉었다.


“어차피 대학 가서 하고 싶은 공부도 없어. 여기 남아서 일할 거야.”

“여기서? 나랑 같이 서울 가기로 했잖아. 이 촌구석에서 대체 뭘 할 건데?”


혜린이 뭐라고 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웅얼거리던 혜린의 얼굴만 선명할 뿐. 나는 뛰쳐나왔다. 그게 교실이었는지, 운동장이었는지, 우리 집이었는지, 그저 읍내 길 어딘가였는지 흐릿하지만 분명한 건 그날부터 혜린이 조금 달라졌다는 사실이었다. 정말 혜린에게 변화가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내 친구 혜린은 조금 다른 질감과 느낌, 향기를 가졌다. 그렇다고 혜린과 크게 다투거나 연락을 끊은 건 아니었다. 졸업식날 가장 많은 사진을 함께 찍었고, 사월도에 내려올 때마다 종종 만났다. 하지만 줄곧 나는 혜린이 무엇을 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대체 무슨 속셈인이 궁금했다. 오랜만에 혜린의 SNS계정에 들어갔다. 그 사건 이후로 한 번도 접속하지 않았던 터라 조금 생소하게 느껴졌다. 혜린의 프로필 소개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적혀 있었다.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어느 보통날’이 내가 기억하는 혜린네 가게 마지막 상호명이었다. 처음은 ‘우리 부동산’이었다. 가끔 혜린 부모님이 자리를 비울 때면 혜린과 함께 믹스 커피를 뽑아 들고 소파에 등을 잔뜩 젖혀 앉곤 했다. 그 푹신함과 쌉쌀한 달콤함이 어른의 맛이라 착각하며. 희미한 동경을 품던 공간 한쪽에 혜린은 제 이름 석자가 박힌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붙였고, ‘우리 공인중개사무소’라는 새롭지 않은 새 간판을 내걸었다. 더 이상 어른의 맛이 필요 없던 나는 그곳을 들락거리지 않았고 대신 엄마를 통해 간간이 소식을 들었다. 이제 거길 가면 믹스 커피가 아니라 블랙커피를 주더라, 무슨 봉지 과자 같은 걸 주더니 직접 뭘 만들어서 주는 것 같더라, 이제 혜린 아빠는 거의 나오지도 않더라, 혜린이가 손이 야무지더라 혼자 부동산 실내를 다 바꾼 거 같더라…… 혜린에게도 근황을 들었다. 살롱 같은 걸 하고 싶다고.


“예전에 유럽에서 예술가들이 모여서 자유롭게 대화도 하고 토론하고 하고 그랬다며.”

“유럽? 언젠 고향이 좋다더니 완전 사대주의자였네.”

“참나, 너는 무슨 국어 선생이라는 게 낭만이 없냐.”

“야, 아직 국어 선생 되려면 멀었거든. 졸업 하고 임용고사도 봐야하고…… 지겹다 진짜. 너는 어떻게 계속 자격증을 따냐?”


혜린과의 대화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주제를 벗어나는 단어, 가시 없이 찔러대는 무의미한 말, 결국 마침표 대신 술잔을 부딪히며 맺는 문장들. 그게 좋았다. 아무 생각 없이 흘러나오는 대로 뱉고 던지는 말을 그저 동그랗게 받아내는 혜린이. 나 역시 혜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에 품기보다 한쪽으로 흘려보냈다.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혜린은 대학을 쉽게 포기했고, 갑자기 공인중개사 시험을 보더니 뜬금없이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고 제과제빵 공부를 하겠다고 선언했기에. 한없이 가벼운 존재, 그게 혜린이었다. 무엇이든 쉽게 싫증내고 변덕을 부리는 혜린이 유일하게 끊임없이 한 건 연애였다. 물론 그것도 상대는 금세 바뀌었지만. 대체 살롱 따윌 만들어서 뭘 할 거냐는 질문에 혜린은 말했다.


“연애 장소를 만드는 거지! 이 촌구석에 청년들이 없잖냐. 나는 여기에 있는데 님이 없으니 어쩌겠어. 괜찮은 놈들은 이리로 끌어오는 수밖에!”


혜린다웠다. 그 살롱에서 무엇을 하는지 몰랐지만 낮에는 음료와 디저트를 저녁에는 주류와 약간의 안주를 판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엄마에게 들었다. 그곳의 이름이 ‘어느 보통날’이었다.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보통날이라는 단어에 이미 ‘여느’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데 중복되는 거 아닌가. 새로운 명칭도 조금 이상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니. 단 SNS계정에는 어메니티도 보였다. 숙박 공간으로 진화한 건가. 임용고사 준비를 하고, 좌절하고, 포기하고, 직장을 구하고, 또 좌절하고, 적응하는 동안 혜린과의 만남은 더욱 줄었다. 가끔 연락을 주고받긴 했지만 저녁 늦게서야 확인한 메시지나 부재중 전화에 답을 미루다 잠에 들어버렸고, 적기를 놓친 회신은 갈 곳을 잃고 증발해 버렸다. 어쩌면 내가 알던 혜린과 혜린이 알던 나도 함께 사라져버렸는지도 몰랐다.


> 생각해 봤어?


영 낯선 피드의 사진들 사이로 메시지가 끼어들었다. 혜린이었다. 며칠 전 혜린은 학교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살롱보다 더 황당했다. 교육의 ‘교’자도 모르는 네가 무슨 학교냐는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올 뻔했지만 꾹 참았다. 침묵을 단순한 궁금증으로 받아들였는지 혜린은 설명을 덧붙였다. 거창한 건 아니고 그냥 살롱의 확장판이라 생각하면 된다고. 누구든지 원하는 걸 가르치고 누구든 와서 배워도 된다고.


“아무나 교사가 된다는 거야?”

“응. 누구나.”


기가 막혔다. 누군가를 가르치려면 가르치려는 내용에 대한 전문성은 기본이거니와 가르치는 방식에 대한 전문성도 갖춰야 한다. 원데이가 아니라면 체계적인 커리큘럼을 짜는 데도 전문성이 필요하고, 배우는 대상에 대한 이해도 요구된다. 그런데 아무나 가르친다고? 교사는 뭐 아무나 하는 줄 아나. 학교가 그렇게 뚝딱 만들어지는 줄 아나. 그냥 각자 알고 있는 걸 서로 나눠주면 된다는 혜린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어른이 되어도 배울 게 많지만 정작 제대로 가르쳐 주는 곳이 없지 않느냐고, 아이들이 배우고 싶거나 배워야 할 건 학교에서 안 알려주지 않느냐는 혜린이 가소로웠다. 내게 부탁한 디카시와 한국어 수업은 전공과 무관한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꼭 맞는 것도 아니었다.


같은 옷을 입은 아이들이 횡단보도 위로 쏟아져 나왔다. 체크무늬 카라가 달린 짙은 남색 티셔츠. 생활복을 입은 무리가 보였다. 차 앞유리에도, 차창으로도, 사이드 미러와 백미러에도 가득 찼다. 갑자기 등으로 식은땀이 흘렀다. 앉아 있는데도 다리가 후들거렸다. 낯선 남색 무리들이 차창에 보닛에 차지붕에 바짝 다가와 나를 쳐다보는 것만 같았다. 겨우 차를 갓길에 세우고 호흡을 골랐다.


후, 후, 후우- 후우- 후우---------

호흡을 뱉을수록 기억이 올라왔다. 어쩌면 갑자기 종료된 계약이 정교사의 이른 복직 때문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무엇이든 진실을 알고 싶지 않았다. 도망치듯 빠르게 달렸다. 혜린으로부터 또다른 메시지가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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