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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걸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by 정담아

혜린이 말갛게 웃어 보였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사실은 다 알고 있었으면서. 자신을 피해 달아나느라 집 밖으로 나갔다는 것도, 자신이 대납한 차 수리비를 갚기 위해서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일 거란 것도. 내가 끝까지 버텼다면 혜린은 갑자기 뒷목과 허리를 부여잡고 교통사고와 치료비를 운운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인을 상대로 디카시를 가르치는 줄 알았더니 정작 노인이라 부를만한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혜린은 엄마가 맡았던 수업은 노인복지센터에서 진행했고, 이건 그것과 별개로 여기서 시작하는 프로그램이라고 설명하며 찡긋 웃었다. 그러니까 엄마 이야기는 미끼였던 셈이다. 살짝 구겨진 내 표정을 보고 혜린은 다정하게 팔짱을 끼며 덧붙였다.


“그래도 이게 페이는 더 세. 내가 지원사업 따 둔 게 있거든.”

“지원사업?”

“응. 여기가 인구소멸지역이잖아. 사월도의 '사'가 죽을 '사'된 지 오래됐다니까. 아무튼 잘 부탁해요, 선생님.”


프로그램을 기다리는 사람은 총 5명이었다. 진행하기에 적당한 숫자였지만 딱 봐도 참여자 특성이 제 각각이었다.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는 동안 혜린이 입을 열었다.


“아직 한 분이 안 오시긴 했는데… 시간이 됐으니 일단 시작할까요?”


사람들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혜린이 나를 소개했다. 진짜 어렵게 모신 분이다, 제 초중고 동창이자 베프다, 얼마 전까지 중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같은 말을 내뱉었다. 혜린의 입에서 쏟아져 나온 문장들을 하나씩 들췄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혜린과 같은 학교 졸업앨범을 갖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졸업앨범에서 내 사진은 전부 오려 내버렸지만. 딱히 위치를 지정해주지 않았던 단체 사진에선 얼굴을 오려낼 때마다 옆에 있던 혜린의 턱이나 머리카락이 조금씩 잘려나갔던 걸 떠올려보면 가장 가까웠던 사이가 맞긴 했던 것 같다. 그런데 학기 도중에 학교를 그만둔 교사라는 정보를 흘리는 걸 보면 지금은 가까운 사이가 아닐지도 모른다. 하긴. 그게 이상하게 비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를 수도 있지. 아니, 그건 그만큼의 관심이 부족하다는 의미다. 아니, 어쩌면 다 알고 있지만 지금 여기에서 혜린에게 필요한 정보만 선별해서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린 진실이 가장 중요한 나이를 지나버렸으니까. 때론 진실을 가리는 사실을 꺼내드는 영리함을 배운 어른이니까.


“강진아입니다. 만나 뵈어 반갑습니다.”


짧은 인사를 마치자 어르신 한 분이 박수를 쳤다. 아주 크게. 혜린이 따라 손뼉을 치며 말을 받았다. 요즘은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는 시대 아니냐고, 우리도 작가가 되어보자고. 혜린의 말이 맞았다. 누구나,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시대. 작가도, 선생도, 부자도. 의욕만 있으면, 능력만 있으면, 노력만 하면 누구나 뭐든 될 수 있다는 그 말을 믿었다. 열심히 하면 서울에서 직장을 구하고 발 뻗고 누울 자리 하나쯤 구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 믿음을 품은 자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가지지 못한 꿈 앞에서 탓할 수 있는 대상은 단 하나, 자신 뿐이었다. 누구나 뭐든 될 수 있는 시대에서 꿈에 가닿지 못한 이유는 나였다. 차라리 애초에 꿈을 꿀 수 있는 것도 자격이 있다고, 주어진 크기 그 안에서만 마음껏 펼치라고 말을 해주었다면 나았을 텐데. 그럼 나 대신 내 몫의 비좁은 땅덩이를 원망할 수 있었을 텐데. 거짓된 희망이 더 큰 절망을 준다는 사실을 혜린은 정말 모르는 걸까. 왜 자꾸 허황된 꿈을 입에 담는 걸까.


“아유 정말 좋은 세상이다 증말.”


가장 크게 손뼉을 쳤던 어르신이 또다시 손을 마주치며 대꾸했다. 자신은 어렸을 때부터 시인이 꿈이었는데 먹고사는 일이 바빠서 시는커녕 연필을 쥐어보기도 힘들었다고 말했다. 과거를 지나온 어른들의 빤한 레퍼토리가 흘러나오자 시작도 전에 진이 빠졌다. 8회 차 수업 내내 저런 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혜린은 노련하게 말을 끊었다.


“그러니까요. 특히나 디카시는 누구나 쓰기 좋은 장르잖아요. 문학을 매개로 일상을 나누고 소통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고 싶었어요.”


혜린의 말이 길어질수록 초조해졌다. 수업 목표나 의미, 진행 방식 같은 건 강사가 설명해야 하는데, 본인이 다 해버리면 대체 나는 무슨 말을 하라는 걸까. 아무리 학교에 소속되어 있고 주어진 교육과정 안에서 움직이지만 적어도 수업만큼은 온전히 내 권한으로 가지고 있던 학교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혜린이 짜놓은 판에 선 장기짝 같달까. 그게 조금 거슬렸지만 사실이기도 했다. 언제나 나는 그랬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다르고 싶었다. 혜린이 세운 커다란 설계에 관심조차 갖지 않기로 했다. 그저 혜린이 부탁한 이 강좌를 진행하고 돈만 벌면 그만이었다.


“그럼 저희 각자 자기소개랑 프로그램 신청 이유, 기대하는 점을 간단히 말해볼까요? 아, 그리고 저희는 나이랑 상관없이 전부 경어를 사용하고 있어요. 그러니 서로 호구 조사할 필요도 당연히 없겠죠?”


혜린의 말에 한 여자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옆에 앉은 남자아이를 바라봤다. 아이는 별 동요 없이 그저 테이블 위 한 점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파동을 눈치챈 건지 혜린은 환한 미소를 띠며 ‘양해 부탁드린다’고 덧붙이더니 얼른 남은 의자 하나를 차지하고 앉았다. 어설프게 핸들을 넘겨받은 나는, 참여자를 살피며 눈을 마주쳤다. 이럴 때는 가장 우호적인 시선을 찾는 게 가장 중요한 법. 가장 큰 박수 소리를 냈던 어르신을 바라보았다.


“나, 아니 저부터 할까요? 나는 정례예요. 정례. 별칭은… 그냥 정례로 할게요.”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우렁찬 소리로 말했다. 간간이 은빛이 눈에 띌 뿐 대부분 까맣게 빛나는 짧고 꼬불대니는 머리카락을 보면 엄마 나이쯤 될까 싶다가 짙고 쭈굴쭈굴한 피부를 보면 엄마보다 많을 것 같았다. 그 옆에 앉은 다른 사람들도 둘러봤다. 나도 모르게 자꾸만 그들이 태어난 해를, 자라고 생활한 지역을 상상했다. 전부 혜린이 묻지 말라는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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