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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걸음,

사람들

by 정담아

디카시는 처음이었다. 검색을 해보니 반려문학, 일상문학, 생활문학 같은 단어가 나왔다. 하지만 아무리 뜯어봐도 내가 아는 문학이라는 카테고리 안에 넣기는 꺼려졌다. 문학은 언어로 표현한 예술이고, 예술은 쉽게 닿을 수 없을 만큼 높은 경지에 이른 대상 아닌가. 디카시는 SNS에 올라온 짧은 글에 가까워 보였다. 문학이란 단어를 붙일 수 없었기에, 결국 내가 사람들에게 내놓은 결론은 한 문장이었다.


“마음을 들여다보고 기록한다고 생각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참여자들의 소개가 끝나고 나름의 고민을 정리한 내용을 꺼냈다. 간단하게 정리하기까지 쉽지만은 않았다. 그동안의 학교 수업은 어쨌든 주어진 목표(입시)와 내용(교과서)이 분명했으니까. 망망대해 같은 주제와 나만 덩그러니 마주 앉은 건 처음이었다. 고민 끝에 일상 속에 스며드는 예술 정도로 커다란 흐름을 잡았다. 생존과의 사투를 잠시 멈추고 자신을, 삶의 방식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그러다 보면 삶에 대한 성찰을 하게 될 것이고, 통찰력이 길러지겠지? 어쩌면 그게 혜린이 말한 '누구나 작가가 된다'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들을 토대로 디카시 수업의 목표를 설정했다.


1. 참여자들이 자신의 감정을 마주하고 구체적인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다.

2.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객관화하는 동시에 감정의 정화를 경험한다.

3. 문학의 효용을 직접 감각함으로써 문학에 대한 심리적 장벽을 낮춘다.


물론 수업 시간에 이런 내용까지 구구절절 설명하지는 않았다. 그저 미리 뽑아온 문장과 사진을 매칭해서 감각을 깨웠다. 문장을 보이자 한국 전쟁이 시작된 해에 태어났다는 정례는 돋보기를 꺼내 들었고, 베트남 남부 메콩강 지역 출신인 투이는 번역 앱을 열었다. 아이가 중학생이 되기 전에 자연과 함께 뛰어놀 시간을 마련해주고 싶어 아들과 잠시 이주했다는 유정은 디카시 따위보다는 옆에 앉은 제 아이에 관심이 많은 듯했다. 유정의 입을 통해 이름을 알게 된 준영은 엄마가 쥐어 주는 문장 카드에 별 흥미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만 옆으로 저을 뿐이었다. 어느새 손에 티팟을 들고 온 혜린은 컵에 차를 채우며 ‘진아가 정말 준비를 많이 해오신 것 같다’며 괜스레 말을 얹었다. 갑작스럽게 호명된 내 이름에 멈칫했다. 주로 쌤이나 선생님이란 단어와 나란히 불린 이름이었다. 때로는 생략이 되기도 했던 이름이 날 것 그대로 불리자 낯설게 느껴졌다. 마치 세상에 나온 그대로의 모습을 마주한 것만 같달까. 아무것도 붙지 않은 순수한 이름만으로 불려본 게 언제였더라. 우린 서로를 그런 날것의 이름으로 호명하기로 했다. 실은 별다른 별칭을 짓기가 어려워 닿은 결론이었다.


처음 제시한 사진은 차창에 매달린 빗방울이었다. 혼자 차를 끌고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갔던 날이었나, 아니면 근처 사찰에 갔던 날이었을지도 몰랐다. 확실한 건 자꾸 집에 드나드는 혜린을 피해 혼자 운전을 하며 사월도를 돌았고, 맑던 하늘이 갑자기 짙은 구름으로 덮이더니 폭우가 퍼부었다는 것. 그저 빈 공간에 차를 대고 가만히 빗소리를 들었다. 무서울 정도로 빗방울이 차체를 세차게 때렸지만 나를 향해 돌진하는 소나기를 막아주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후두두두두두두두둑- 소리가 거칠어질수록 이상하게 마음이 편했다. 차문 틈새로 밀려오는 찬 공기에 몸을 움츠리는 것도 좋았다. 차가운 밖이 아니라 포근한 안에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줘서. 그리고 창에 매달린 빗방울을 보며 생각했다. 힘들면 그냥… 떨어져도 돼. 딸랑-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사진 속 시간에 있던 나는 현실로 돌아왔다.


“야, 송혜민! 지금 몇 시야?”


헤린이 벌떡 일어나 말했다. 입술을 최대한 움직이지 않은 채 복화술을 활용했지만 우리 모두 그 내용을 알 수 있었다. 다만 출입문도, 두 자매도 내 뒤쪽에 있어서 혜민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혜린의 늦둥이 동생인 혜민이 아직 오지 않았다던 참여자였다. 교복을 입은 앳된 혜민이 나를 향해 90도로 깍듯이 인사를 하는 순간, 나는 들었다. 또르륵- 사진 속 창문에 매달린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똑, 똑똑, 뚝뚝, 툭툭, 후둑, 후두둑, 후두두두두둑 후두두두두두두두둑

한 방울이 아니었다. 걷잡을 수 없는 빗줄기가 마구 쏟아 내렸다. 더 이상 차창에 매달리지 못하고 떨어진 빗방울에, 숨어있던 물줄기까지 나를 향해 돌진했고, 금세 물이 차올랐다. 발목 위를 첨벙거리던 빗물은 종아리로, 무릎, 허벅지로 올라왔지만 꼼짝할 수 없었다. 당장 도망쳐야 하는데, 하는 생각과 달아나봤자 나를 쫓아올 거라는 생각 사이에 끼어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목까지 차오르자 숨이 턱 막혔다. 헉헉, 가쁜 숨을 몰아쉬는 나를 깨운 건 혜린이었다.


“진아야, 강진아! 너, 괜찮아?”

“어? 어. 네. 그럼요. 저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혜린이 건네준 손수건을 건네받을 때야 깨달았다. 내가 이마에도, 등줄기에도 또르르- 땀방울이 흐르고 있었음을. 하지만 괜찮았다. 언제나처럼, 나는 괜찮았다. 수건을 꼭 쥐었다. 나를 둘러싼 모든 수분을 꼭 쥐어짜듯. 사진과 함께 적었던 문장을 빠르게 읽고, 애써 조금 갠 표정으로 창과 문을 열며 말했다. 지금부터 주변을 둘러보며 마음에 드는 장면을 찍어 보라고. 그게 뭐든 상관없다고. 한 시간 정도 천천히 산책하며 나만의 시선으로 장면을 담아보라고. 저마다 휴대폰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혜린을 제외한 5개의 작은 점이 희미해질 때쯤 의자에 주저앉았다. 찬 공기가 살갗을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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