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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걸음,

정례

by 정담아

낯선 길이었다. 도시인에게는 그저 다 같은 시골일지 몰라도 엄연히 다른 길이었다. 엄마와 내가 자리한 곳은 사월도의 중심인 시내였다. 그런데 이곳은 사월읍에서 차로 30분가량 떨어진 마을이었다. 프랜차이즈는커녕 편의점 하나 보이지 않았다. 푸른 하늘과 연둣빛 논과 밭이 단조롭게 이어지는 가운데 단층집들만 색감을 더할 뿐이었다. 갈림길 앞에서 내비게이션과 시름하느라 잠시 멈춰 서면 개나 닭 울음이 들려왔다. 예상시간보다 일찍 나온 덕분에 겨우 제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주류 회사 마크가 박힌 앞치마를 둘러멘 정례가 보였다. 두 번째 수업은 그의 집에서 열기로 했다. 정례의 집에서 제철 음식을 함께 해 먹고, 그 감각과 장면을 활용해 디카시를 써보자는 거였다. 혜린의 제안이었다. 어쩌면 배려였을지도 몰랐다.


“너 무슨 일 있는 거지?”


첫 번째 시간을 마치고 혜린이 나를 불러 세웠다. 별일 없다고 해도 혜린은 곧이듣지 않았다. 내가 무언가를 털어내지 않으면 보내지 않기로 작정한 것처럼. 그런 혜린을 뿌리치고 집으로 왔지만 소용없었다. 상대는 우리 집을 제 집처럼 드나드는 혜린 아니던가. 절대 굽히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마주 앉은 혜린을 보며 생각했다. 어쩌면 혜린 같은 사람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고. 괜찮다는 내 거짓말을 집요하게 잡고 늘어지는 누군가가 말이다. 그곳에서는 내게 아무도 묻지 않았다. 아니, 묻긴 했지만 실은 질문이 아니었다. 내가 괜찮은지 궁금한 게 아니라 괜찮아야 한다는 압박이었다. 괜찮지 않다면 그 또한 무능이고, 나약함이었다. 나는 무능했지만 그걸 숨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뭐해요, 안 따고?”


앞치마를 두른 정례가 능숙한 손놀림으로 초록풀을 뚝뚝 뜯어 손에 쥐더니 나를 힐끔 바라봤다. 그는 대문 앞 텃밭에서 분주하게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일단 밭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서 내가 알아볼 수 있는 건 상추뿐이었다. 그나마도 직접 따본 적은 없었다. 그저 집 텃밭에서 올라온 걸 보았을 뿐. 우물쭈물하는 내게 정례는 ‘그냥 먹고 싶은 걸 따면 된다’는 모호한 설명을 던졌다. 차라리 명확한 가이드를 제시하는 게 편한데. 결국 정례의 손짓을 따라 했다. 그가 손대는 작물을 매만지고 그가 움직이는 모양대로 자세를 옮겼다. 손 끝에 느껴지는 감촉이 달랐다. 뻣뻣하고 야무지거나 촉촉하고 부드러운 감각. 두 가지의 상반된 촉감이 교차한다기보다 조금씩 변수를 달리 한 다채로움이 신경을 스쳤다. 색도 조금씩 달랐다. 물에 녹아버릴 것만 같은 연둣빛부터 짙은 녹색까지. 붉은빛이 감도는 초록도 눈에 들어왔다. 단조롭다고 생각했던 건 착각이었다. 중간중간 높이 솟은 꽃잎도 보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빛깔이었다. 이번엔 새빨간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버석한 정례의 손바닥 위에 놓인 붉은빛엔 유독 생기가 어렸다. 정례의 권유로 입 속에 넣은 열매는 무르고 달았다. 짧게 혀에 닿는 쌉쌀하고 새콤한 맛을 단물이 금방 씻어냈다. 내 세계에 처음 등장한 맛이자 이름이었다.


마당은 복잡하고도 정갈했다. 한 구석에 자리한 닭장에서는 소란이 일었다. 비닐하우스 안에서 날갯짓을 하며 공중으로 비상하는 닭이라니. 금세 떨어지긴 했지만 닭의 펼쳐진 날개는 처음이었다. 닭장 밖도 소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이것저것 가리키며 설명하는 정례와 정례의 말을 받아 아들 준영에게 또다시 전하는 유정의 목소리, 주말까지 이런 걸로 불러낸다고 구시렁대는 동생 혜민에게 용돈으로 딜을 하며 ‘닥치라’는 혜린의 읊조림, 종종 투이가 가동하는 번역 어플에서 튀어나오는 단어들까지. 오랜만에 듣는 소음이었다.


메뉴는 감자밥과 된장국, 샐러드였다. 정확한 레시피 대신 정례가 지휘하는 대로 움직였다. 나와 혜린은 감자를 깎고 잘랐고, 유정은 된장국에 들어갈 애호박과 양파, 두부 따위를 썰었다. 준영과 혜민은 샐러드용 채소를 따고 씻는 역할을 맡았다. 정례는 쌀을 씻고 안치고 채수를 준비하고 소소 따위를 만들었다.


“저 이거 드라마에서 봤어요! 아니, 영환가? 암튼! 실제로 첨 봐요!”


놀랍게도 정례 부엌에는 아담한 가마솥이 있었다. 정례가 허리를 구부려 서 있던 바닥 일부를 들어 올리자 혜민의 고개가 따라 올라갔다. 준영도. 겨울이 되면 거기에 불을 땐다고 했다.


“저희 오늘 여기에 밥 해 먹어요?”


정례가 대답 대신 압력밥솥을 가리키자 혜민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정례는 ‘이 여름에 불 때면 쪄 죽는다’고 구시렁거리더니 주섬주섬 받침대를 꺼내 펼쳤다. 그 위에 솥뚜껑을 뒤집어 올리고 캠핑용 버너를 꺼내왔다. 혜민은 재빠르게 휴대폰을 꺼내 촬영 모드에 돌입했다. 그러든지 말든지 정례는 감자를 가늘게 채 썰고 튀김가루를 섞어 달궈진 가마솥뚜껑 위에 올렸다. 지글지글 고소한 소리가 퍼지자 혜민은 손뼉을 쳤고 미동 없던 준영도 몸을 움찔거렸다. 신나는 재잘거림 사이로 구수하게 익어가는 밥 냄새가 스몄다.


포슬포슬한 감자가 아낌없이 들어간 밥에 양념장을 넣고 비볐다. 별다른 반찬이 필요 없었지만 정례가 꺼내놓은 김치와 멸치볶음, 이름 모를 나물을 외면할 수 없었다. 예의상 집어 먹었을 뿐인데 계속 젓가락이 향했다. 바삭한 감자채전도 구수한 된장국도 한없이 들어갔다.


“어머, 너 괜찮니?”


유정이 준영의 빈 그릇을 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준영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전을 집어 먹었고, 정례는 보기 좋다며 빈 공기를 채워주었다. 유정은 민망한 듯 변명처럼 덧붙였다. 원래 이렇게 먹는 애가 아닌데 이상하다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배가 자꾸 차오르는데 이상하게 속이 편했다.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이렇게 여러 사람과 둘러앉아 식사를 한 것도, 내 몸을 채우기 위해 이렇게 바지런하게 움직인 것도, 오랫동안 음식을 씹으며 맛을 음미한 것도.


집에 돌아가는 길에 정례는 작은 꾸러미를 하나씩 주었다. 상추, 고추, 가지, 감자가 조금씩 들려 있었다. 정례가 꽃보다 아름답다고 했던 알록달록한 열매들. 혼자 사는 나와 투이에게는 한 보따리씩 더 쥐어주었다. 김치와 갖가지 밑반찬이 소복이 들어 있었다. 정례가 수업시간에 쓴 디카시가 떠올랐다. 밥솥에 투박하게 들어 있는 감자밥 사진이었다. 예쁜 구석이라고 찾아볼 수 없는 수더분한 사진에 정례가 붙인 문장은 '예쁘다'였다. 뒤에 덧붙인 말은 '내 새끼 살 찌우는 보물'이라고 했던가. 해맑은 정례의 발표를 들으며 생각했다. 그걸 먹은 건 당신 새끼가 아니라 우리였는데, 참 쉽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무나 제 새끼라고 말하는 당신. 조수석에 보따리를 밀어 넣으며 중얼거렸다. 오지랖도 참 풍년이네.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었다. 주책맞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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