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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걸음,

투이

by 정담아

가장자리가 풀어헤쳐진 짙은 구름이 펼쳐져있다. 투명에 닿지 않은 울퉁불퉁한 하양. 오라기 사이로 스미는 노르스름한 주홍. 그 아래 눈과 얼음 사이의 바다. 앞쪽에 제 멋대로 펼쳐진 눈 섞인 모래 위에는 모자를 뒤집어쓴 두툼한 롱패딩 실루엣이 발을 딛고 서 있다. 꽁꽁 얼어붙은 추위 사이로 작은 빛이 아스라이 떠오른다. 서늘함 사이로 비치는 따스함 한 줄기가 닿을 듯하다.


투이가 말하지 않았다면 꼭 극지방처럼 보인 그곳은 사월도의 해변이었다. 수업을 시작하고 나서 이런저런 사진을 찍긴 했지만 이것보다 마음에 드는 사진은 없다고 했다. 정확히 말하면 그 사진은 투이의 시선이라기보다 정례의 시선이었다. 굳이 찾자면 모자에 붙은 털에 반쯤 가려진,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우는 것 같기도 한 알 수 없는 표정이 투이의 것이었다.


“잠깐만요!”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꽂혔다. 놀란 건 그들만은 아니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목소리에 나도 놀랐다. 투이의 시선을 듣기 전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듣고 싶었다. 그새 사람들의 마음이 궁금해진 건지, 내가 알던 것과 다른 사월도의 모습에 괜스레 감정이 동한 건지, 아니면 그저 조금 나은 수업을 하고 싶은 건지 조금 헷갈렸다. 아마 마지막 이유에 가장 가까울 거라 생각했다. 하나의 풍경을 두고 서로 다른 문장을 떠올린다면 조금 더 풍성하고 재밌는 수업이 될 수 있을 테니까. 혜린과 정례는 좋은 생각이라며 고개를 끄덕였고 다른 이들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어정쩡한 표정을 보내왔다. 어쩔 수 없었다. 이럴 때는 진행자가 자연스럽게 밀어붙이는 수밖에.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이 떠오르는 감정을 문장으로 끄적이면 된다고, 잘 풀리지 않으면 언제든지 도움을 요청해도 된다고 덧붙이는 동안 투이가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이번에도 혜린의 작품인가 싶었는데, 은빛 드리퍼와 로부스타 원두였다. 베트남 커피에 익숙해졌기에 그리 생소한 물건은 아니었지만 그걸 ‘핀’이라 부른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준영과 혜민은 신기한지 촘촘하게 난 작은 구멍을 들여다봤고 정례는 꼭 찜기 바닥에 난 구멍 같다고 말했다.


은빛 모자를 쓴 투명한 유리잔에 똑똑똑, 다갈색 물방울이 천천히 떨어졌다. 묵직하고 진한 커피 향이 은은하게 퍼졌다. 마치 모래시계처럼 시간을 똑똑똑 떨어뜨리는 동안 우리는 투이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 베트남에서 투이는 주로 이 드리퍼로 직접 커피를 내려마셨다고 했다. 그럼 베트남 사람들도 블랙커피를 좋아하는 거냐고 묻자 투이는 카페 쓰어다를 좋아한다고 답했다.


“쓰다고?”

“아니요. 달아요. 믹스 커피 비슷해요. 근데 연유 넣어요. 맛있어요.”


투이는 컵에 연유를 넣고 그 위에 추출한 커피를 부은 뒤 마지막으로 얼음을 가득 채웠다.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커피 맛을 보는 동안 투이는 새로 커피를 추출했다. 이번에는 에그커피를 만들 거라고 했다.


“윽 커피에 계란을 넣는다고요? 왜 커피에 그런 짓을 해요?”


혜민이 잔뜩 찡그린 얼굴로 되물었다.


“베트남이 프랑스 식민지였을 때…”

“베트남이 프랑스 식민지였어요? 우리가 일본 식민지였던 거처럼?”


혜민을 향해 투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반미, 알아요? 프랑스 바게트에 베트남 거 넣은 거. 반미, 바케트에서 온 거예요. 이름.”


혜민은 놀랍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사실을 향한 신기함인지 투이를 향한 경탄인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는 사월도에도 맛있는 반미 샌드위치 가게가 있다고 말했다. 다음에 거기 같이 가서 먹어보자고, 진짜 베트남 반미랑 맛이 차이가 있는지도 설명해 달라고도 덧붙였다. 반짝이는 혜민의 눈을 보며 혜린은 아예 다음에 '그럼에도 불구하고'에서 만들어 먹자고, 반미 샌드위치를 직접 만들어서 피크닉을 가도 좋겠다며 아이디어를 던졌다.


한껏 뛰어다니는 두 자매의 목소리 속에서 투이는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달걀을 손에 쥐었다. 껍질을 톡톡 부딪혀 깨뜨린 계란의 노른자를 분리한 뒤 연유를 넣고 핸드블렌더로 거품을 만들었다. 위이이잉- 소란과 함께 부풀어 오른 크림을 짙은 블랙커피에 얹으며 말했다. 식민지 당시 비싼 우유 대신 계란을 커피에 섞었다고. 우리가 모르는 걸 알고 있는 투이. 하지만 투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른다. 아마 그가 알고 있는 수많은 걸 우리는 모른 채 그를 판단할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투이를 그렇게 판단했고, 타인에게 그렇게 판단당했다. 그들은 내게 설명할 기회를 주지 않았고 내 노력과 능력을 보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저 그들이 세워놓은 기준에 닿지 않으면 무능력자로 낙인찍을 뿐이었다. 나의 언어는 그들에게 닿지 않았고, 그들의 언어를 해석하기 위해 나는 고군분투했지만 결국 난 그들의 세계에서 쫓겨났다. 입이 썼다. 투이가 내민 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 혀 끝에 달콤한 부드러움이 감겼다. 각자의 달콤함을 입안에 머금고, 각자의 시선으로 투이의 사진을 바라봤다.


곧 지나간다, 겨울도.

그곳에 같이 갈 친구가 있다. 함께면 따뜻하다.

저 위를 걸으면 물에 빠질까?

가지 못했다. 내가 놓친 순간이 얼마나 많을까?

춥다 미치도록 춥다.


사람들이 각자 적어낸 쪽지를 랜덤으로 뽑아 돌아가면서 읽었다. 익명성에 기댄 문장이 소리로 나올 때마다 미세하게 변하는 표정과 툭툭 던지는 사적인 이야기로 누구의 것인지 가늠해 보았다. 오랜만이었다, 자연스럽게 누군가의 마음이 궁금해진 건. 그의 추위와 내가 겪는 추위는 비슷할까. 그 사람이 놓친 계절과 장면은 무엇이었을까. 우리가 지나는 겨울은 어디쯤일까. 초입일까? 아니면 한겨울일까? 극강의 한파라면 곧 봄으로 접어들 텐데. 그랬으면 좋겠다고,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희미하게 비치는 저 빛이 봄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차다. 춥다.

있다. 빛, 나, 친구


정례와 함께 갔던 해변에서 찍힌 사진 위에 투이가 쓴 짧은 단어들이 흩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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