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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걸음,

소풍

by 정담아

“사월도 문학도 어때요? 선생님이 말한 대로 리듬도 있고.”


별칭으로 정한 서로의 이름을 부르기로 했건만 정례는 계속 나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선생님. 내게 너무도 익숙한 이름이었다. 동시에 더는 듣고 싶지 않은 이름이기도 했다. 그 이름이 버거웠다. 그렇게 불려질 때마다 무언가를 내놓으라고, 문제를 해결하라고, 도덕적인 흠결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재촉하거나 압박하는 것만 같았다. 너는 선생님이니까, 하지만 이상하게 정례가 부르는 선생님은 정겨웠다. 정례가 부르는 선생님은 나보다 늦게 태어난 사람이지만 이 길은 나보다 앞서 나간 당신의 발걸음을 따르겠다는 존중이 실려 있었다. 위에서 눌러 내리거나 앞에서 잡아 끄는 것도, 뒤에서 졸졸 쫓아오는 것도 아닌 말. 그 부름이 싫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나도 모르는 사이 마음 한 구석에 무언가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손에 잡히지 않지만 따스한 온기가 스멀스멀 번지면서 분명한 욕망으로 뭉쳤다. 잘 해내고 싶다. 사람들이 드러낸 진심이 깨지지 않게, 차갑게 식지 않게 잘 보듬고 멋지게 엮어내고 싶었다. 온라인에 공간을 만들어 사람들의 작품을 모아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도 그런 이유였다. 정례나 투이는 가입을 할 수 있을지 걱정이 스치긴 했지만 잘 모른다면 오히려 잘 된 일일지도 몰랐다. 새로운 걸 하나 더 가르쳐줄 수 있으니까.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이름을 뭐로 하지? 우리에겐 ‘○○중학교 국어A’ 혹은 ‘□□중 2학년 3반’ 같은 명확한 이름이 없었다. 물론 그렇게 정체성 따윈 묻어나지 않는 이름을 갖고 싶지도 않았지만. 우리에게도 이름이 필요했다.


가장 신난 건 혜린과 정례였다. 물론 즐겁다고 해서 아이디어가 풍성한 건 아니었다. 정례가 말했던 ‘사월도 문학도’에 대해 ‘괜찮지만 조금 더 짧은 것도 생각해 보면 어떠냐’고 답했다. 혜린도 입에 좀 더 착 달라붙을 수 있는 게 있었으면 좋겠다고 혼자 이런저런 단어를 중얼거렸다.


“바닷말, 물결채, 흐름실, 푸른 말 모임… 이런 건 어때요?”


그새 챗GPT를 돌린 혜민이 휴대폰을 보며 말했다. 바다와 푸름에서 뻗어나가는 이름들. 챗GPT는 정말 전형적이구나. 촌스럽지만 그래서 정말 사월도에 걸맞았다. 혜민에게서 눈을 돌리면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선에 닿는 모든 풍경이 정말 푸르렀다. 풀밭과 하늘, 멀리 보이는 바다까지도. 푸르게 펼쳐진 초록 위에 아담하게 오른 회색 성벽과 하늘에 번진 구름만이 희게 보였지만 그마저 푸름과 한 세트처럼 느껴졌다. 전형적이게도.

프로그램 진행 장소를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이곳으로 택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와 조금 다른 장소에서 마주하면 새로운 감각을 깨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한 결정이었다. 참 그 생각마저 상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이 뻔한 풍경을 사람들이 어떻게 특별한 시선으로 담아낼지 기대감이 차오르기도 했다.


정례는 돈대를 찍었다. 오랜 시간을 견뎌낸 견고함, 울퉁불퉁하고 거친 피부 속에서도 결국 무너지지 않은 단단함이 좋다고 했다. 답답하게만 보였던 그 잿빛이 아늑하게 느껴졌다. 나를 보호해 줄 것만 같은 느낌. 혼자가 아니라는 기분.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투이는 멀리 보이는 바다 풍경을 골랐다. 그 바다를 쭉 따라가면 고향에 닿지 않을까, 이런 말을 할 줄 알았는데 투이의 마음은 과거가 아닌 현재에 머물러 있었다. 조수간만의 차가 큰 서해의 특징을 말했고, 썰물 때 드러나는 갯벌, 그때만 마주할 수 있는 곱고 부드러운 진흙과 그 안에 살고 있는 생명에 대해서도. 그리고 말했다. 지금처럼 물이 밀려와 그 모든 것들을 비밀로 만들어 버리는 게 좋다고. 보이지 않지만 나만 알고 있는 그 아름다움이 좋다고 했다. 글쎄. 나는 밀물 상태로 계속 있기를 바랄까. 아니면 바닥이 드러나기를 원할까. 나를 가리고 있던 모든 물이 빠져나가고 나면 사람들이 마주하는 그 장면이 진짜 진실일까. 나도 밀물 상태의 바다가 좋았다. 투이와 조금 다른 이유로.


준영은 하늘을 찍었다. 역시 푸르렀다. 하지만 준영이 주목한 건 새였다. 가까이서 보면 그리 작지 않았을 텐데 하늘에 찍힌 작은 점 같았다. 유정은 하늘을 찍고 있는 준영을 담았고, 혜린은 각자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는 우리 모두를 담았다. 따로 또 같이 보내는 시간과 푸른 배경이 더해져 왠지 고즈넉하면서도 희망찬 느낌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혜민이 보여준 사진은 반미 샌드위치였다. 투이가 시험 삼아 한번 만들어보았다며 한 조각씩 나누어 주었던 그것이었다. 혜민은 오늘 본 것 중에 가장 새롭고 좋았다며, 나머지는 전부 다 식상하다고 했다. 피식 웃음이 났다. 맞아, 나도 그랬지. 맨날 보는 바다, 어디서든 볼 수 있는 풀떼기들이 예쁘다는 걸 알지 못했지. 고요함이 주는 평온 따위도 알지 못했지. 시끄럽게 소리쳐대는 내 속만 바라봤으니까. 매일 쑥쑥 자라나는 내 팔과 다리, 부풀어 오르는 가슴과 엉덩이, 무언가 올랐다 들어가는 피부를 보기만도 바빴으니까. 사정없이 변화하는 십 대 소녀에 비하면 시골의 풍경은 너무도 지루했다.


“오늘은 다 같이 춤을 배워볼 거예요!”


혜민이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휴대폰에서 흐르던 작은 음악 소리가 블루투스 스피커를 통해 크게 퍼지기 시작했다. 높은 건물 없는 평지를 쫙쫙 뻗어 흘렀다. 어쩌다 보니 정례와 투이가 자신의 무언가를 내어주었고, 그게 제법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간을 이끄는 사람과 함께 하는 사람들의 시간이 공명하는 느낌이랄까. 적어도 내겐 그랬다. 그래서 디카시 발표와 함께 돌아가며 자신만의 무언가를 함께 나누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오늘은 헤민의 시간이었다. 그런데 댄스라니. 혜민이 학교에서 댄스 동아리라는 걸 처음 알았다. 잘 알지 못하는 아이돌 노래가 흘러나왔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다는 정례와 달리 투이는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혜민의 현란한 춤솜씨를 넋 놓고 보고 있는데 음악이 뚝 끊겼다.


“설마 이 춤을 배우는 건 아니죠? 제가 알기로는….”

“지금 제 기분을 표현한 거예요. 오늘 자기 기분을 몸으로 표현하는 거 하기로 했으니까요!”


혜민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혜린을 쏘아보며 말을 받았다. 혜민과 혜린이 투닥거리는 사이 정례가 벌떡 일어났다.


“춤이라면 나도 왕년에 에어로빅을 좀 했다고.”

“저희 엄마도 춤 잘 춰요! 사진도 있어요.”


모두의 시선이 준영과 유정에게 향했다. 처음 듣는 준영의 우렁찬 목소리도, 유정과 춤이라는 조합도 모두 놀라웠다. 유정은 별 말을 다한다며 준영을 가볍게 타박하더니 예전에 살짝 무용을 했지만 안 한지 너무 오래되었다고 손을 내저었다. 그러고 보니 크지 않은 키임에도 작아 보이지 않았던 건 유정의 긴 팔과 다리, 작은 얼굴 같은 비율 때문이었구나, 듣고 보니 정말 무용하는 사람의 걸음걸이와 자세인 것 같아, 혼자 작게 중얼거렸다. 무엇보다 유정의 몸짓은 우아했다. 손끝, 발끝 하나하나가 남달랐다. 멈추고 있는 순간에도 무언가 표현하는 듯했다. 유정은 말했다. 정지하고 있지만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고.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라고. 왠지 그의 말에 참방참방 물소리가 나는 것만 같았다. 고요히 있는 것 같지만 콸콸 쏟아져 나오는 눈물을 꾹 참기 위해 애쓰듯이. 나처럼 괜찮은 걸까? 처음에 유정에게 알 수 없는 동질감을 느꼈던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았다. 유정의 몸이 가볍게 떨렸다. 정지를 멈추고 휴대폰을 꺼내 보던 유정의 인상이 구겨졌다. 그를 둘러싸던 고요한 평화가 깨졌다.


유정의 휴대폰 화면 속엔 내가 있었다. 자유롭게 날던 나는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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