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나다의 궁전, 알함브라
스페인 여행 전 조언을 들었다. 그라나다를 간다면, 반드시 알함브라 궁전 입장권은 예매를 해야 한다고. 물론 나도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언제 그라나다에 도착할지 정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방법은 있었다. 조금의 효율성을 포기한다면. 알함브라 궁전 가이드 신청을 했다. 상대적으로 싸고 쉽게 구할 수 있는 상품을 골랐다. 그리하여 우리는 영어와 스페인어로 알함브라에 대한 안내를 듣게 되었다. 물론 공간만큼이나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 구성된 가이드의 설명은 커다란 궁전을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대신 친숙한 언어로 미리 수집해둔 잡다한 정보의 조각과 간간히 알아들은 영어 문장의 퍼즐들을 연결시켜 가며 나름의 알함브라를 완성해갔다.
알함브라에 들어서는 순간, 가장 먼저 다가오는 건 규모였다. 한국의 고궁을 귀요미로 만들어 버리는 웅장하고 장대한 크기에 압도되었다. '굳이 이렇게까지 클 필요가 있을까, 길을 잃어버릴 것 같은데.' 싶었지만 곧 '궁이 다 그렇지 뭐.'로 돌아섰다. 권력은 늘 크고 묵직함을 지향하는 법이니까. 다만, 알함브라는 문화권마다 기본 사이즈라는 게 다르다는 사실을 내게 각인시켜주었다.
규모와 관련하여 생애 처음 받은 충격은 캐나다에서였다. 나이아가라 폭포 앞에 선 내가 마주한 건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다. 눈앞에 펼쳐진 그것이 폭포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자고로 내게 폭포란 선녀가 몸을 씻던, 적당히 연약하고 적당히 힘찬 물줄기였다. 그러니까 핵심은 ‘적당히’였고, 그 ‘적당히’는 당시 내 눈앞에 놓인 폭포에 비하면 상당히 작은 규모였다. 내 상식 안에서 나이아가라 폭포는 전력 발생을 위해 인공적으로 만든 댐에 더 가까워 보였다. 그때 처음으로 느꼈다. 살아온 환경에 따라 크기에 대한 인식, 감각이 다를 수밖에 없음을.
아마 알함브라 궁전도 공간에 대해 나와 태생적으로 다른 감각을 가진 사람들이 만들어낸 결과일 것이며, 그 점이 내게 매우 매력으로 다가왔다. 궁 안을 천천히 걸었다. 그들이 나를 구분 짓는 건 또 있었다. 바로 창. 건물마다 크게 나 있는 창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얼핏 보면 창이라기 보단 그냥 반듯하고 큰 구멍에 가까웠다. 건물의 안과 밖을 가르는 그 어떤 이물질이 없었으니까. 내가 아는 창은 종이나 유리 같은 무언가가 정확히 경계를 지어 열고, 닫는 기능을 하는 존재였으니까.
또 한 번 내 인식을 벗어난 그 창 앞에 섰다. 창 안으로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다. 전체 풍경에 창만한 크기의 액자를 만들어 자연이 빚어낸 그림이 완성되었다. 게다가 그 그림은 살아 있어서 계절과 시간, 날씨에 따라 언제든 변했고, 내가 선 자리에 따라 들어오는 모습이 달랐다. 그 앞을 지난 뒤 돌아보면, 햇볕이 창을 타고 들어왔다. 그 볕은 자연의 온기와 빛을 건물 안으로 깊숙이 전해주었다. 건물 안에 있지만 밖과 분리되지 않았다. 자연을 건물 안으로 자연스럽게 끌어들이는 개방적인 공간의 탁월함이 놀라웠다.
물론 탁월함 뒤에 숨어 있는 슬픔도 걸렸다. 이 웅장함이 지배자가 바뀔 때마다 파괴되고, 다시 지어지고 덧붙여지는 세월을 거쳤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궁전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그곳을 호령하던 권력자가 알함브라를 뒤로 하고 떠나면서 한숨을 쉬고 돌아선 그 심정이 이해가 되면서도 그곳에 남아 또 다른 권력 휘하에서 핍박받았을 사람들의 한숨은 더 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에서 만났던 개방성과 다양성은 수많은 사람들의 발자취가 뒤엉켜 더욱 짙어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알함브라를 즐기는 또 다른 방법은 그곳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 안에 있을 때는 볼 수 없는 전경을 한눈에 보기 위해 우린 좀 더 멀고 높은 곳으로 향했다. 스페인 친구가 미리 귀띔해 주었던 카페로 갔다. 야외의 테이블에 자리 잡은 우리의 시선으로 알함브라가 들어왔다. 어쩌면 낮에 하나씩, 찬찬히 뜯어보았던 건물보다는 멀찍이 떨어져 바라보고 있는 그 모습이 진짜 알함브라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그 대상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항상 그 자리에, 그 모습으로 있는 존재를 때로는 이해하고, 때로는 오해하며 마음대로 만들어 버리는 건 언제나 나였던 건 아니었을까.
알함브라는 존재만으로 그 몫을 다하고 있었다. 우리가 그러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