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품은 사직서를 꺼내지 않기 위한 노력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사직서를 품고 산다. 이곳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만두고 싶어.’, ‘그만둘 거야.’ 따위의 말을 자주 입에 올린다. 물론 내가 교류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젊은 층이라는 걸 감안한다면 다른 연령대의 생각은 어떤지 모르겠다.(겉으로 보기엔 오래 버티기를 목표로 하는 사람들이 꽤 많아 보이지만) 놀라운 건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더 그런 말을 자주 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주어진 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딱 그 정도만 수행하는 사람이나 자신의 업무에 있어서도 미꾸라지처럼 묘기를 부리며 빠져나가려는 사람들은 ‘힘들다’, ‘일이 많다’라는 불평을 할 뿐 ‘그만둔다’라는 소리를 담지는 않는다. 처음에는 이게 너무 이상했지만 그 이유를 깨닫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물론 우리는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한다. 하지만 직업이나 직장을 선택할 때 연봉 하나만을 노동 조건으로 보지는 않는다. 얼마나 존중받고 일하는 지도 매우 중요한 요소다. 이를 테면, 나를 일하는 기계로 보는지 한 명의 인간으로 보는지, 언제든 갈아치울 수 있는 부속품으로 대하는 지 고유한 특성을 가진 인격체로 대하는 지, 합리적이고 공평한 조건으로 대우하는지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이곳을 떠나고 싶어 하는 이유는 다양했지만 대부분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없는 노동환경이나 불합리한 처우가 공통적인 요소였다. 나이 많은 게 유세인 이곳에, 젊고 유능한 젊은이들의 열정으로 굴러가는 이곳에 과연 미래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순수한 영혼들을 아프게 했다. 아무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지만 기본 업무 분장이나 추가적인 일의 분배, 사소한 잡일들의 담당 기준은 정해져 있었다. 가장 약한 곳으로 모든 게 흘렸다. 어리거나 신분이 불안한 사람들에게로. 그리하여 돈을 적게 벌수록 일을 많이 하는 구조가 안착되었고, 대부분은 이에 순응했다. 옳은 말 몇 마디 해봤자 버르장머리 없는 인간으로 찍히며 욕을 먹거나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전혀 좋지 않은 말로 타이름을 당해야 했으니까. 나 역시 그 거대한 흐름에 순응하고 있는 나약한 존재 중 하나였다.
과거는 억울했고, 미래는 보이지 않았으나 현재는 견뎌내야 하므로 우리에겐 소소한 즐거움이 필요했다. 윗선의 생각도 같았다는지 직원들 간의 소모임 만들기를 강압적으로 권했다. 어쩔 수 없이 공동체 의식이 전혀 없는 교원 공동체가 몇 개 만들어졌다. 하지만 우린 그런 서류상의 마음이 아닌 진짜 우정과 즐거움이 필요했다. 그래서 마음 맞는 동료들끼리 자주 회합을 했다. 안팎으로. 처음엔 새로 입문한 간식을 까먹으며 킥킥거리거나, 쌓여만 가는 일에 대한 자조적인 농담을 던지는 것으로 연대감을 만들어 갔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우리는 스트레스와 폭식으로 만들어낸 두터운 지방층들을 타파해보자는 생산적인 목표를 세웠다.
1년 중 360일 다이어트 얘기를 하지만 정작 한 번도 제대로 해 본 적 없던 나는, 풍부한 다이어트 경험을 가지고 있는 동료들 틈에서 이번에야 말로 성공 경험을 얻어 보겠다고 다짐했다. 식이요법이 핵심이라는 말에 1일 1식, 원푸드 다이어트, 간헐적 다이어트... 이것저것 찾아봤지만 먹기 위해 사는 내겐 모두 받아들일 수 없는 선택지였다. 시작 전에 벌써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하는 약한 마음이 밀려왔다. 건강하고 행복하자고 다이어트를 마음먹은 건데 벌써부터 불행하면 안 되지,라고 합리화 기제를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론을 지었다. 맛있는 다이어트식을 먹자!
가지 라자냐를 만들기로 했다. 얇게 썬 가지를 기름 없이 팬에 구운 뒤 나의 멤버들이 생일 선물로 보내준 꾸러미에서 비건 라구 소스를 꺼냈다. 내 입맛엔 단맛이 강한 듯하여 청양고추를 다져 넣고 섞어 주었다. 도시락통에 구운 가지와 소스를 겹겹이 쌓고 제일 위에 치즈를 얹은 채로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 두근두근, 다음날 렌지에 돌린 도시락을 부푼 마음으로 짜잔- 펼쳤으나 반응은 시큰둥했다.
“나는 오늘부터 선식 5일 프로젝트할 거야.”
“나는 헐리우드 48시간 샀어.”
“음. 그럼 나 혼자 먹어야지. 아싸!”
맛있는 걸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아쉬웠지만 그만큼 내가 다 먹어버리겠다는 전투적인 태도로 금세 전환했다. 그게 진짜 다이어트식이냐는 그들의 문제제기에 나는 탄수화물도 없고, 양도 적으니 괜찮다는, 근거 없는 논리로 화답한 뒤 한 입 베어 물었다.
밤사이 얇은 가지에 소스가 벤 덕에 훨씬 조화로운 맛을 느낄 수 있었다. 이미 소스의 일부가 되어 버린 듯한 가지의 연한 속살이 입에서 부드럽게 뭉그러졌다. 새콤달콤한 소스의 자극적인 맛이 쭈욱 늘어나는 치즈에 포근하게 덮여 은은하게 퍼졌고, 청양 고추의 매콤함이 이 모든 것을 깔끔하게 정리해주었다. 입 안에서 사라지는 게 아쉬워 빨라지는 속도와 그릇에서 사라지는 게 아쉬워서 멈칫하는 속도 사이에서 손길이 종종 멈칫했다. 최대한 천천히 씹으며 맛을 오래도록 입 안에 가두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도시락통은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아쉬웠다. 하지만 괜찮았다. 아쉬움은 기다림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니까. 그나저나, 내일은 뭐 먹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