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지만 선명한 직장 내 계급에서 완생을 꿈꾸며
미생.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 중 하나다. 당시 회사 생활을 깊이 경험한 적이 없음에도 매회 눈물을 흘리면서 봤던 건 저마다 자신의 삶을 이어나가겠다고 고군분투하는 인물들에 이입을 했기 때문이다. 물론 유독 마음이 쓰였던 건 주인공 장그래였다. 오랫동안 열정을 쏟았던 일을 그만두고, 취업 전선에 뛰어들고, 비정규직으로 애쓰는 그의 모습에서 내가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문득문득 미생 속의 그가 떠올랐는데, 그날 머릿속을 스친 건 드라마 속 인물이 아니라 물건이었다.
스팸과 식용유. 연휴를 맞이해 회사에서 직원에게 나누어준 선물이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그의 신분에 따라 선물의 종류가 결정됐다. 참 치사해서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드라마가 내 현실이 되었을 땐 참 치사해서 서글펐다. 물론 내가 일하는 직종은 비교적 신분에 따른 차별이 적은 편이다. 신분 상승, 계약 연장을 무기 삼아 일을 던져주고 충성심을 요구한다는 점이 다른 곳과 유사하지만 임금이 호봉에 따라 지급되기 때문에 큰 차이가 없다. 물론 성과급에 있어서 다른 기준이 적용되긴 하지만, 나보다 훨씬 더 적은 일을 한 사람들보다 훨씬 적은 성과급을 받으며 느끼는 분한 감정은 금방 휘발된다. 어쨌든 입금은 각자의 통장에 숫자로 은밀하게 찍히니까. 하지만 눈앞에서 펼쳐지는 명백한 차별의 상흔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 법, 그런 일이 일어났다.
조직 내에 상조회를 비롯한 여러 집단이 있다. 정기적으로 걷은 돈으로 구성원들의 개인사를 축하거나 위로할 때 쓰기도 하고, 비정기적으로 돈을 걷어 모은 돈을 전달하기도 한다. 그 ‘구성원’에서 나는 빠져있다. 내가 속할 수 없는 그룹이 또 있는데 여교사회다. 물론 굳이 수많은 구성원 중에서 ‘여자’인 ‘교사’만을 모아서 만든 구시대적 유물에 집어넣지 않음에 대한 감사한 마음도 있었지만 ‘여자’이자 ‘교사’ 임에도 불구하고 배제시킨 것에 대한 분함도 있었다. 그 소모임의 존재를 영원히 알지 못했다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그런데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내게 누군가가 물었다. 왜 여기 있느냐고. 그때까지도 나는 몰랐다. 그들만의 식사가 예약되어 있는지. 그제야 알았다. 왜 그 시간에 빈자리가 그렇게 많았는지.
그 외에도 보이지 않은 경계를 확인한 순간은 더 있었다. 조직 내에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했을 때였다. 모두를 한 자리에 모아놓고 이에 대해 이야기를 할 필요가 생긴 모양이었다. 하지만 ‘정'교사만 모이라고 했다. 한술 더 떠 이 안내가 교내 방송으로 흘러나왔다. 학생을 앞에 두고 지도를 하고 있던 '정'교사는 방송을 듣고 해당 장소로 빠르게 이동했고, 정교사가 아닌 교사는 그대로 아이를 지도했다. 그 아이는 알았을까. ‘정’교사와 ‘정’이 아닌 교사의 차이를. 남겨진 교사의 수치심을. 이 차별과 배제를 물려주고 싶지 않으면서도 물려줄 사람의 무력감과 미안함을. 또 하나의 불미스러운 사건은 그렇게 발생하고 있었다.
먹먹한 마음으로 도시락을 열었다. 비건 호밀빵과 두부 스프레드. 내가 사랑하는 먹는 즐거움을 위해 희생되는 존재가 최소화되기 바라는 마음으로 선택한 메뉴였다. 두부 반모에 올리브유, 레몬즙, 볶은 견과류를 넣고 갈았다. 처음에는 뻑뻑한 듯했지만 갈면 갈수록 크림치즈와 유사한 질감이 만들어졌다. 기본 두부 스프레드였다. 실험정신이 발동했다. 여기에 꿀을 조금 넣어 달달한 두부 스프레드를, 거기에 청양고추 다진 걸 추가해 매콤 두부 스프레드까지 만들었다. 담백한 빵 위에 달달 두부 스프레드를 발라 크게 한 입 물었다. 묵직하지만 텁텁하지 않았다. 고소하게 씹히는 견과류가 재미를 더했다. 나머지 반쪽엔 매콤한 맛을 펼쳤다. 달콤 매콤함이 차례로 입 안에서 터지다가 한데 모아졌다. 맛있었다. 든든했다.
company는 com(함께)과 panis(빵)이란 단어가 합쳐진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즉, 빵을 함께 먹는 사이, 식사를 함께 하는 관계가 동료라는 것이다. 그곳의 모두가 빵을 함께 먹고 싶진 않지만 함께 나누고픈 동료가 내게도 분명 있다. 맛별로 담아온 통을 R에게 건넸다. 가벼워진 가방의 무게만큼 마음이 차올랐다. 훈훈했다.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