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없는 교육 현장에서 쌓인 붉은 독소를 누그러뜨리는 초록의 맛
모의고사 평가회가 있는 날이었다. 바꿔 말하면 각 학년 주요 과목 및 담임 교사들이 관리자인 교장, 교감에게 불려가서 자기 반성과 계획을 읊는 날이랄까. 시간은 점심 시간. 하아- 그럼 대체 언제 회의하고 5교시 수업에 들어가라는거지? 역시 자기중심적 사고 능력은 수준급이다. 시간이 빠듯했기에 대충 점심을 때우기로 했다. 물론 간단히 먹으면서도 이런 기분을 보상할 만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준비했다. 얼마 전에 만들어 두었던 여름의 스프레드, 완두콩 후무스를.
이번에 새로 주문한 통밀빵과 초록 후무스, 카누로 만든 라떼가 그날의 메뉴였다. 비록 컴퓨터 앞에서 마우스를 움직이며 먹는 간이식이었지만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홀로 맞이하는 순간은 그나마 평온했다. 아침에 구워 온 탓에 바삭함은 없었지만 나름 촉촉한 감이 남아있는 갈색 빵에 초록초록한 후무스를 얹으니 책상이 작은 텃밭으로 변한 것 같았다. 혼자 키득대며 입 안에 여름을 가득 담고 오물거렸다. 그날의 짧은 행복은 거기까지였다.
평가회가 시작되었고, 이미 제출한 자료에 적힌 모의고사 성적 분석 결과를 브리핑을 했다. 아니, 글을 못 읽으시나 문서로 작성한 걸 왜 굳이 읽어서 발표하라는 거야, 라는 불만이 밀려왔지만 그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모의고사 평가회’라는 명분을 달고 있지만 분석 대상은 오직 상위 20명의 성적이었다. 불만이 슬픔으로 번져갔다. 나 역시 아이들 앞에서 입시와 성적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아이들의 일상을 들여다보며 생활습관을 가르치고, 성공경험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고 스스로 합리화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그 자리는 정말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아프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학생이라는 상품을 어떻게 높은 가격으로 시장에 내놓을까를 고민하고 있음을. 진학률이라는 목적을 위해 유의미한 양질의 상품에만 신경을 쓰고 있음을. 교육이란 글자가 존재할 자리 따윈 없음을. 불편했다. 불편하면서도 문제제기 하지 못하는 내 자신이 가장 불편했다. 그 불편함은 마지막 교장의 말에서 꽃을 피웠다.
학교 홍보에서 가장 중요한 건 역시 서울대 입학을 몇 명 했는가다. (그러니 서울대를 보내라.)
힘든 부분 있으면 언제든 말해라. 지원해주겠다. (그러니 서울대를 보내라.)
항상 건강 조심하시고 힘내셔라. (그래서 서울대를 보내라.)
음. 그렇게 간절하면 간절한 분이 직접 해 보세요.
하루 치사량 이상의 분노가 쌓인 날은 독소 배출이 필요한 법. 그러기 위해 완두콩 후무스를 좀 더 만들 작정이었다. 선명한 여름의 색을 온 몸으로 뿜어내는 작은 알들을 씻어서 냄비에 넣고 삶았다. 초록빛이 물에도 묻어나왔다. 김이 올라오는 뜨거운 여름의 물을 버리고 완두콩을 건져내어 올리브 오일과 참깨, 레몬즙, 소금, 큐민 가루를 넣고 갈았다. 뻑뻑했다. 오일을 넣고 또 넣었지만 역시 부드러운 질감은커녕 잘 갈리지도 않았다. 삶은 물을 남겨두었다가 같이 넣고 갈을 걸.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이번 후무스는 뻑뻑한 질감을 특징으로 하는, 묵직하고 든든한 컨셉으로 가자. 스푼으로 퍼서 그릇에 옮겨 담을 때도 고집스럽게 제자리를 지키려 드는 탓에 조금 애를 먹긴 했지만 맛은 그럭저럭 먹을 만했다. 그래, 맛만 있음 되지 뭐, 모양이 별 건가. 스스로를 달래며 크게 한 스푼 입에 넣었다. 고소한 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잘 갈리진 않았지만 푹 삶은 콩이 걸리지 않고 부드럽게 입 안에서 움직였다. 푸른 후무스가 붉은 독소를 누그러뜨렸다. 다행이다. 금방 잠들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