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도시, 락 08화

단순하고 깊은 맛, 옥수수와 감자채전

뜨거운 분노를 식혀준 여름의 선물

by 정담아

중간고사 성적표를 출력하고 있을 때 메시지가 날아왔다. 기말고사 원안 제출 날짜를 알리는 내용이었다. 중간고사 출제에 대한 긴장이 이제 막 끝나려는데 기말고사 출제라니 끔찍했다. 수시 때문에 내신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출제 오류 근절과 적정 난이도 조절이라는 두 난제 사이에 끼여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담당 과목이 여러 개인 나는 여러 과목을 출제해야 했다. 게다가 한 과목은 온전히 단독 출제. 나머지는 함께 들어가는 동료가 있었지만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는 n반 중에 한 반만 들어가니까 1/n만 내면 되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마무리된 대화, 아니 통보였다. 수행평가, 온라인 수업에서 무임승차를 하는 마당에 시험 문제 출제에서도 쉬운 길을 잽싸게 고르는 모양새가 아주 얄미웠다. 게다가 시험문제 편집은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이유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암묵적인 이곳의 질서, 즉 어린 사람이 당연히 더 해야하는 법칙 탓이었다. 그까짓 거 내가 좀 하고 말지 싶다가도 불합리하고 불공평한 게 당연한 걸로 인식되는 이 상황에 화가 났다. 아래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위에서 온 몸을 눌러 내리는 피로감 사이에 짓이겨질 때쯤 메시지가 또 날아왔다. 경시대회 문제를 출제하라는 거였다. 하아.


“체력이 좋으신가 봐요.”

‘워커홀릭이신가 봐요.’에 이은 명문이었다. 신경을 건드리는 문장들의 끝은 어디일까. 그제야 왜 이곳의 사람들은 얼굴을 마주하기만 하면 찌푸리는지, 마주하는 시간이 조금이라도 길어지면 바로 ‘힘들다’, ‘일이 많다’를 주문처럼 외면서 징징대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야만 하는 곳이었다. ‘나 힘듦’을 얼굴에 크게 써 붙이고 다녀야 ‘아, 일이 많구나.’를 인지하는 곳. 그래서 다들 울상이거나 죽상이거나 투정을 입에 달고 사는 곳.


남들이 알아주는 게 뭐 중요한가 싶었다.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 신념대로 일하면 되지. 나와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학생이나 동료에게만 인정받을 정도로 진짜 실력과 소신만 갖추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나에 대한 평판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나에 대한 타인의 인식에 따라 나를 대하는 방식이 달라짐을 뒤늦게 깨달았기에. 내가 일이 없거나 일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면 나에게 일을 많이 주었다. 내가 사람 좋게 웃어 보이면 일을 많이 주었다. 피곤함을 애써 감추고 씩씩하게 여기 번쩍 저기 번쩍 뛰어다니며 감당할 수 없는 일을 해내면 일을 많이 주었다. 사실 처음엔 그것도 아무렇지 않았다. 그까짓 거 내가 하면 되지 뭐. 그런데 점점 깨달았다. 그 사소함이 쌓여 나를 호구로 만든다는 사실을. 가령, 이런 전화는 나에게 온다.


“우리 과에서 주문한 물건 왔다는데 경비실 같이 갈래?”

아니 왜 하필 나랑? 수많은 사람들 중에 왜 나야? 답은 빤하다. 제일 만만하니까. 나는 선의를 베푼 것일 뿐, 나를 함부로 대하라는 프리패스권을 준 건 아닌데. 괜스레 심통이 나서 바쁘다고 답했다. 나는 바빴으니까. 거절은 했지만 찜찜함은 남았고, 바쁨은 해소되지 않았으므로 짜증이 났다. 그래도 내가 선의를 가지고 대했던 사람이었는데 괜히 마음을 불편하게 한 건 아닌지 내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 하지만 물컹대는 마음을 이내 바로 잡았다. 그대의 호구 행렬에 내가 동참할 마음은 없으니까. 그럼에도 여전히 짜증이 났다. 기분이 나빴다. 치유가 필요했다.


짜잔. 그때였다. 여름의 풍요가 찾아온 건. 노르스름한 여름의 달큰함을 가방에서 꺼냈다. 초당옥수수가 대체인 요즘이지만 이건 강원도 찰옥옥수였다. 초당옥수수만큼 달지는 않지만 수더분한 매력이 있는 녀석이었다. 알맞게 밴 간 덕에 씹을 때마다 단맛과 짠맛이 옅게 묻어났다. 통통하게 오른 알알을 꼭꼭 씹었다. 잘 여문 알갱이들이 터질 때마다 입 안에서 펼쳐진 축제가 마무리될 때쯤 젓가락으로 감자채전을 찢었다. 감자요리 중에 내가 가장 사랑하는 메뉴. 감자전의 쫀득함보다는 감자채전의 바삭함을 좋아한다. 서양식으로 베이컨이나 치즈를 곁들여 먹어도 좋지만 나는 오직 순수하게 얇게 채 썬 감자만으로 부쳐낸 쪽을 선호한다. 여기에 매콤하게 청양 고추를 송송 썰어 넣은 양념장은 생명이다. 매콤 새콤 짭조름한 맛이 느끼함을 잡아주면서 노릇노릇 바삭바삭하게 구워진 요물을 끝도 없이 입으로 직행하게 만든다.


물론 한 가지가 더 필요하다. 맥주. 정말 딱 맥주가 생각나는 맛이다. 가끔 아니, 종종 하는 말이지만 솔직히 ‘퇴근 후 맥주 한 잔’ 보다는 ‘근무 중 맥주 한 잔’이 더 어울리지 않는가. (맥주보단 더 독한 술이 더 어울리긴 하지만 말이다.) 나의 상식을 되바라짐으로 만들어 버리는 상사의 지시나 도저히 말이 안 통하는 동료의 대우, 내가 꼰대인가에 대한 고민을 안겨주는 아이들을 마주할 때마다 냉장고를 보며 생각한다. 저 안을 맥주로 채워야 해. 이 생각을 몇몇의 동료들과 공유하긴 했지만, 우린 성실하고 모범적인 노동자이기에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퇴근 후 맥주 한 잔을 다짐하며 안주에 제격인 음식으로 노동의 힘듦을 위로했다.


온몸으로 받아낸 햇볕과 바람, 빗물들을 잘 쌓아두고 버무려 맺은 결실. 한 생명이 잘 키우고 지켜낸 에너지로 나를 두둑하게 채웠다. 그야말로 여름이 준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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