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의 정지학, 그리고 멋진 리더의 자질
같은 공간이라도 누구와 함께 하느냐 따라 전혀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 진리가 가장 빛나는 순간 중 하나는 바로 사무실. 위계에 따른 약간의 차이를 제외하면 대부분 고만고만한 크기의 책상과 의자를 배정받지만, 그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 묘한 차이가 있다. 도무지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 무채색의 사람이라도 본인만의 조각을 자리에 흘리기 마련이다. 자리 배치에서 조직 내 위치가 드러나고, 자리에 가져다 놓은 아이템에 각자의 취향이 묻어나며, 그 배열에 그날의 기분이 나타난다.
새로운 교무실에 배정되어 새로운 구성원들과 만난 그 해, 새롭게 장만한 아이템이 있었다. 바로 헤드폰. 에어팟이 대세였지만 반드시 헤드폰이어야 했다. 내게 헤드폰의 용도는 개인 스피커보다는 귀마개나 경고 사인 정도에 가까웠으니까. 제발 말 걸지 마시오, 정도의 메시지랄까. 근무시간에 사적 영역을 꺼내 들며 시끄럽게 떠드는 무리에 섞이고 싶지 않을 때면 조용히 헤드폰을 장착했다. 물론 그건 내 사생활에 다가오지 말라는 메시지였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내 뒤에서 조심히 인기척을 한 건. 부장님이 종이 한 장을 쭈뼛거리며 슬쩍 내미셨다.
재계약 평가 심사표였다. 내년 재계약 때 이 기준으로 평가하니 참고하라는 것이었다. 잠시 고민이 되었다. 이건 평가받는 사람에 대한 예의이자 배려인 것인가. 아니면 재계약 가능성을 기억하고 알아서 잘 기라는 소리인가. 아마도 후자에 가까울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문득 그해 초 변경되어 다시 도장을 찍어야 했던 계약서도 떠올랐다. 영문도 모른 채 메시지 하나만 달랑 날아왔다. 계약서 변경 부분 있으니 와서 가져라고. 변경 항목은 계약의 해지 부분이었다. 계약해지 사유에서 ‘기타 계약서에 의한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지 않는 경우’는 ‘직무의 내외를 불문하고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경우’로 더 모호해졌으며, ‘정규교원 충원 시 계약기간 중이라도 계약해지가 가능’하다는 새로운 조항도 포함되었다. 굳이 공식적 언어로 길게 쓰지 않아도 우리는 ‘을’은 알아 들었다. ‘갑’이 빈정 상하면 언제든 나가라는 뜻임을. 그 의미를 알아챈 을이 먼저 비위가 상했다.
누가 누굴 평가해? 내 전공에 대해서, 업무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툭하면 우리한테 묻고 떠넘기는 사람들이 우리를 평가한다니. 게다가 내가 어떻게 일하고 있는지 잘 모르잖아? 평판으로 아는 건가. 그래서 평판을 위해 작은 일을 부풀리거나, 입김이 센 사람들의 관리를 잘하거나, 생색내기 좋은 일만 골라서 하는 사람이 생기는 건가. 뭐 그게 사회성이라고 하다면 할 말은 없겠지만 사회성이 현격히 떨어지는 내가 봤을 땐 참 조직을 비효율적으로 만드는 짓으로 느껴졌다. 특히, 그런 마인드로 구성원을 대하고 관리하는 게, 내가 그런 대접을 받고 있는 게 너무도 싫었다. 그때 내게 재계약 평사 심사표를 건네주던 부장님의 주저하는 몸짓과 부끄러워하는 표정, 미안해하는 말투가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 그랬던가. 리더 중의 최고는 똑똑하고 게으른 리더라고. 구성원의 직무와 능력을 파악하고 있으나 그들을 닦달하지 않고 믿고 기다려주며 백업해주는 사람, 그게 진짜 훌륭한 리더라고. 물론 진가를 알아보기 전, 나는 그가 그저 게으른 리더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불필요한 일엔 적당한 무심함을 내비치고, 약한 자리에 있는 사람을 위해 슬쩍 방패막이 되어주며, 위를 향해 배 째라며 배짱을 부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위아래로 구부러질 줄 아는 유연함이, 그 속에서 나오는 여유와 유머가 좋았다. 그가 보인 태도에 그나마 단단히 뭉친 설움이 조금 풀렸지만 여전히 따뜻하고 달달한 위로가 필요했다.
단호박 스프를 만들었다. 단맛을 위해 채 썬 양파가 투명함을 너머 갈색이 될 때까지 달달달 볶았다. 거기에 찐 단호박을 넣고 냉장고에 뒹굴고 있던 찐 고구마도 잘라 넣었다. 조금 더 볶은 뒤에 두유를 넣고 갈았다. 드르르르륵. 대충 후루룩 간 재료들을 좀 더 바글바글 끓여냈다. 굴러다니는 치즈가 있어서 소금 대신 아주 조금 갈아 넣어보았다.
양파, 단호박, 고구마가 품고 있던 단맛을 전부 뿜어내었다. 설탕 없이 달달한 스프가 완성되었다. 소박하지만 근사했고, 달달하지만 묵직했다. 꾸밈없고 쉬우면서 따뜻하고 속이 편했다. 분명 화려하진 않지만, 그래서 특별하게 생각나진 않지만 위로가 되는 맛이었다. 무엇보다 다른 것들과 잘 어울리는 게 매력. 아침에 팬에 구운 호밀빵을 스프에 찍어 먹었다. 제 역할을 하면서 다른 이의 존재를 침범하지 않았다. 튀지 않지만 은은하고 묵직한 그 맛이 참, 멋지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