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도시, 락 10화

찬바람이 불어올 땐, 홍합 토마토 스튜

비정규직에게 불어오는 찬바람의 계절 나기

by 정담아

딱히 가을을 타는 편은 아니다. 그럼에도 유독 그해 가을은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낙엽과 얼마 매달려 있지 않은 나뭇잎들을 보면서 이유 모를 씁쓸함을 주던 가을이 떠나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 올해도 가는구나.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가을을 타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 아닐까. 소멸의 계절. 완전히 모든 게 사라지기 직전에, 사라져 가는 계절. 그와 함께 우리의 한 해도 사라져 감을 문득, 느끼게 되는 계절. 이 계절마다 우리 마음에도 서늘한 바람이 분다. 계약 종료 시점이 다가오고 새로운 직장을 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규직 채용을 내 건 곳에 지원서를 내기도 하고, 여러 단계에 걸친 시험에 응시하다 보면 주말은 그야말로 순삭. 가끔은 평일에 시험을 치르는 예의 없는 곳을 만나면 관리자에게 가서 사정을 말하고 관용을 부탁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나의 사생활은 공개되어버린다. 물론 격려와 훈수도 뒤따른다. W는 더 좋은 곳으로 가버리라고 했다. 너무 쿨한 거 아니니. 나 없는 점심시간, 조금 서운해하면 안 되니, 라고 말했지만 나에 대한 존중과 믿음이 묻어나는 그 반응에 고마웠다.


물론 다른 목소리도 있었다. 써준다고 하면 버티고, 자리가 나면 냉큼 기회를 잡아야 한다고. 더 좋은 자리로 갈 거 아니면 버티라고. 나는 되묻고 싶다. 대체 뭐가 기회이고, 뭐가 좋은 자리인지. 기회는 내가 만들고, 좋은 자리도 내가 선택하고 싶다. 갑들은 을을 뽑기 위해 여러 단계를 거치고 압박 면접이라 명목으로 초면부터 사적인 영역을 침범해오면서 을들이 갑을 탐색하고 고를 수 있다는 생각은 못하는 거지? '당신은 불합격입니다. 나, 을은 좀 더 괜찮은 다른 갑을 좀 알아보러 가야겠어요.'라고 속으로 빽 소리를 질렀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도 계약 기간까지 출근은 해야 했으므로, 일상은 지속되었다.


나를 위한 특별식을 만들고 싶었다. 따끈하고 시원한 국물 요리가 필요했다. 홍합을 사서 깨끗하게 손질했다. 올리브유를 두른 냄비에 양파와 마늘을 달달 볶다 홍합을 넣었다. 뜨거운 열기에 까맣게 닫힌 입이 금세 열렸다. 살짝 데친 뒤 숭덩숭덩 자른 토마토를 넣고 간을 맞추고 매운맛을 더했다. 별 재료 없이 먹음직스러운 색감을 뽐냈고, 시원하고 깊은 맛을 냈다. 성공적이었다.


허어- 하아- 뜨거워서 한 번, 매워서 두 번. 연거푸 소리를 내며 후룩후룩 국물을 마시고, 미리 껍데기를 떼어 놓은 홍합의 부드러운 속살을 건져 먹었다. 별 수고 없이 입 안에서 뭉개지는 음식이 고마웠다. 쌀쌀함과 쓸쓸함 사이에서 방황하는 속을 따스하게 채워주는 식사가 감사했다. 하하호호 시답지 않은 대화를 나누며 도시락을 나누는 동료가 소중했다. 남은 절반의 노동을 이어나갈 수 있게 에너지를 채워주는 순간이 귀했다. 째깍째깍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고 싶었다. 멈추고 싶었던 것이 그날의 점심시간이었는지, 그저 내게 주어진 어떤 날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노랗고 빨갛게 물든 가을 풍경처럼 아름다운 그 장면에서 우린 단단하게 여문 그 계절의 열매를 알차게 각자의 몸 안에 채워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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