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후쿠오카에 놀러갔다가 유학중이던 남사친 A에게서 뜻밖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함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나왔는데 A는 문득 망설이는 표정을 지으며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왜? 뭐 두고 나왔어?”
의아해서 묻자 A가 심각한 표정이 되어 말했다.
“사실은 내 이상형이 저기에 앉아있어.”
그 말에 살짝 놀랐다. 나는 이야기에 빠져 주변을 살피지 못했는데, 얘는 언제 그렇게 스캔을 했던 것인가. 얼마나 예쁜 여자일까, 궁금하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얼른 가서 말을 걸어보라고 했다. 외롭게 유학중이던 그에게 이 만남이 잘된다면 좋을 것 같았다. 현실에서 이런 멜로드라마를 직접 보게 되는구나, 싶어 흥미롭기도 했다. 계속 그를 격려하고 부추기며 카페로 돌아갈 것을 종용했다. 함께 있었던 A의 친구도 A의 등을 떠밀었다. 그녀를 데리고만 나오면 어떻게든 도와주겠노라고. 그러나 내 남사친은 발자국으로 원만 수십 개 그려냈을 뿐 끝내 카페로 되돌아가지 못했다. 몇 번이나 큰 숨을 들이마셨다고 내쉬었다가 했음에도 말이다. 남자라고 해서 여성에게 고백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라는 걸 그때 알았다.
사실 내 남사친이 카페의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고 해도 잘 되었을 거란 보장은 없었다. 단칼에 거절당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제나 해보지 못한 일에 대한 아쉬움으로 그 일이 떠오른다. 그냥 ‘인상 좋으시네요!’라고 한 마디 던졌으면 어땠을까. 연락처만이라도 건넸더라면? 발개진 표정을 그대로 보였어도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순수한 남자가 다 있었네? 하고 호감을 샀을지도. 인연은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그 친구와 달리 나는 내성적이고 사교성이 없는 주제에도 좋아하는 이성에겐 꼭 다가갔었다. 물론 거절당한 기억이 더 많았다. 심지어 완곡한 거절은 못 알아들어 명확한 거부의 말을 듣고 나서야 단념을 했다. 하지만 그것이 부끄럽지는 않았다. 그렇게 시도하지 않았다면 두고두고 ‘진짜 그 남자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하는 미망에 사로잡혀 있었을 테니까. 이것은 중학교 시절 사회과목을 맡았던 조덕희 선생님의 영향이다. 롱스커트의 주머니에 한 손을 넣고 비스듬히 선 채 그분은 꽤 자주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여자라고 왜 가만히 기다려야 해요? 난 내가 좋아하는 남자, 내가 선택할 거예요!”
여자는 남자들의 선택을 기다려야 한다는 풍조가 강했던 시대였다. 그래서 그 선생님의 주장이 더욱 인상적이었고 그래서 내 삶의 신조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여성이 먼저 다가가 성공한 경우를 목격하기도 했다. 직장 야유회에서 새로 들어온 여사원과 대화를 하고 있을 때였다. 입은 나에게 말을 하고 있는데 그녀의 시선은 계속 다른 남자 신입 사원에게로 향했다. 첫눈에 반한 사랑이란 이런 것이다, 라고 그녀는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혹시 저 남자가 맘에 드는 거냐고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분홍빛 열기로 활활 타오르고 있던 그녀는 마침내 게임에서 그 남자 직원과 함께 벌칙을 받게 되었다. 섹시 댄스를 추어야만 했다. 쭈뼛거리고 있던 그 남자 직원과 달리 그녀는 당당하게 춤을 보여주었다. 상대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과연 그녀가 그런 춤을 추었을까. 좋아하는 남자와 눈을 맞추며 자신의 가장 멋진 모습을 어필하던 그녀의 당당함은 누가 봐도 매력적이었다. 훗날 그들은 실제로 커플이 되었다.
먼저 다가가는 것의 장점은 또 있다. 흔히 남녀사이에는 밀당이 중요하다고 한다. 이 말에서 대부분의 여성들은 밀어내기를 떠올린다. 하지만 매력만점의 여성이 아닌 이상 가만히 있는데 이성이 다가오는 일은 흔치 않다. 그런 상황에서 먼저 다가와준 사람을 어떻게 밀어내나? 좀 미안하지 않은가? 웬만하면 참고 이해하고 그가 하자는 대로 따르게 된다. 아무 노력도 안 한 나에게 와주었으니까! 하지만 먼저 다가가본 사람은 그런 부채의식이 없다. 다가갔다가 후퇴하면 그게 바로 밀어내기가 된다. 다가갈 상대를 선택하기에 앞서 그 사람에 대한 관찰과 판단을 일찌감치 끝냈기 때문에 미련이나 아쉬움도 상대적으로 적다. 즉 먼저 다가갈 수 있어야 먼저 멀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관계의 주도권을 선점한 셈이다.
마냥 기다리면서 감이 떨어지기만 기다린 사람에게는 모든 인연이 우연이거나 불운이다. 하지만 다가갈 각오를 하고 사는 사람에게 인연은 과학이고 분석이고 철학으로 발전한다. 결과가 나쁘더라도 ‘아, 세상엔 이런 유형의 사람도 있구나’ 하고 배울 수 있다. 데이터는 축적되어 적어도 자신이 어떤 사람과 어울리고 또 어떤 사람과는 안 어울리는지 정도는 파악할 수 있다. 수동적으로만 지내면서 세상을 알고 사람을 알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물론 내 사랑하는 조카들과 후배들에겐 이렇게 조언하고 싶다.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그래도 트럭처럼 돌진하지는 말라’고 . ‘가능하다면 세단처럼 우아하게 달려가라!’고. 그게 조금은 더 세련되어 보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