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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강 Jul 17. 2020

사심

진리와 정의는 사심 위에 있어요

영화나 드라마에서 눈에 띄는 남자 주인공은 크게 두 가지 스타일이다. 하나는 늘 웃는 얼굴에 성격과 인성도 너그럽고 인간적인 남자다.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여자 주인공에게는 특별히 더 지고지순하다. 당대 최고 인기의 미남 배우가 주로 그런 캐릭터를 맡는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와 전혀 반대인 캐릭터가 득세하고 있다. 그는 포커페이스로 여자 주인공에게 인사말도 건네지 않는다. 한마디로 모난 스타일이다. 이런 캐릭터가 남자 주인공인 경우, 로맨스는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기껏 관계가 진전되어봐야 ‘한때 잘 지낸 지인’ 정도에서 끝난다. 

신부님이 주인공이던 <열혈사제>는 사제라는 직업상 어쩔 수 없었지만, 미혼의 검사가 주인공이던 <비밀의 숲>이나 역시 싱글의 프로야구 선수단 단장이 주인공이던 <스토브리그> 역시 연애 사건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도 드라마는 성공했다. 차가운 가슴, 더 나아가 독불장군과도 같은 주인공인데도 오히려 대중의 공감과 지지를 얻은 이유는 뭘까. 그들은 비록 오해와 공격을 받더라도 끝까지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면서 모든 사건에 ‘사심’을 개입시키지 않는다. 자신에게 호의적이라고 약해지거나, 악의적이라고 배척하지 않는다. 그냥 모두에게 똑같이 거리를 둔다. 평소엔 좋은 사람이다가도 가족의 일, 친구의 일, 지인의 일 앞에서는 무너져버리는 ‘평범한 악인’들이 있다. 믿었던 이런 이들에게 실망한 우리는 차라리 ‘뼛속 깊이 냉혈한이지만 확고한 주관을 가진 의인’에게 환호할 수밖에 없다. 연애라는 판타지보다 ‘정의 실현’이라는 판타지가 더 희귀하기 때문이다.      


사심은 ‘사사로운 마음’ 혹은 ‘자기 욕심을 채우려는 마음’으로 사전에 뜻이 올라 있다. 완전히 개인적인 일이라면 그 어떤 결정이든 자기 마음대로 해도 된다. 그러나 나 이외에 다른 사람이 한 명이라도 개입될 때엔 ‘혹시 이게 나에게만 이로운 게 아닌지, 내가 편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편의와 이득을 방해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 

사심이 있으면 본질에서 멀어지기 쉽다. 마음이 냉장고 속 아이스크림에 가 있는데 과외수업에 몰두할 수는 없다. 남자친구를 만나고 싶은데 손님을 응대해야 한다면 건성으로 불친절해진다. 공적인 일을 맡고 있다면 더욱더 사심 없는 결정과 진행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스스로 사내연애 금지를 다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한순간 사심을 버리지 못해 평생의 직장을 잃어버리는 경우도 우리는 매스컴을 통해 종종 본다. 

“어떻게 나한테 그래?”

“이 정도 편의도 못 봐줘?”

주변의 하소연 때문에 혹은 그에 앞서 능력의 과시를 위해 대의를 버린 대가는 크다. 이럴 바엔 그냥 평생 ‘고집불통의 벽창호’라는 별명으로 버티는 게 나을 텐데 말이다.      


사심 없이 냉정한 캐릭터로서 본받을 만한 역사 속 인물을 떠올린다면 이순신 장군이 연상된다. <칼의 노래> 저자인 김훈이 묘사하는 이순신 장군은 이렇다. 이순신의 부대에도 전투 중 도망가거나, 군량미를 빼돌리거나, 적과 내통하거나 부녀자를 강간하는 등의 죄를 저지르는 부하들이 있었다. 그런 그들의 목을 베거나 곤장을 때릴 때 이순신 장군은 어떠한 감정도 노출하지 않았다. 그냥 ‘목베었다’, ‘때렸다’, ‘가두었다’ 하는 식이다. 심지어 어느 날은 일기에 그날의 바다 날씨를 적다가 무심히 그날 부하 아무개를 잡아다가 베었다는 것을 적고, 다시 바다 물결에 대해 적는 것으로 마무리를 짓기도 했다. 이건 마치 ‘봄꽃이 활짝 피었다. 가로수가 모두 분홍색이다. 오늘 무단결근한 회사 직원을 해고했다. 미세먼지가 그리 심하지는 않았다.’ 하는 식으로 일기를 적는 사장의 느낌이다. 자기 말을 어긴 부하에 대해, 무단결근한 직원에 대해 인간적으로 분통을 터뜨리고 한탄하는 과정이 쏙 빠져 있다. 이순신 장군은 그저 있는 사실, 그리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거기에 정서나 감정을 이입했다면 상황이 더 나아졌을까. 아니다. 불필요하다. 바다의 물결에게 ‘왜 여기로 왔니?’ ‘이제 어디로 갈 거니?’ 물을 수는 없다. 그는 사람의 행위도 마치 바다의 물결 같은 자연 현상처럼 받아넘겼다. 그는 사람을 너무 사람으로 이해하려 드는 것을 경계했다. 그가 헤쳐나가야 할 진짜 현실과 지켜야 할 법도는 인간적인 감정 너머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말을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우리 편, 아니면 반대편으로 쉽게 가르는 우리의 눈에는 그저 놀랍기만 한 능력이지만 말이다.      


어떤 조직이나 모임에서도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이 모이다 보면 누군가는 반드시 자기만의 힘을 키워가려고 노력한다. 그룹을 짓고, 정치하고, 특정인을 따돌리기도 한다. 그러한 권력 경쟁을 차단할 수 있는 것은 그 안에서 그래도 사심을 품지 않는 이들의 단호함이다. 이순신 장군의 경지까지 갈 수는 없어도 그가 바라봤을 더 높고 넓은 세계를 우리 역시 밑에서라도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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