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만 멀리 보아요
2020년 초반부터 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에 전 사회적으로 거리 두기 캠페인이 벌어졌다. 사적인 모임부터 공적인 모임, 성당 미사, 교회 예배, 그 밖의 모든 그룹 행사가 중지되었다. 사스나 메르스도 겪었지만 이렇게 일상 전반이 완연히 방역 태세로 바뀐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이웃과 가까이, 가족과 가까이’를 강조하던 사회가 이젠 노골적으로 사람과 사람 간 서로 거리를 두고 떨어질 것을 강권하고 있다. 중요한 것들의 순서가 바뀌었고, 또 세상에 그렇게 절대적인 것도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렇게 거리 두기를 하게 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찌 보면 이것은 모든 사람이 살아가면서 한 번은 꼭 실행해봐야 했던 것을 사회 상황이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라고.
우리는 가끔 거리를 두어야 한다. 모든 것에 대해. 그리고 멀리서 보아야 한다. 다른 사람뿐만이 아니라 자기가 처한 현실에 대해서도 말이다. 타성에 젖어 우리는 나 자신, 내 가족, 내 나라만이 전부라는 좁은 시각, 근시안에 익숙해 있다. 하지만 조금만 거리를 두고 보면 그것만이 정답은 아니라는 것, 또 내 시각이 한쪽으로 살짝 비뚤어져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여행을 가는 것도 그저 편하게 멀고 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현실을 멀리서 보기 위함이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근시안이다. 10년 뒤를 생각하며 저축하기보다 오늘 본 신상 옷에 마음을 빼앗겨 구입 버튼을 누른다. 오늘 성공했으면 그 영광이 언제까지나 이어질 것이라 믿는다. 친구가 내게 실수하면 서운함에 곧바로 절교를 생각한다. 누군가 친절을 베풀면 곧 그는 내게 이로운 사람일 것이라고 믿는다.
최근 한 TV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는 60대 여성이 지속해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투자 명목의 돈을 받고 갚지 않은 사건이 소개되었다. 그녀가 그런 사기 행각을 지속할 수 있었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피해자 중 한 명이 항상 그녀 곁에서 수행기사 역할을 하면서 ‘자신도 돈을 빌려줬지만 이렇게 믿고 기다린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를 보면 피해자들은 그녀에게 더 재촉할 수가 없었다. 그럼 그는 왜 그랬을까. 자신이 빌려준 돈에 비하면 형편없는 액수지만 어쨌든 매달 월급 같은 돈을 사기꾼에게서 받았기 때문이다. 그 돈을 받으면서 언젠가는 상황이 바뀔 것이라 믿었다. 즉 당장 눈앞에 떨어지는 현금에 눈이 어두워져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의 피해까지 감수한 것이다.
등산을 하면 느낄 수 있다. 낮은 곳에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위로 올라감으로써 비로소 보인다는 것을. 또한, 커 보였던 것이 작아 보이고, 멀리 보였던 것이 가까워 보이고, 마침내 정상 가까운 곳에서 내려다보면 시각이 완전히 전복된다는 것을.
꼭 등산을 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서서히 근시안을 벗어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의 본능적인 면을 경계해야 한다. 나에게도 가장 힘든 일이지만 먹는 것에 대한 유혹, 신체적으로 편한 것을 추구하는 성향, 뭐 이 정도면 어때? 하는 짧은 생각들…. n번방 사건의 가담자들처럼 본능이 원하는 대로 가는 길엔 장밋빛이 아닌 잿빛 미래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선제적으로 미래에 닥칠 모든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 상황이 터진 후에 반응하는 것은 대개 부실하고 즉흥적일 수밖에 없다. 아직 거리가 있을 때 미리 대비하는 것이 훨씬 낫다. 이번 코로나19 사태에서 봤듯이 선진국이라고 자처하던 나라들의 바이러스 대처방식은 그야말로 근시안이었다. 만약의 사태를 먼저 예상하고 준비하고 있었던 우리나라가 특이해 보일 지경이다. 당장 이웃 대륙에서 터진 바이러스에 대해서 그리 태평했는데, 그들이 비교적 먼 미래에 해당하는 지구 온난화 문제, 인구 감소 문제, 자원 고갈 문제 등에 대해서는 어떻게 고민을 했던 걸까 싶다.
절망보다 희망이 있는 미래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결국 모두의 현명한 공존을 위한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 멀리 보며 당장 개인의 손해나 이익에 일희일비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씨앗을 심는 마음으로 타인에게 친절과 성의를 베풀고, 약간의 희생은 인생의 양념처럼 받아들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