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막글 발행

죽은 책과 산책

by 정하다


살다 보면 마음이 헐거워질 때가 옵니다.

헐렁해진 마음 공백에는 불안, 걱정, 우울, 체념, 반성, 후회 따위의 감정들이 스르르 밀려들죠.


그럴 때 저는 소복이 먼지 쌓인 책장을 뒤적거려 아무 책이나 집어 들고 읽어봅니다.

제법 효과가 있습니다.


아무렇게나 집어든 책을 읽다 보면 불안이 한층 잦아들고, 두세 번 반복하다 보면 헐렁해진 마음의 공백이 조금이나마 채워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또 살다 보면, 마음이 헐거워지는 것을 넘어 완전히 헐벗어질 때가 있습니다.

통제할 수 없는 환경과 사람들로 인해 진한 무력감이 찾아옵니다.


저는 이럴 때마다 평소 내팽겨처 놓았던 제 심연의 밑바닥을 구경하게 됩니다.


원망, 후회, 반성을 여러 번 반복하다 결국 절망과 자기혐오라는 바닥에 내려앉습니다.

여기에 다다르면 저는 두려움에 완벽하게 포위되어 버립니다.


끙끙 앓다가 그간 해온 대로 먼지 쌓인 책장을 다시 한번 뒤적거려 봅니다만

이번엔 쉽게 풀리지 않습니다.


글자는 읽히지 않고, 한숨만 자꾸 뱉어집니다.


이런 날 책은 종이더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죽은 책입니다.





오늘 새벽, 천근만근인 몸뚱이, 아니 마음덩이를 짊어지고 집을 나왔습니다.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아파트 단지를 따라 멍하니 걸었습니다.

걷다 쉬다, 한숨 한번 뱉고, 또다시 걷다 쉬다...


깜깜하던 세상이 푸르스름해지는 것을 봅니다.

아파트 단지에 붙어 있는 교회 십자가가 붉게 빛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하고 말씀하시자 빛이 나타났다"는 구절이 떠오릅니다.

하나님은 빛을 낮이라 부르고, 어두움을 밤이라 부르셨다는데 지금은 낮인가요? 밤인가요?

쓸데없는 말을 중얼거려 봤습니다.



4-50분쯤 걸었더니 허리 통증은 사그라들었고, 한숨 대신 규칙적인 호흡이 내 안에 자리 잡습니다.

두려움이 조금 걷히면서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졌습니다.



'다행이다. 산책 나와서 참 다행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새벽에 걸으며 읽은 책은 죽은 책이 아니라 진짜 "산책"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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