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어탕 한 그릇의 행복
가을 추수가 끝난 들판은 고요하고 한적하기만 하다. 캑캑거리며 길 떠나는 기러기의 무리가 푸른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서 씨가 예전부터 눈여겨보았던 농수로 곁의 무논에는 예전부터 미꾸리가 많았다.
서 씨는 삽으로 무논의 흙을 한 삽 퍼 올렸다. 희고 불그스레한 배를 뒤집고 있는 미꾸라지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곁에서 작은 광주리를 들고 있던 까까머리의 아들놈이 그것들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서 씨는 작은 것만 골라 농수로 쪽으로 던져 넣고, 아들은 자기 손가락보다 굵은 것들만 광주리에 담아 넣었다. 벌써 묵직한 게 꽤 많이 잡은 듯하다. 이것들이 요동치며 내는 사그락 거리는 소리가 듣기 싫지는 않다.
서 씨 댁은 가마솥에 동리의 샘물을 길어다 넣고 참나무 장작으로 불을 지폈다. 그 사이 서 씨는 잡아 온 미꾸라지를 굵은소금과 호박잎으로 문질러 깨끗이 씻고 있었다. 옆집 박 씨가 흙담 너머로 얼굴을 내밀고 “동생, 많이 잡았구먼!”하고 말을 건넌다. “조금 있다가 광식이랑, 병태랑 같이 오슈!” 서 씨는 웃음 가득한 얼굴을 들어 박 씨에게 답을 한다.
한 번 끓은 뒤, 서 씨 댁은 흐물흐물해진 미꾸라지를 건져 체로 살만 받쳐내었다. 메주콩이 드문드문 보이는 된장을 풀고 시래기도 넉넉히 넣은 채 한 소 뜸 끓이고 나서 호박잎과 고추, 부추도 썰어 넣었다.
초가집 앞마당에는 멍석이 깔리고 추어탕으로 살판이 벌어졌다. 얼굴이 검게 그을린 서 씨와 옆집 박 씨, 김 씨, 손 씨 그리고 박 씨 댁, 김 씨 댁도 먼저 와 감자가 드문드문 섞인 햅쌀밥을 사기 주발에 가득 퍼담고 있었다.
사랑방에서 할아버지가 텁텁한 목청으로 서 씨 댁을 넌지시 불렀다.
“어미야 잘 먹었다. 상 내가라” 서 씨 댁보다 먼저 큰딸이 주섬주섬 상을 들고 나왔다. 주발에 가득 담겨 있던 추어탕 한 그릇이 몽땅 비워졌다. 요즘 따라 입맛 없어하시던 아버지 때문에 걱정이던 서 씨의 얼굴에 미소가 살며시 비친다.
“어이 동상 한잔하지” 박 씨가 집에서 가져온 농주를 사발 가득 따라준다. 이제 늦가을로 접어들어선지 가을 해는 참 빨리도 떨어진다. 바람도 제법 선선하다. 서 씨 아내는 화로 가득 벌건 참나무 숯불을 담아 마당으로 내온다. 아들놈은 석유 남포에 불을 붙여 툇마루 끝에 내어놓는다. 부엌일을 대강 끝낸 서 씨 댁이 뚝배기에 탕을 담아 상으로 끼어들었다. “참 구수하고 맛 나네유!” 서 씨에게 말 건넨다. 올가을 햇볕은 유난히 따갑더니 흰 밥알들이 기름지다. 밥 수저를 떠넘기는 서 씨 댁의 하얀 치아가 남폿불에 반짝 빛난다.
떠들썩한 서씨네 앞마당에도 가을이 왔다. 둥글게 만삭이 되어버린 초가지붕 위 뒤웅박이 여기저기 보이고, 붉게 물든 감잎은 가끔 마당에 소리도 없이 떨어진다. 장독대쯤인가 아니면 돌 틈 어디에선가 귀뚜라미가 운다.
탕 한 그릇씩을 비우고 난지 얼마 안 되었는데 아이들은 벌써 남은 군불에 고구마를 구워 먹는지 구수한 냄새가 마당으로 새어온다. 따뜻해진 구들장에 누워 할아버지는 옛 노랫가락 한 소절을 혼자 웅얼거리고 아이들은 아궁이 앞에서 동요를 부르고 있다.
오랜만에 마신 농주 한 사발에 서 씨의 얼굴은 더욱 붉어졌다. 환하게 웃는 그의 얼굴을, 언제 떴는지 남폿불보다 밝은 보름달이 환하게 비춰주고 있었다.
혀까지 얼얼하게 마취시킨 뒤 송곳니 옆 어금니를 갈아냈다. 시간 반이나 걸린 고역을 치른 뒤 점심도 못 먹고 연구실로 들어왔다. 다음 주에는 금으로 씌운다고 한다. 아내는 “이빨 좋다고 자랑하더니 잘 되었다”라고 핀잔을 준다. 간호사는 마취가 풀리면 식사를 하라고 하지만 아침도 거른 지금, 오후 수업이 걱정이다. 학교 오는 길에 사 들고 온 요구르트와 바나나 우유 가지고는 아무래도 허기를 면치 못할 것 같다. 그래서 들른 추어탕집.
추어탕 팔천 원, 추어 전골 만 오천 원...
토종인지? 중국산인지? 묻지 않은지 오래됐다. 요즘 세상에 토종 미꾸라지를 어디서 만날 것인가? 그나마 산 채로 수송하기 위해 약품을 처리하기도 하고 마취제도 쓴다던데 그것들이나 가시어진 것으로 끓여주길 막연히 기대할 뿐이다. 산초도 조금 넣고 청양고추도 얹고...
점심시간이 훨씬 지난 시월 말 오후 손님은 나 혼자뿐이다. 심심 거리로 읽던 신문을 내어 던지고 추어탕을 밥사발에 덜어 먹으며 혼자 돌이켜 생각해본다.
추어탕 한 그릇의 행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