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기다리며
그가 있었다. 아파트 뒷길 주차된 승용차의 바퀴 옆에 앉아 있었다. 내가 다가서자 그는 검은 눈으로 경계의 눈초리로 나를 보았다. “토 군 오랜만이네!” 내가 말을 걸었지만 그는 몇 걸음 더 나아가 누군가가 내다 버린 것 같은 언 무를 베어 물었다. 나는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을 찍었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무만 먹고 있었다. 토끼는 살아 있었다. “다행이다!”
내가 토끼를 만난 것은 몇 주 전이다.
‘코로나 19’가 불안과 함께 번지던 날들, 졸업식과 입학식이 취소되고 그나마 틈틈이 다니던 수영장과 헬스장도 문을 닫아버렸다. 2월 말쯤에 마음에 두고 있던 미얀마 여행도 포기하고 텅 빈 캠퍼스의 연구실에 출근하여 책을 읽는 것으로 소일하고 있었다. 당연히 활동량은 줄어들고 하릴없이 저녁마다 막걸리나 맥주로 무료함을 잊고 지내고 있었다. 가끔 원고 정리하러 카페에 들르지만, 그곳도 손님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저녁 8시만 지나도 거리는 텅 비어 가로등의 불빛만이 빈 도로를 비추고 있을 뿐이다. 마치 도시 전체가 죽어 있는 듯 여겨지기도 했다.
내가 베트남에서 돌아와 안성의 터미널에 내렸을 때, 차를 가지고 마중 나온 아내에게 했던 첫마디도 “여기는 꼭 죽은 도시 같다.”였다. 저녁 어스름이 내린 소도시의 터미널, 미세먼지와 어둠이 장막처럼 쳐진 한적한 거리에는 사람은 보이지 않고 차가운 겨울바람만이 지나고 있었다. 귀국하기 전, 하노이 구시가의 번잡한 상점 그리고 길을 가득 채운 오토바이와 사람들과는 너무 대조되는 정경이었기에 나온 말이었다. 평소에도 경기가 침체되고 상권이 이동해 한산해진 거리였는데 ‘코로나 19’까지 기승이니 사람의 발길이 뚝 끊어진 것은 당연한 결과다.
데카메론의 모티프처럼 전염병을 피해 모인 사람들이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는 곳이 있다면 나도 거기에 가고 싶었다. 그래서 홀로 저녁이면 카페에 앉아 글을 정리하거나 인터넷 검색도 하고 브런치의 글들도 읽었다. 단순해진 하루의 일과, 그 속에서 유일하게 달라진 것은 오후의 산행이었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비봉산 기슭과 접해있다. 비봉산은 산 정상이 227.8m의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아파트의 주민들에게 그 산은 일종의 체육시설이자 공원이고 공기청정기이기도 하다. 헬스장이 문 닫고 나서 나는 다시 등산을 시작했다. 등반이라고 하지만 가벼운 옷차림에 운동화, 스틱 한 개, 허리 가방에 든 휴대전화, 물병, 수건이 전부다. 오르는데 50분 내려오는데 40분, 그리고 휴식 10분, 대략 1시간 40분 정도가 소요된다.
몇 주 전이었다. 스틱을 손에 들고 아파트 후문을 나서서 작은 비탈로 접어들 무렵이었다. 도로에 연해 있는 풀숲에서 움직이는 검은 물체를 목격했다. 개는 아니고 고양이 같기도 했지만 다가가 보니, 둥근 머리와 큰 귀의 토끼였다. 그가 놀라 도망갈까 봐 살금살금 더 가까이 다가서자 동그란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그는 전신이 검은 토끼였다. 귀부터 꼬리는 물론 눈까지… 검은 토끼가 경계하는 눈으로 나를 보면서 마른풀을 먹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휴대전화를 꺼내 들고 몇 장의 사진을 찍었다.
“산토끼도 아닌 집토끼가 아파트 인근에 홀로 살고 있다니!” 그가 사라진 우거진 풀숲을 보자 이미 그만이 다니는 길도 나 있다. “웬 집토끼가 이곳에 홀로 살지? 도망친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 기르다 버린 것일까?”
내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친구네 집에서 토끼 한 쌍을 얻어다가 사과 궤짝에 길렀다. 털이 희고 눈이 빨간 토끼였다. 토끼풀이라고도 불렸던 클로버를 뜯어다 먹이는 애완용이었던 그들은 커서 새끼들을 낳자 가축으로 변해갔다. 당시는 토끼를 기르는 집들이 많았다. 닭과 토끼는 가장 일반적인 가축이었다.
한 해가 지나자 토끼는 십 수 마리의 가축으로 늘어갔고, 고등학교 입시를 앞둔 중학생이 매번 그들의 생계를 책임진다는 것은 부담이 되었다. 가을이 되면 배춧잎을 엮어 시래기를 만들었고 가끔은 산에서 칡잎을 따다가 말리고는 했다. 그래도 먹이가 부족한 겨울이 되면 양동이를 들고 두부 공장에 콩비지를 사러 다니고는 했다. 콩비지 값도 안 되는 그들을 키우다 받은 스트레스는 커서 일종의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토끼장 안에서 밥 달라고 뛰던 그들의 몸짓과 순하고 슬픈 빨간 눈빛…
어느 계절인가, 토끼의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키우던 토끼들도 거의 다 죽었다. 다만 여러 종과의 교잡 속에 태어난 한 마리만 살아남았다. 등은 회색, 배는 흰색, 귀와 눈은 검은색을 띠고 있는 암놈이었다. 새끼 때는 가끔 주머니에 넣고 다니기도 했던, 평소 귀여워하던 그 토끼만은 어머니께 부탁을 했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진학 후 시골의 임지에 계신 부모님을 뵈러 갈 때마다 여러 마리의 새끼를 둔, 어미가 된 그 토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했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나를 아는 듯 동그랗고 순한 눈으로 바라보기도 했었다. 하지만 살아 있던 착한 생명들을 한겨울 굶주리게 만들었고 결국은 죽게 만든 기억은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다.
검은 토끼를 만난 이후, 산에 갈 때마다 나는 그가 살아 있는지 살펴보았다. 언젠가는 우거진 풀숲 아래에서 비를 피해 잠든 것도 보았고 추운 어느 날인가는 승용차 밑에서 어슬렁거리는 것도 목격했다.
그런데 한동안 그가 보이지 않았다. 며칠 전 눈이 흠뻑 왔을 때, 산에 오르면서 아파트가 내려 보이는 능선에서 그가 있나 둘러보았지만, 그의 종적은 찾을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잡혀간 것일까? 혹 산책 나온 개들에게 물린 것은 아닐까? 아니면 더 멀리 산속으로 들어가 버린 것일까? 혼자 궁금해했지만 어쩌랴! ‘그럴 줄 알았다면 배춧잎이라도 가져다줄 걸…’하는 생각도 들었다.
여러 번의 산행 속에서 만난 동물들은 여럿 있다. 들고양이는 물론 노루, 야생 토끼, 꿩, 뱀까지 도시 인근의 산속에 그들이 산다는 것은 어쩌면 신기하고 다행한 것일는지 모른다. 적막한 나만의 산행 속에서 만나는 인연들, 며칠 전에도 만난 박새와 산비둘기, 꿩, 내게 놀라 황급히 달아나던 노루, 아파트 후문 앞에서 어슬렁거리던 들고양이…
늘 산에 오를 때마다 토끼가 사는 풀숲을 두리번거리며 본다. 잘살고 있는가? 하고… 사나흘 전에도 나는 그를 만났다. 가까이 다가가 사진을 찍었지만 그는 본체만체하고 풀만 뜯고 있었다.
세상일이 어떻게 돌아가든 봄은 어김없이 오고 있다. 겨우내 차가운 땅속에 숨어 있던 생명들이 하나 둘 깨어나고 있다. 민들레와 냉이, 망초의 작은 새순들이 나 잘살고 있다는 듯 어린 손바닥을 보여준다. 산에 오르는 능선의 작은 개울이 돌돌돌 소리 내며 흐르고 있다. “나는 혼잣말로 “조금만 견뎌라, 봄이 오고 있다.”라고 토끼에게 말하고 있었다. 이제 몇 주만 지나면 들판 가득 풀이 돋고 새순도 피어날 것이다. 그때쯤이면 온 야산과 들판은 토끼에게는 먹을 것 천지일 것이다.
어제였다. 비어버린 캠퍼스의 연구실에서 책을 읽다가, 일찍 퇴근하고서 오후 네 시쯤에 산에 가기로 했다. 물병을 챙겨 들고 느릿느릿 토끼가 살고 있는 언덕으로 걸어갔다. 할머니 서너 분이 근처의 벤치에 앉아 있을 뿐, 토끼는 보이지 않는다.
터덜터덜 하산하는 길, 향교가 있는 길 쪽으로 내려오려다 아무래도 토끼가 궁금해 올라오던 길로 접어들었다. 전날 비가 온 탓인지 미세먼지의 장막도 걷혀 붉은 저녁놀이 서서히 번지고 있었다. 산행이 거의 끝나는 지점, 아파트 인근의 토끼가 사는 곳과 가까운 길 위에 무언가가 있다. 나는 멈추어서 자세히 바라보았다.
누군가 어설픈 글씨로 “토끼”라고 땅 위에 나뭇가지로 써놓았다. 그리고 그 위에는 마치 탁본한 듯한 토끼의 형상이 있었다. 안경을 고쳐 쓰고 자세히 보았다. 귀와 꼬리까지 분명 토끼의 모습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일부러 그려놓은 것 같지는 않다. 토끼의 모습이 그려진 부분은 다른 쪽의 흙보다 가라앉아 있고 색도 짙다. 다만 토끼라고 길 위에 낙서를 한 인물(아마 아이들)이 길 위에 각인된 그 형상 위에 눈과 주둥이를 그려놓은 것 같았다. 신기한 토끼의 형상은 사람이 그린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내 추측이 맞지 않기를 원하지만, 엊그제 비 오는 날 그가 죽은 채 길 위에 하루 종일 있었다는 것이다.
오늘은 학교에도 산에도 가지 않았다. 오후 다섯 시쯤에 노트북이 든 배낭을 메고 카페에 왔다. 토끼의 자국이 있던 언덕길로 돌아서 왔다. 토끼라고 써놓은 글씨는 잘 보이지 않지만 토끼 모양의 자국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길 위의 흙의 색깔과는 다르게, 마치 음각한 듯한 토끼의 형상이 길 위에 찍혀 있었다. 내가 쓸쓸히 언덕 아래로 내려올 무렵, 목줄 없는 한 마리의 개가 그 길로 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개가 토끼를 죽인 범인이라고 단정할 수가 없다.
한겨울 동안 그래도 잘살고 있었는데, 나는 그가 왜 죽었는지 모른다. 만약 타살이라면 누가, 왜 그를 죽였는지도 모른다. 마음이 애잔하다. 봄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도 나처럼 살아 있는 생명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