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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시인 Mar 24. 2020

일상에서 만나는 아름다움과 기쁨. 11

다시 봄날은 오는데

      1

    기다림 없이도, 그리움 없이도 그가 온다.

    약속도 없었는데 그가 온다.     

    

    바이러스와 미세먼지로 점철되었던 하 수상한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고 있다. 아파트 공터에서 땅 거죽을 뚫고 새우란의 움이 돋고 있다. 움은 마치 송곳처럼, 화살처럼 흙은 뚫고 솟아오른다. 

    일주일 만에 다시 비봉산을 오른다. 아내도 진달래 구경을 하겠다고 따라나선다. 한층 부드러워진 바람결이 얼굴을 스친다. 아내와 나는 방독면을 한 채 산길을 오른다. 까치, 산비둘기, 박새들의 노랫소리. 목탁새라고도 불리는 딱따구리의 타구음이 잔잔히 산길로 깔리고 소나무와 전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오후 햇살의 따스함이 고맙다.

    작은 능선을 따라 오르자 몇 그루의 진달래가 꽃봉오리를 매달고 있다. 연분홍의 웃음이 참 귀하게 느껴진다. 겨우내 활짝 웃어본 적이 몇 번이나 있었던가.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사람 만나는 것이 두려운 날들, 자욱한 미세먼지 때문에 산에 오르기를 회피했던 날들이 얼마였던가. 내가 전염될까 봐 두려운 것이 아니라, 혹 숙주가 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까 걱정이 되어 맥줏집과 카페에 가는 것도 꺼려했던 날들…

비봉산 중턱에서 만난 진달래꽃

       2

    지구온난화에 의한 기상이변, 감염병의 세계적인 유행인 팬더믹 이는 우리 인류들이 스스로 초래한 재앙이다. 인간의 자만과 이기주의, 산업화가 몰고 온 비극이다. 남극과 북극의 빙하는 예상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녹아내리고, 지난겨울 눈 구경도 제대로 못한 것이 현실이다. 

    오늘 유럽과 미국에서만 하루 수만 명이 감염이 되었고 수백 명 이상이 사망했다는 반갑지 않은 뉴스가 전해지고, 대학의 개학도 더 연장될 가능성도 있다고 전한다. 3월의 마지막 주에 접어들었지만, 나는 아직도 학생들과 마주하지 못했다. 신입생들은 자신이 입학한 대학 캠퍼스의 정원에서 한창 피어나는 개나리와 산수유는 알지도 못할 것이다. 

    겨울 방학 동안 나의 동선은 단순하다. 집-연구실-집-카페로 이어지는 공간 속에서 접하는 인물은 아내와 동료 교수가 전부다. 카페에서도 늘 나 혼자 있기에 하루 동안 만나는 사람은 손꼽을 정도다. 그나마 동료들과 막걸리를 마시거나, 주말에 아파트와 접해있는 산에 오르는 것이 일상적인 궤도를 이탈하는 시간이다.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갇힌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우리는 길들여지고 있다. 마치 새장의 새처럼 종종걸음으로 집안의 이곳저곳만을 배회할 뿐이다. 텔레비전의 각진 화면에서 수상한 세상의 소식을 듣고 모니터의 네모난 화면 이곳저곳에 포인터를 클릭하면서 시절을 보낼 뿐이다. 

이사 가신 할머니가 만든 아파트 공터 꽃밭에서 

    그러던 토요일 아침, 나는 움들을 보았다. 땅을 뚫고,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솟아오르는 새싹들을 보았다. 그동안 어떻게 지루한 겨울을 견디었는가? 그 끈질긴 생명력에 경외감을 느낀다.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 듯 보이던 황량한 땅속에서 “나 여기 있었노라!” 외치듯 돋아나는 움들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날 저녁 나는 오랜만에 몇 구절의 시어를 토해낼 수 있었다.     

     

 


  움          


움트다.

오… 음… 

새우란의 움을 본다.

송곳처럼, 화살처럼, 칼처럼

땅을 뚫고 솟아오르는 힘을 본다.

백삼 동 아파트 공터에서 겨우내 견딘 끈기를…     


이십사 평 삼십일 평, 사람들은 백삼 동 네모진 공간과 네모난 창틀에 갇힌 채 빨래를 널고, 청소기를 돌리고, 이불을 턴다. 네모진 침대에 아이를 잠재우고, 러닝 머신을 타고 네모난 화면 속에서 울고 웃는다. 미세먼지, 바이러스가 점령한 봄날, 사람이 두려운 날 시절은 하 수상한데, 산수유 개나리가 노란 꽃망울을 터뜨린다.     


움트다.

갇힌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

미세먼지가 부유하는 세상 너머로 새들이 날아간다. 

갈 데도 없고 갈 수도 없는 모난 생각을 뚫고 봄이 온다.

그리움 없이도, 기다림 없이도 그가 온다.

약속하지도 않았는데 어김없이 그가 온다.   

                                                   -「움」 초고 

      3

    일요일, 다가오는 봄의 실체를 확인하고 싶었다. 작은 능선의 내리막길에도 진달래 한 무리가 피어나고 있다. 휴대전화를 꺼내 흐르는 봄의 시간을 훔쳐 담는다. 계곡 쪽의 느릅나무들이 푸른 잎새를 가득 달고 있다. 느릅나무 군락지에서 들려오는 떠들썩한 새소리… 오랜만에 때까치들이 만찬을 즐기고 있나 보다. 미세먼지 없이 말끔한 하늘, 멀고 먼 산의 능선도 보이고 산 아래 옹기종기 자리한 마을에는 산수유 꽃이 노랗게 피어 있다.

    하산하는 길에 약수사에 들렀다. 스님은 앞마당의 꽃잔디 묘목을 다듬느라 바쁘고, 대웅전 뒤 뜰에는 홍매화의 색감이 곱다. 산신각을 따라 내려오니 대웅전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이 봄바람에 흔들리며 말을 건넨다. 풍경소리가 매우 쓸쓸하게 들리는 오후, 서녘에 걸린 저녁해가 모처럼 소도시 전체를 비추고 나는 돌계단에 아내와 말없이 앉아 햇살이 비추는 세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끝)   

비봉산 약수사 산신각 앞에 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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